[게시물 스크랩] 밥 한 그릇에 담긴 철학 [시와 그림에서 배우는 인간관계-컬럼] 2008/01/05 18: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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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경닷컴 > 서안나의 시와 그림에서 배우는 인간관계
원문 : http://www.hankyung.com/board/view.php?no=7&id=_column_257_1&ch=comm

 

밥 한 그릇에 담긴 철학


 


 일생을 살아가면서 나를 받쳐주는 가장 강력한 힘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 중의 하나가 어머니의 힘일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한 끼의 밥과 같은 음식 맛으로 혹은 아픈 배를 쓰다듬어 주는 따스한 손의 촉감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내 주변에 유독 남의 입장을 잘 헤아려주는 시인이 있다. 어느 모임에서 옆자리에 앉은 그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었다. 대화가 오가면서 시인의 배려의 힘이 바로 어머니의 ‘밥 한 그릇의 철학’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시인은 언제나 가슴속에 어머니의 밥그릇을 품고 산다고 말했다. 자신이 어렸을 적에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겨우 밥줄이나 먹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런데 항상 절약하시던 어머니는 손님이 찾아들거나 동냥하러 온 사람들에게 커다란 사기 밥그릇에 밥을 가득 퍼 담아서 김치쪼가리와 함께 대접을 하곤 했단다.


 어느 날 시인이 어머니에게 다소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 우리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데, 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심이 후하신 건가요? ”


그러자 듣고 있던 어머니가 시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하셨다고 한다.


“나도 어디선가 들을 이야기다만, 나중에라도 네가 어디 가서 배곯을 때 누군가 너에게 따스한 밥 한 그릇 주게 해달라고 내가 미리 보시하는 거란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시인은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라 가난함 속에서도 주변을 헤아리라는 어머니의 숨겨진 말뜻을 다는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가여웠고 자신을 위한 어머니의 사랑에 가슴이 탁 막혀오더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버리자고 맹세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가난했고 돈도 안 되는 시를 열심히 쓰고 있다. 자신은 남을 위해 물질적으로 베풀어 줄 것은 없지만 대신에 마음이 부자라고 말했다. 어쩌면 자신의 무능력함을 합리화시키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마음이라도 부자인 게 어디냐며 활짝 웃는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남다른 점이 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으며 남에게 화를 내는 법도 없다. 가족들과 전화를 할 때도 친구처럼 상냥한 부모의 모습을 보인다. 또 격한 의견 대립이 있는 자리에서도 농담을 던져 사람들의 격양된 감정을 누그러뜨리게 한다.


 나는 가끔 밥을 먹을 때마다 동료시인이 말했던 어머니의 밥 한 그릇에 담긴 소박한 철학을 떠올리곤 한다. 자식을 생각하면서 걸인에게 밥 한 그릇을 꼭꼭 눌러 담았을 어머니의 마음이 시인의 가슴 속에 환한 불빛으로 켜져 있다는 것을.


 요즘에 이런 어머니의 밥 한 그릇의 철학을 맛볼 수 있는 밥집이 있다. 바로 종로 삼가 역에서 낙원상가 쪽으로 나오면 곧 쓰러질 듯한 해묵은 간판을 내건 '소문난 집 추어탕'이 그곳이다. 이곳의 식사가격은 1,500원이다. 이 식당의 주인은 근처 탑골공원의 걸식 노인들을 위해 밥값을 올리지 않는 어머니 마음과 같은 경영철학으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해장국이 펄펄 끓는 가마솥을 옆에 낀 식당 문을 들어서면 식당 한편에 깍두기와 단무지를 담아놓은 커다란 찬합 통들이 보인다. 투박한 둥그런 나무 탁자들에 모르는 사람들끼리 앉아 김이 설설 오르는 뚝배기에 담긴 해장국과 밥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한다. 흰밥과 직접 퍼 담은 깍두기 그리고 붉은 고춧가루통과 시래기가 섞인 해장국이 전부이지만 노인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는 따뜻한 어머니의 밥상임이 틀림없다. 이 '소문난 집 추어탕' 부근의 골목길에는 2,500-3,000원 정도면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많다. 순대와 돼지머리 고기 그리고 김치찌개의 구수한 냄새와 함께 막걸리를 걸치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골목이다.


 어머니를 그리며 쓴 시가 한 편 떠오른다. 멀리 사는 어머니가 부쳐 온 소포 꾸러미를 여몄다 풀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두현 시인의 시를 읽어본다. 낡은 장갑과 버선과 헌 내의로 둘둘 싼 유자 몇 알과 어머니의 서툰 필체를 보며 눈가를 붉히는 시인. 물미해안 파도소리를 따라 새벽까지 자식 걱정으로 밤을 밝히는 어머니의 절절한 마음이 눈물자국처럼 드러나는 시이다.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 고두현 시집『늦게 온 소포』, 민음사, 2000



*고두현 시인은 1963년 경남 남해 출생했습니다.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유배시첩」연작이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시집으로『늦게 온 소포』『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가 있습니다. 현재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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