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이 사라진 정치 [R군의 일상] 2009/01/11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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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김형오 국회의장은 하룻동안 국회를 비웠다. 어디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이하 관계자들은 "모른다"고 했다. 13일 직권상정을 항의하러 갔던 의원들은 분풀이할 곳을 못찾고 돌아갔다. 국회의장을 못만나 열받은 야당은 의장실 점거를 시작했다. 이후 20일 가까이 진행된 국회수난사의 시작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의장은 사무처를 통해 기자들에게 하소연했다. 요약하자면 '이런 법이 어디있느냐'며 점거를 풀어야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질질 짜는 소리로 들렸다. 13일 직권상정을 할 때 야당이 항의방문 올 지 몰랐나. 항의방문 오면 하루 정도 피하기만 하면 될지 알았나. 소나기는 일단 피하자는 건가. 그런 마당에 직접 대화할 배짱은 가지지 못하면서 의장이 여론전에 나서다니. 한심해 보였다. 쟁점 법안 강행처리는 이 시점에서 물건너 갔다고 볼 수도 있다.

역시나 한달간 진행된 입법전쟁에서 국회의장은 마지막에 야당의 손을 들어줬다.

 

사실 난처한 상황에 직면해 집 나간건 김 의장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12일 예산안을 놓고 여야가 막판 줄다리기 하던 상황에서 이한구 예결특위원장 역시 7시간 동안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다. 예산관련 현안을 꿰고 있던 이 위원장이 사라지면서 한나라당은 야당과 어떤 협상도 진척시키지 못했다. 3차례의 최종 협상이 이 위원장이 없다는 이유로 무위로 돌아갔다.

그렇게 7시간을 사라졌다 돌아온 이 위원장은 기자들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사우나를 갔다 왔다"고 했다. "나는 국회직인 예결특위위원장이므로 협상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협상에 들어갈 이유가 없는 이 위원장은 그간 진행된 여야 협상 결과를 모두 뒤집었고 야당의 주장이 거의 반영 안된 안을 위원회 안으로 확정했다. 앞뒤 안맞는 이야기다.

질질 짜는 것보단 낫다고 해야 하나. 중요한 시점에 마음 내키는대로 사라졌다가 나중에 나타나 현안을 마음내키는대로 자르고 붙였다. 여야 협상과 장기적인 국회 운영의 틀은 안중에도 없었다.

 

통념상 책임감은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전통사회에서 가장에게 부여되던 중요한 덕목으로 어느 정도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공동체를 위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국회 파행의 원인과 보완 방안을 놓고 말이 많다. 하지만 현장에서 지켜본 바로는 이같은 수컷의 덕목이 중요한 시점마다 실종됐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요는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이같은 덕목을 정치현장에서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정치 현장에서 수컷의 멸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무리를 지어 회의실을 점거하고 사무실 탁자 위에 올라가 커피잔을 걷어차며 자신의 원시성을 만천하에 알린 수컷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수컷들이 단체로 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수컷의 위기는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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