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마녀의 전설. ['당신이 가져야 할 섬(汝矣島)'에서] 2008/12/01 15: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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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에는 '백발마녀'로 불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작년 초부터 당의 분화가 시작됐으니 벌써 2년 전 일이군요.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을 출입하던 각 언론사 말진(한 출입처를 맡은 기자 중에 가장 연차가 어린 기자)들 사이에는 백발마녀로 불리던 중진 의원이 있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거칠던 열린우리당 정치인들 중에서 유독 뛰어난 정치감각을 발휘해 판을 들었다 놨다 했답니다. '마녀'라는 별명에는 이같은 수완이 반영된 것이었죠.

그리고 '백발'이란 건 역시 그 사람의 외모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쯤되면 정치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눈치 챘겠죠..

 

바로 김한길 전 원내대표입니다.

 

사실 '마녀'라는 별명에는 부정적인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습니다. 많은 정치적인 움직임에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며 정치권 취재가 아직은 서툰 말진들의 눈에는 '술수'를 부리는 것으로 비쳐졌던 것이죠. 다른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비교해 말진들에게 덜 살가웠다는 점도 말진들 사이에 인기가 높지 않았던 이유였던듯 합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생각해보면 말입니다.

당시 저나 다른 말진들의 생각이 옳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정치적 술수이든 정략이든 당시 열린우리당의 모습은 '세련'이나 '매끄러움'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열린우리당에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김 전 의원이 주도했던 열린우리당의 해소는 정치적으로 옳은 방향이었고 오히려 이것이 지체되면서 지난 대선에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한나라당에 박살이 난 게 아닌가. 지금 와서 드는 생각입니다.

 

"(정치인을) 싫어할 수 있는데 그건 개인적인 거고 기자로서의 취재는 똑바로 해라"

한창 열린우리당이 분화되던 지난해 중순. '백발마녀의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때 정당팀의 모 선배가 저를 질타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정치인에 대해 사적인 감정을 가지다보면 말이나 행동 하나를 더 부정적으로 보기 쉽상인데 그러지 말라는 말씀이었죠.

 

사실 사람과 사람의 말이 기사를 만드는 정당을 2년 반 가까이 출입하다보니 정치인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취재나 기사에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럴때마다 '백발마녀'와 선배의 충고를 떠올리며 가능한 자신의 가치관을 숨기고 현장과 사실을 생생히 전달해야 하는 기자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것은 아닐까 반성해봅니다.

 

그러면서도 자주 미워하고, 자주 짜증내면서 때로는 씌어진 문장 하나하나에 그런 감정들이 묻어나기도 했습니다.

2008년의 마지막 달을 맞아 그분들께, 그리고 기사를 보셨을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훌륭한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부터 잘 갈고 닦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선이 끝나고 올 1월, 김 전 의원이 소설가 시절 쓴 '여자의 남자'를 사서 읽어봤습니다.

사랑이라는 간단치 않은 감정을 향해 정진하는 소설가가 있었고, 글의 전개나 쉬운 글쓰기나 배울게 많은 문장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이해하려 하기 전에 너무 쉽게 판단한 저의 아집이 그림자처럼 비쳤습니다.

아직 저는 조무라기 기자일 뿐이고 김 전 의원의 정치적 미래도 아직 남아 있으니 어디서든 언젠가 다시 한번 마주할 기회가 있을 걸로 생각합니다. 그때는 좋든 나쁘든 개인적 감정은 잊고 독자가 궁금해하는 것, 필요로하는 내용만 '백발마녀'로부터 얻어냈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그만한 그릇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한길, 열린우리당, 백발마녀, 기자 댓글(0) l 트랙백(0) l 스크랩
대(對)기자 사기극이었던 11일 추경안 처리 ['당신이 가져야 할 섬(汝矣島)'에서] 2008/09/16 1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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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아침은 기자생활하는 동안 잊지 못할 듯 합니다.

국회에서 새벽 1시반까지 추경안 처리 과정을 지켜보고 '한나라당 강행처리'라는 1면 제목을 뽑고 왔는데 아침뉴스를 틀었더니 무산됐다는 내용이 나올 때의 느낌이란.

자정을 전후해 예결위 전체회의에서 추경안이 처리됐지만 새벽 4시에 한나라당이 사실상 백기를 들면서 뒤집혀 버린 것이죠. 덕분에 중앙 일간지들은 하나같이 1면에 오보. 낯 뜨거운데다 올드매체로서 신문의 한계를 체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기자들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한번씩 속았으니..

 

민주당의 '뻥카'.

시간을 돌려 추경안이 한참 예결특위 소위에서 심사되고 있던 11일.

저녁까지 기자들은 추경안이 추석 전에 처리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나라당은 강행 처리하겠다고 밝혔지만 추경안 단독처리의 전례가 없었던데다 민주당이 '절대 통과시켜 줄 수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서죠.

사실 야당이 '절대 안된다' 이야기하면서 몇 가지 양보를 해주고 받아주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 경우는 약간 달랐습니다. 한전 등 상장공기업에 1조원 이상을 지원할 수 없다는 민주당의 논리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는데다 추경안을 꼭 11일까지 처리해줘야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죠. 결국 기자들은 민주당의 엄포가 꼭 엄포만은 아닐거라 생각하면서 추경안 심사가 추석 이후로 넘어가는데 한 표를 던지는 분위기였습니다. 때문에 정치부 출입 기자들의 경험이 적은 모 경제신문의 경우에는 '추석전 추경안 무산'으로 저녁 가판에 박기도 했었죠.

이렇던 민주당이 기류를 바꾼 것은 저녁 9시를 넘어서면서부터였습니다. '절대 처리 못해준다'더니 밤중에 원내지도부가 국회에 모여 회의를 시작한 겁니다. 회의를 거듭하는 와중에 한전 등에 대한 지원금을 조금 삭감하고 민주당이 요구하는 예산안을 추경안에 추가 반영하는 선에서 해결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죠.

갑자기 확 바뀌는 분위기에 기자들도 바빠졌습니다. 다음판 기사 제목을 타결 가능성을 풍기는 방향으로 고치고 이에 맞춰 기사도 약간 손보고.

예상과달리 상황이 길어진 명절 전날 밤, 한 민주당 출입기자는 조정식 원내대변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결국 민주당이 한전 보조금 안된다고 했던 건 뻥카(카드놀이에서 패가 좋지 않음에도 좋은척 상대방을 속이는 수법)였죠?"

 

자기당 의원들도 속인 한나라.

결과적으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합의는 실패했지만 한당이 관련 법을 예결특위에서 강행처리한건 다들 아실 터. 문제는 다음부터였습니다.

예결특위 전체회의의 정족수 문제를 놓고 절차에 대한 문제제기가 민주당에서 있은 거였죠. 민주당이 관련 문제제기를 처음한 것이 새벽 0시 30분이었으니 민주당의 주장만 반영했다면 신문의 마지막 판 마감 시간인 1시 30분 전에 고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작은 절차적 문제로 고치면 충분히 보완 가능하다."며 추경안 처리를 위해 밤 늦은 시간에 본회의장에 집결한 의원들을 붙들었습니다.

그런 지도부의 말을 믿은 의원들이 본회의장 책상을 배개삼아 졸며 본회의 시작을 기다린지 4시간. 결국 국회의장이 절차적 하자를 문제삼아 본회의를 열 수 없다고 했고 의원들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회의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윤전기에서 나온 그날자 신문이 트럭에 실려 각 지국을 향해 달리고 있던 그 시각이었죠.

 

대기자 사기극, 하지만.

사기극에 거짓말이니 하며 부정적인 단어를 동원했지만 사실 이같은 사건은 국회에서 비일비재합니다. 현안이 있을 때마다 각 당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상대에게 '뻥카'를 치고 복잡한 법적 절차를 모르다보니 자기 당 의원들까지 본의 아니게 속이는 '양치기 소년'이 되기도 합니다. 꼭 정치인들에게 악의가 있다고 보기 힘들다는 거죠.

문제는 그런 일을 매번 겪는 기자들이 어떤 것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분별해 기사에 쓸 수 있는가이겠지요. 모든 신문이 11일자에 '추경안이 처리됐다'고 썼다가 12일자에 이를 뒤집을만큼 당시 물리적인 상황이나 여건 면에서 판단이 쉽지 않기는 했습니다만 다들 추경안이 처리됐다 생각하고 안도하고 있던 상황에 민주당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거나 국회의 절차적 문제를 좀 더 고민했다면 이런 사기극에 속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추경예산안, 민주당, 한나라당, 기자 댓글(1) l 트랙백(0) l 스크랩
한나라당은 화장실 언제가는거야!? ['당신이 가져야 할 섬(汝矣島)'에서] 2008/08/20 1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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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로 원구성 협상이 타결됐습니다.

지리하던 국회의 민생 발목 잡기도 이제는 끝난 것이죠.하지만 이같은 결과가 있기까지는 며칠에 걸친 여야 지도부의 마라톤 협상이 있었습니다.

 

보통 국회 본관 3층에 있는 '귀빈식당'이라는 곳이 회담 장소로 애용되는데요.

이같이 중요한 회담이 있는 날이면 회담장 바깥 복도는 기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비공개로 진행되는 회담의 내용을 알길이 없어 회담장을 오가는 인사들로부터 회담 분위기를 귀동냥하기 위해서죠.

 

회담장에 물이 없는 이유.

위의 사진을 보시면 탁자 위에 물이 없는걸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최소한 2~3시간씩 진행되는 어려운 협상임인만큼 목이 타지 않을리 없는데도 물컵을 가져다 놓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화장실을 적게 가기 위해서입니다. 한참 회담을 진행하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회담장을 나서는 순간 내부 상황을 궁금해하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이게 되고 이 과정에서 본의아닌 말실수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쪽에서 생각하는 회담 분위기 및 합의내용이 저쪽의 생각과 다를 수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진행 내용을 언론에 이야기했다 보도라도 되면 협상 타결의 또다른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 탐문'의 분기점은 오후 4시.

기자들은 보통 화장실 입구까지만 따라가며 분위기를 묻지만 종종 화장실 안까지 따라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19일 원구성 협상같이 중요한 사안이거나 협상이 오후 4시를 넘겨서 진행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오후 4시가 분기점인 이유는 신문사들의 기사마감이 보통 이 시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거나 거의 끝나기 때문입니다. 5시 뉴스에 내용을 내보내야 하는 방송사 기자들 역시 이때부터 긴장하기 시작하죠.

4시 이후로는 신문의 판갈이가 계속되는데다 방송사도 7시,9시 뉴스 등 이후 방송이 이어지는만큼 협상이 완전히 끝날때까지는 회담장 근처를 떠날 수 없습니다.

 

여자 기자들의 불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정당 지도부가 남성으로 구성된 한국 정치의 현실에서, '화장실 탐문'은 정치권에서 남자기자들 이상의 활약을 발휘하는 여자기자들에게 넘기 힘든 장애물 중 하나입니다.

화장실을 향하는 인사를 따라가며 이것저것 묻다가 그 인사가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는 순간 발길을 멈출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이것참' 한숨을 쉬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화장실로 들어서는 정치인과 남자기자들의 뒤통수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순간'에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키고 주위를 둘러싼 기자들을 향해 정치인들은 볼일보는 중간에 '점잖지 못하게 너무 한 것 아니냐'고 하소연을 하지만 일단 마감시간을 앞둔 기자들이라 쉽게 물러설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몇몇이 양옆 소변기 앞에 서며 '저희도 볼일 보러 왔어요'라며 능청을 떨 수 밖에요.

 

한나라당 쪽도 화장실 좀 가라고 하세요!

19일 협상장 바깥에서도 이같은 풍경이 어김없이 벌어졌습니다. 3시가 넘겨 마감시간이 가까워 오는 가운데 화장실을 오가는 정치인마다 어김없이 기자들에게 붙들렸죠.

조금이라도 협상 진행 내용을 알기 위해 기자들의 신경이 곤두선 가운데 어쩐 일인지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인사들만 화장실을 나오는 것 아닙니까. 야당에서는 협상 타결이 임박했다고 이야기했지만 양쪽의 입장과 설명이 다를 수 있는 상황에서 이쪽 이야기만 듣고 기사를 쓸 수는 없는 일. 협상이 일찍 타결되거나 한나라당 쪽에서 화장실 갈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화장실을 가는건 계속 야당쪽. 속이 탄 기자들은 회담장에 돌아가는 야당 의원에게 다음과 같이 소리쳤습니다.

"한나라당 의원님들도 화장실 좀 가라고 하세요!'

 

 

국회, 원구성 협상, 기자 댓글(5) l 트랙백(0) l 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