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이 울컥한 사연은. ['당신이 가져야 할 섬(汝矣島)'에서] 2007/12/02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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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선거 첫날인 지난달 27일 대전역 유세에서였습니다.
자신의 정견을 강조하다 자신의 청년시절에 대한 이야기에 이른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새벽이면 옷보따리 가져다 놓고 오후에 수금하고 와서 돈 달라는 소리 못하고 평화시장 돌았습니다. 2층에 해인사라는 가게가 있었는데요.2층에서 3층 올라가는 철계단에 날마다 쭈그리고 앉아있던 청년 정동영이 눈에 선하다고 사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고개를 숙이고 한참 말을 못 잇는 정 후보.
"저 계단에 항상 .. 목이 메이네요.. 나는 그렇게 먹고 살았습니다.동생들은 학교도 못갔습니다.가족은 그런 것입니다.형은 대학 다녔지만 셋째는 야간실업학교 다녔습니다"

 

이 울먹임을 두고 기자들 사이에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실 어려웠던 청년시절 이야기는 당내경선이나 공식 선거전 이전에도 공식석상에서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 터라 새삼스런 반응에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죠. "쇼가 아니냐"는 일부 기자들의 반응도 이런 맥락입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울먹임의 진정성을 이해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공식 선거전 직전까지 10% 초반으로 나오는 여론조사결과만 보고 있다가 지방에 가서 모인 군중들을 보고 ‘정동영, 아직 죽지 않았다’는 감동을 느낀게 아니겠냐는 거지요. 실제로 이날 발언은 "장남같은 대통령이 되겠다"며 가족의 중요성에 대해 감성적으로 다가가는 와중에 나온 이야기라 그런 의견이 힘을 받았던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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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아파트와 代議制 민주주의 ['당신이 가져야 할 섬(汝矣島)'에서] 2007/10/18 18: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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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무실해진 반값아파트를 놓고 청와대와 한나라당 간의 공방이 뜨겁습니다.

 

"원래 말도 안되는 걸 국회에서 무리하게 요구했다"는게 청와대 쪽의 항변이라면

"애초에 똑바로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는 게 한나라당 쪽의 비판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국회에 와 경제정책의 입법과정을 볼 때마다 느끼던 딜레마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데요.. 바로 대의제 민주주의의 불완전함입니다.

 

 

일단 정부도 억울할만합니다.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이 부동산특위를 꾸리고 분양가 상한제와 원가공개를 추진했을 때부터, 그리고 환매조건부와 토지임대부 아파트 도입을 의원들이 요구하고 나섰을 때부터 정부는 꾸준히 부정적인 입장을 유지해 왔습니다.

 

당시 여론과 국회의 등살에 못 이겨 받아들이긴 했지만 영 떨뜨름한 반응이었죠. 그만큼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주택정책에 있어서는 처음으로- 제대로 관철시킨 의원들은 득의양양했구요. 지난해 7월까지만 하더라도 시민단체 측의 개념없는 주장 정도로만 생각되던 규제와 새로운 형태의 주택들이 부동산값 앙등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와 함께 속속 도입되는 걸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력을 느꼈답니다.

 

 

하지만 한나라당도 열받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부가 시행령을 만드는 과정에서 당에서 요구한 전제조건은 거의 반영하지 않았거든요. 300%에 가까운 용적률 보장과 기반시설부담금 면제, 토지를 분양받지 않더라도 재건축할 경우 분양권을 받는 권리 등 한나라당이 요구한 내용대로 사업이 시행됐다면 반값아파트는 지금과 같은 악명을 떨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정부에서 홍준표 의원이 발의한 '토지임대부 아파트 특별법' 통과를 반대하고 굳이 주택법 조문을 일부 손보는 정도('택지 지구에서 토지임대부 아파트를 도입할 수 있다'는 문구를 삽입하는 정도였죠)로 토지임대부 아파트를 도입한 것도 이런 '속셈'이 읽혀지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정부에서 국회에서 제기한 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요. 반값아파트에 일률적으로 높은 용적률을 보장한다는 것은 도시계획상의 문제점, 지자체에 대한 권한 침해 문제 등을 비롯해 주택정책의 골간을 흔드는 일입니다. 이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여론에 밀려 법안을 개정하고 그 내용을 반영하는 일은 또 그 나름대로 부작용이 있었겠죠.

 

물론 국회가 푸쉬하더라도 소신껏 반대하지 않은 데 대한 책임은 있다고 하겠죠.

 

 

결국,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 힘듭니다.

국민들의 여론을 받아 정책에 반영해야하는 정당과 현실논리와 일관성을 중심으로 집행해야 하는 정부는 그 나름의 논리를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의제 민주주의를 국가 운영의 원리로 규정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쪽이 잘못했다고 재단하기 어렵습니다.

 

진보적 역사가인 에릭홉스봄이 그의 저서 '극단의 시대'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20세기의 독특한 현상'으로 규정하며 했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대의제 민주주의는 현재의 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지고지선의 가치는 아니다. 그것은 사회로 하여금 제도를 유지하는데 엄청난 비용을 들이도록 강요하며 이 비용을 들이기 힘들어지는 시점에서는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장점들. 다양성의 보장과 그를 통한 사회의 역동성. 끊임없는 혁신 등을 생각하며 6월 항쟁 20주년에 피로 지켜낸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긴 한답니다.

 

하지만 국회를 출입하는 경제지 기자로서. 뻔히 부작용이 보이는 설익은 정책을, 그것도 절름발이로 여론에 밀려 내놓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생각들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값아파트, 대의제 민주주의, 토재임대부 아파트, 국회 댓글(0) l 트랙백(0) l 스크랩
휴지통으로 간 손학규 기사 ['당신이 가져야 할 섬(汝矣島)'에서] 2007/10/16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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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후보가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로 확정됐습니다.

그건 지난 3월부터 반년 넘게 손학규 씨를 '마크'하고 있는 저에게 세 가지를 의미했습니다.

우선 손 씨를 예전만큼 따라다닐 필요는 없다는 것.

이제 기사에서 '손학규 후보'를 '손학규 전 경기지사'로 불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손 전 지사의 후보 지명을 염두에 두고 준비했던 원고지 40매 분량의 인물과 정책 소개기사가 한 글자도 신문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책기사는 그렇다치고.. 인물기사는 나름 굴곡 있는 삶을 살아온만큼 재미있어 블로그에 올릴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손학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도 있을 듯 하구요.

 

일단 기사는 손 지사의 후보지명을 전제하고 씌어진 것인만큼 지금 보면 사실관계가 다른 점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어디를 가든 주인이 되라(隨處作主·수처작주)’
 손학규 후보의 좌우명인 동시에 그의 인생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키워드다.민주화운동의 투사에서 명망있는 정치학자로,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경기지사를 거쳐 범여권 후보가 되기까지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시대적 소명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옮기고 그 자리의 주인으로서 소임을 다해왔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전의 위치에서 가지고 있던 기득권과 쌓아올린 위치를 허물어뜨리는데 주저함이 없었다.한나라당을 탈당해 기반이 전혀없는 시베리아나 마찬가지인 범여권에 합류해 악전고투속에 대선후보라는 1차적인 꿈을 이룬데 그의 인생이 담겨있다.

 


◆“혁명가는 사진을 남기지 않는다”
 손 후보에게는 어린시절 사진이 많지 않다.대학시절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진을 모두 찢어 없앴기 때문이다.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세살때 아버지를 여의었다.가난속에서도 고등학교에서 밴드부와 연극부 활동을 열심히 하는 등 천성적인 낙관론자였던 그는 1965년 서울대 정치학과 입학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상과대의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법대 조영래 변호사(작고)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 중 한 사람이었던 손 후보는 정학과 수배,투옥을 거치며 8년만인 1973년에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대학 졸업 후에도 그는 대학선배인 소설가 황석영 씨와 함께 위장취업을 했고 박형규 목사의 손에 이끌려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손 후보는 “자고 일어나면 연탄가스에 중독돼 실려 나가던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이 지금도 가끔씩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이때를 회상하곤 한다.
 개인적으로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다.첫딸의 탄생을 수배로 쫓겨다니는 가운데 맞아야 했으며 그 와중에 아내인 이윤영 씨에게 공중전화를 통해 불러줄 수 밖에 없었던 가곡 ‘꿈길 밖에 길이 없어’는 낭만적이긴 하지만 아픈 기억이다.손 후보의 마음에 가장 큰 생채기를 남긴 일은 홀로 남아 똥지게를 지며 칠남매를 부양한 어머니의 임종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했던 일이다.투병 중에도 끝까지 “막내 아들이 몹쓸 짓 한다”며 걱정하던 어머니에게 떳떳이 나서지 못했던 그는 결국 구속을 무릅쓰고 장례식에 찾아가 통곡 한 번 하고 형사들의 손에 끌려나왔다.
 소득도 있었다.수배를 피해 함백탄광에서 ‘보다까시(석탄 찌꺼기 고르는 일)’를 하고 서울 당산동 철공소에서는 용접일을,원주 농장에서는 막노동을 했다.대학시절 추상적으로만 알았던 서민의 삶을 몸소 체험했다.이 때 만나 지금도 친형제처럼 지내는 용접공 배옥렬 씨는 “집 한채(당시 손 후보의 검거현상금을 의미함)를 껴앉고 자면서도 몰랐다”며 억울해한다.정치인의 위기관리 능력을 얼마나 많은 고난을 뚫고 왔는가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손 후보는 젊은 시절 이미 여러번의 검증을 거쳤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이 때를 떠올리며 그는 “참 신기하다”고 말한다.“무슨 일을 하든지 즐거웠다.심지어 수배를 받아 도망 다닐 때도 내심 재미있었던 것 같다.민주화 운동의 한복판에서 노동자와 빈민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다는 것,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자부심이다”는 것이다.

 


◆정치학자로의 귀환
 손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유신체제의 종말을 사건 발생 이틀 후,김해 보안대 안에서 들었다.부마사태의 진상조사를 위해 마산에 내려갔다가 계엄사령부에 끌려가 죽기 직전까지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은 손 후보는 정치에 참여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그동안 할 일은 다했으니 빈머리를 채우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는 게 이유였다.하지만 고대했던 봄은 곧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광주 민주화운동을 불러온 겨울로 이어진다.영국 런던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을 전해들은 손 후보에게 이는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그는 33살의 나이에 시작한 유학생활을 돌이켜 “혹독한 고문도 견뎌냈는데 하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고 말한다.그리고 그 노력의 결실로 1987년 ‘한국의 반체제 운동’이라는 논문으로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이 논문은 1989년 영국의 대표적 학술 전문 출판사인 블랙웰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돼 국내 학계에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영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운동권 투사에서 학자로의 변신 외에도 그의 일생에 큰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좌우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세계화의 흐름을 일찍 수용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보면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포용할 관점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보수당과 노동당이 분배론과 성장론을 서로 수용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기업과 미국을 적으로 보던 이분법적 세계관을 뛰어넘어 실용에 기반한 독자적인 관점을 정립했다.
 1988년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한 손 후보는 인하대에서 2년,서강대에서 3년간 정치학 교수로 활동하게 된다.강의를 나갔던 서울대에서 동구권 붕괴를 놓고 학생들과 대자보로 논쟁을 벌이는 등 학생들과의 소통에 적극적이었다.그의 일생 중 가장 평탄한 시절을 보내던 손 후보는 1993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공천(경기 광명시)을 받아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뛰어들게 된다.자신을 따르던 서강대 제자들에게 “내가 무엇이 되느냐를 보지 말고 어떻게 하는가를 지켜봐 달라”는 말을 남긴 뒤였다.

 

◆현실정치로
 손 후보가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다는 점은 그가 대선후보 경선과정에 범여권의 다른 인사들의 집중적인 공격 타깃이 됐다.그는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이은 3기 민주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정동영 이해찬 후보에 맞서 “문민정부부터 민주정부로 규정해야 한다”며 다른 여권 인사들과 차별화된 역사인식을 보이기도 했다.보궐선거 출마당시 손 후보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영삼이건 김대중이건 개혁이 옳고 진실된 것이라면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래야 수구세력의 반발을 저지하고 개혁의 강도를 유지할 수 있다”며 “우리 사회의 발전단계로 봐서 재야세력이 제도권 정치에 투신해야 될 시기”라고 자신의 결단을 정당화한 바 있다.
 국회의원 당선은 자신의 정치력을 내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초선의원임에도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차세대 리더로 뽑히기도 했고 대변인으로서 이름을 날렸다.이를 발판으로 손 후보는 민자당의 후신인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에서 15,16대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경기도지사를 역임하게 된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자신의 전공과는 거리가 먼 재정경제위원회와 건설교통위원회 활동을 자청해 민생과 관련된 문제를 구체적으로 고민할 기회를 가졌으며 복지부 장관으로서는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한약분쟁을 진정시키는 협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정치에 입문한지 10년간 유망주에 머물렀던 손 후보가 날개를 단 것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로 당선되면서다.114개 기업,141억 달러에 이르는 외자를 유치했으며 임기 4년 동안 경기도에서 총 74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행정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특히 파주 LG필립스 공장 유치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나라당에서 이명박 후보,박근혜 전 대표와 함께 ‘빅3’로 불리던 그는 올해 3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8월 대통합신당 창당에 동참하게 된다.이유는 간단했다.“대통령이 되고싶어서”.그는 “탈당이 죽음으로 가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한나라당에서는 이룰 수 없었던 선진국가 건설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시베리아로 나왔다”고 비판론을 일축했다.대세론을 형성했다 경선초반 2위로 밀려 칩거에 들어가는 우여곡절끝에 그는 이제 꿈에 한발 더 다가섰다.

손학규, 대통합민주신당 댓글(4) l 트랙백(0) l 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