告別革命 [이런 책은 어때요?] 2007/04/20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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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자들은 항상 자신의 이상에 대해 대가를 치르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지요.'
-류짜이푸, <고별혁명>

고별혁명은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프랑스 국제철학 아카데미에 원사로 있는 리저하우와 진보적인 루쉰 연구자 류짜이푸의 대화를 실은 책이다. 두 사람 다 현재 중국의 학문적, 정치적 상황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400페이지를 넘는 분량 속에서 두 사람은 중국의 근현대사와 문학, 사상에 대해 기존 대륙의 학자들과는 다른 관점을 이야기한다. 덕분에 아직 중국에서는 출간되지 않았다고 한다.

'혁명과 이별한다'는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이 책을 한 번 훑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말은 무엇보다도 '혁명이 아니라 개량이다'라는 문장일 것이다. 이짧은 문장 속에 두 학자가 하고자 하는 말과 그동안의 학문적 여정이 압축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두 사람은 그간 중국의 역사를 모든 사회 분야에 '혁명'이라는 문제와 연관시키고 더 나아가 그런 관점에서만 바라보도록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관점의 이면에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이성보다 혁명적 열정과 광기를 강조해온 중국 공산당 창건 이후의 전통이 깔려있다고 말한다. 오직 상대를 패배시키기를 요구하는 혁명의 이분법은 사회 전반에 걸쳐 투쟁을 불러왔고, 문화혁명 기간에 최고조에 달했다. 자신에 대한 극단적인 긍정과 타자에 대한 견결한 적대감을 통해 달성되는 혁명적 풍토는 여전히 중국 사회 곳곳에 남아서 개인주의를 부정하고, 중국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회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이야기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사람의 대의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됨에도 불구하고, 책 전반에서 논의되는 화두의 공간은 문학이라는 점이다. 문학에 대해 공통적으로 조예가 깊은 두 사람은 자주 중국 근현대의 작가들과 작품들을 인용하며, 사상과 실천, 이상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논의한다. 사실 중국 문학 작품이 우리나라에 그리 많이 소개되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 부분은 재미있는 부분이기는 하나 생소하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하지만, 주자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들이 많은 경우 문인이었던 중국의 전통(굴원에서부터 당나라의 이백과 두보에 이르기까지)과 근대에 이르러 루쉰과 모순 등 사상의 영역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 기라성같은 작가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갈 듯도 하다. 특히 리저하우의 경우에는 전공이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문학, 사회사상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식견을 보여주는데, 이런 대학자를 배출할 수 있다는 것도 우리가 아직은 잘 모르는 중국 인문학계의 숨은 역량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중국과 우리나라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몇가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중에서 가장 의아한 것이 두 사람이 강조하는 '생산력발전' 이데올로기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인민의 혁명적 역량과 계급투쟁을 거세하고 오직 생산력에 관련된 테제만을 강조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지난 몇 십년간 우리네가 지나온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의 어두운 터널을 계속 떠올리게 만들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책 속에서 개인주의의 보장을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현재의 중국상황과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중국의 현실적 상황을 고려한 주장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굳이 그 사상을 계속 마르크스주의의 틀 속에서 끼워 맞추려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혁명적 열정이 거세되고 경제 발전만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가 여타의 자본주의 이론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신중국의 성립을 보고 열광했으며, 인생의 대부분을 마르크스주의자로 보내온 두 사람은 여전히 그 틀에 애착을 보이는 듯하다. 인민이 헌법상의 국가 통수권자까지 소환했던 문화혁명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개혁개방 정책에서 보듯, 중국 역사는 아편 전쟁이후 극과 극 사이를 계속 오갔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애정을 가졌던 사상과는 다른 시각과 결론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의 내적모순과 그간의 고뇌가 얼마간 엿보이는 듯 했다. 한편으로 역자가 후기에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비교한 맥락의 연장선에서, 그 두사람의 모습에 소위 '386'들의 모습이 비쳐지기도 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낭만에 도취되어 있었다.'는 리저하우의 아픈 고백에서도 느낄 수 있듯 이 책은 현실과 역사적 사건 앞에서 '자발적인 사상 전향'을 택한 중국 지식인들의 지적 여정을 담고 있기도 하다.

중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한편, 우리나라의 현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각을 기르는데도 도움이 되는 독서였다. 김태성 번역, 북로드 발간.
중국, 정치, 중국 현대사 댓글(0) l 트랙백(0) l 스크랩
소립자- 미셸 우엘백 [이런 책은 어때요?] 2004/10/16 2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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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서 '이사오기'가 된다고 하기에 시범적으로 옮겨와본 글입니다.

 

 

 

나는 소설 읽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고, 심지어는 어려워한다. 이 게시판에 유독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도 그런 맥락이겠다. 그렇게 잘 읽지 않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품을 택한 건 오로지 동생이 읽었다는 이유다. 집안에 굴러다니는, 표지 예쁘고 그럴 듯해 보이는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는..

 

전체적인 내용은 두 형제의 일생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형제의 일생이라지만, 그들의 부모, 심지어는 조부모의 일생까지도 자세히 소개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우선 두 형제가 68세대에서 조금 뒤쳐진 지점에 속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사람들이 이전의 관념에서 해방되고 통속적인 규범이 철폐되었으며 무엇보다- 성이 해방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러한 흐름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다. 형인 부루노는 왕성한 성욕으로 여기에 편승하길 원하지만 뚱뚱한 몸매와 못생긴 외모 때문에 주변만 맴돈다. 동생인 미셸은 오직 학문에 관심을 가질 뿐, 그것을 제외한 모든 사물과 현상에는 별 관심을 쏟지 못한다.

 

성해방과 68의 정치적 변혁이 물 건너 간 시점에서 그 현상들을 회의한다는 점은 다른 후일담 소설들과 비슷한 점이다. 하지만, 등장하는 두 인물 모두 그 현상들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서 그저 영향만 받는다는 점은 다르다. 두 사람은 성해방의 선구자 격인 어머니에 의해 상처 받고,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받은 주변 사람들과 부대낀다. 일면 성해방과 패미니즘에 의한 가족의 해체와 그것이 개인의 일생에 가져 오는 폐해를 보여주는 듯 하기도 하다. 변화의 긍정적인 부분 보다는 그것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작가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60년대 이후 유럽의 변화에 대해 긍정적인 글들은 쉽게 찾을 수 있어도, 부정적으로 쓴 글들은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특이한 텍스트였다. 문제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통해 이 소설이 프랑스에서 출간되었을 때 왜 그리 논쟁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전체적인 논지나 주요 여성 주인공들(어머니에서부터 두 형제의 연인들까지) 고통 속에서 생을 마무리한다는 점은 두 형제의 마지막과 대비되어 반여성적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반동적인 것으로 규정하기 힘든 내공이 있다. 어쨌든 이 소설 안에서 모든 것은 폄하된다. 60년대라는 시대와 그 시대가 바꾸었던 모든 것들.. 남성의 삶은 오직 성욕을 추구하기 위한 것으로 떨어지고. 그 성욕조차 개체의 한계 이상을 탐욕적으로 추구하는 우스꽝스런 것으로 묘사된다. 삶은 젊은 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어느새 후퇴해 있고, 다음에(다음에 말하지. 다음에 술 한잔 하지)를 생각했던 관계는 종종 갑자기 종말을 구한다. 소설 속의 모든 대상들이 폄하되지만 그것이 가지는 설득력과 삶의 본질에 대한 진정성 때문에 이 소설에 대한 섣부른 평가를 주저하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미셸의 애인인 에나벨의 죽음과 관련된 부분이다. 새생명을 원하던 순간에 자신의 자궁을 모두 들어내야 한다는 걸 알았으며, 끝내 그곳에서 전이된 암 때문에 죽는다.(이 부분만 가지고는 속물적이고 정치적으로 맥락을 해석할 수도 있겠군.. 작가가 에나벨의 성생활에서 원죄를 끌어내 단죄한다는 류의.. 하지만, 전체 맥락 속에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인생의 기회는 빨리 흘러가고, 흘러가는 동안에는 모르지만 종종 돌이킬 수 없다. 누구를 탓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언제나 아쉬울 수 밖에. 가장 소설의 대상과 일치되는 순간이면서도, 좀 더 빨리 철들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셸이 바다에 걸어 들어가고, 무슨 구원을 얻는 듯한 분위기. 끊임없이 삽입되는 생물학 관련 논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가는 에필로그를 통해 미셸과 같은 삶이 궁극적으로 불확실하고 비극적인 삶에서 구원을 얻는 확실한 길이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이 점에서 헤세의 데미안과 정확히 대척점을 이룬다. 데미안이 틀 지어진 세계에서 그것을 깨고 날아가는 새였다면, 미셸은 불확실하고 변화되는 세계에서 예술과 진리라는 비교적 안정된 틀을 찾아 돌아간다. 글쎄.. 미셸과 같은 인간이라면 그렇게 할 수도..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20세기 초에 데미안이 될 수 없었듯이, 21세기 초에도 미셸이 될 수 없다.
소립자, 미셸 우엘백, 소설 댓글(0) l 트랙백(0) l 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