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날리고 있는 일본의 한 취업박람회장. 일단 열기만 하면 장사진을 치는 한국의 취업박람회장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chabs

 


“우리 회사 설명 좀 들어보세요” “60세 정년 보장되고,성과급도 동종업계 최고입니다”
 지난 4월18일 일본 도쿄시내 야구장인 도쿄돔 지하 컨벤션홀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장.민간 취업알선 회사가 연 박람회에서 참가기업 직원들이 회사 부츠앞을 지나가는 대학생들 소매를 잡아 당긴다.하지만 학생들은 시큰둥하다.백화점 쇼핑하듯 회사 소개부츠만 힐끗 보고 돌아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2008년 봄 대졸 예정자를 채용하기 위한 이 취업박람회에 참여한 회사는 일본의 중견·중소기업 113개사.그러나 이날 하루종일 박람회장을 찾은 대학생은 862명에 불과했다.그러다 보니 어떨 땐 학생보다 회사 직원들이 더 많았다.취업박람회만 열리면 구직자들이 바글바글한 한국의 풍경과는 대조적이다.

 

구직자보다 구인자 2배 많아
 
일본 젊은이들은 요즘 ‘취업 호황’를 구가하고 있다.경기회복과 단카이(團塊·일본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정년퇴직이 맞물리면서 인력이 부족해진 일본 기업들이 신입사원 채용을 크게 늘리고 있어서다.일본의 리크루트사가 7315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내년 봄 대졸예정자 채용계획 인원은 올해보다 13% 늘어난 93만3000명에 달했다.거품경제기였던 지난 1991년의 84만명을 웃도는 사상 최고치다.
 반면 내년봄 대학 졸업예정자중 취업을 원하는 학생은 금년보다 0.1% 감소한 43만7000명에 그쳤다.기업들이 뽑으려는 인원의 절반에도 못미친 것.이에 따라 기업의 구인수를 일자리를 찾는 구직자수로 나눈 구인배율은 2.14배로 16년만에 2배를 넘어섰다.올해 구인배율은 1.89배였다.

 

대학3학년 ‘입도선매’등 채용 전쟁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은 ‘구인 전쟁’중이다.직원 수백명씩을 ‘리크루터((recruiter)’로 임명해 모교를 돌리며 인재사냥을 벌이는 회사가 적지 않다.특히 기술인력 부족에 심각한 전기·전자회사들은 필사적이다.NEC는 올해 입사 1~3년차 기술직 직원 1000여명을 리크루터로 조직해 출신 대학의 취업설명회에 파견키로 했다.도시바도 기술계 직원을 중심으로 800명의 리크루터를 차출했다.
 중소·벤처기업들은 더 죽을 맛이다.소프트웨어 개발 벤처기업인 시스템설계의 다케이 마모루 인사부장은 “인력난이 심해지면서 대기업들은 대졸 신입사원을 졸업 1년반전에 입도선매하고 있다”며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의 직원 뽑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했다.이 회사는 올해 15명을 뽑기 위해 지난 2월부터 백방으로 뛰었지만 현재 1명밖에 채용하지 못했다.

 

행복한 고민하는 日대학생들

 

물론 학생들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취업박람회장 앞에서 만난 와세다대 법학과 4학년인 기토 다카시(22)씨는 “이미 도쿄미쓰비시은행 스미토모생명 등 5개 기업으로부터 채용 내정 통보를 받았다”며 “기업들이 봉급 등 채용조건을 경쟁적으로 개선하고 있어 아직 선택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무자동화 업체인 오에스(OS)의 에다 쿄이치 영업전략실장은 “요즘은 회사가 사원을 뽑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회사를 뽑는 시대”라며 “불과 4~5년전만 해도 ‘취업 빙하기’란 말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

도쿄 시내의 미쓰비시도쿄UFJ 지점에 설치된 '창구혼잡 예상 캘린더'.일본 시중은행 창구가 평소에 어느정도 밀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chabs

 

 

일본에서 은행에 가면 짜증이 난다.통장을 개설하든, 송금을 하든 창구 앞에서 20~30분 기다리는 건 기본이다.성격 급한 기자는 10분을 못 넘겨 대기 번호표를 찢어 버리고 그냥 나와 버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시내든, 동네 지점이든 똑같다.
 일본의 시중 은행 창구은 왜 그렇게 밀릴까.이유는 두가지다.우선 창구 업무처리가 너무 느리다.돈을 다른 사람에게 송금하려고 창구에 신청서를 내면 창구직원은 송금신청서가 제대로 작성됐는지만 확인하고 뒷자리 직원에게 넘긴다.그 직원은 송금신청서을 전산에 입력한 뒤 결과를 다시 상급자에게 올린다.
 상급자는 신청서부터 전산 입력까지 일일히 확인한 뒤 결재 도장을 찍는다.결재가 떨어진 서류를 창구직원이 찾아와 고객에게 전달해야 일이 끝난다.창구에 접수하면 즉석에서 전산처리해 1~2분내 송금을 끝내주는 한국의 은행에 비하면 일본 은행의 업무처리는 ‘후진적’이다.
 일본 은행의 이런 후진성은 금융구조조정이 덜 된 탓이다.일본은 거품붕괴 후 시중은행들이 합병을 하긴 했지만 직원들은 별로 자르지 못했다.그러다 보니 한사람이 해도 될 일을 두세사람이 나눠 한다.시간이 더 걸릴 수 밖에 없다.
 일본의 은행 창구가 밀리는 또하나 큰 이유는 은행 영업시간이 짧기 때문이다.일본 은행은 오전 9시 문을 열어 오후 3시 문을 닫는다.한국보다 30분 일찍 열지만 1시간30분 먼저 셔터를 내린다.그래서 총영업시간은 한국보다 1시간 짧다.일처리도 느린 데,영업시간 까지 짧다 보니 은행 창구엔 고객이 미어 터지지 않을 수 없다.특히 영업마감 직전인 오후 2시부터 3시까지는 아예 은행 갈 생각을 말아야 한다.
 일본 은행 창구에 앉아 지루하게 차례를 기다리다 보면 한국의 은행이 그리워진다.뼈아픈 구조조정의 결과이긴 하지만 업무혁신과 전산화로 고객들에게 빠른 서비스를 해주는 한국의 은행들이 선진 은행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한데 얼마전 한국의 금융산업노조는 창구 영업시간을 1시간 단축하려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그러면서 일본 등 선진국 은행도 오후 3시에 문을 닫는다고 선전했다고 한다.왜 하필 ‘짜증나는 일본 은행’을 따라해 꺼꾸로 가려는지 안타깝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

 

일본 미즈호은행의 고금리 외화예금 광고포스터. 포스터 뒤에선 고객이 가입상담을 하고 있다.  /chabs

 

지난 4월10일 오전 일본 도쿄 북부 부도심인 이케부쿠로역 앞 미즈호은행.4개의 외화예금 창구 앞엔 50~60대 고객 30여명이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이들 옆엔 ‘해외 저편에도 나의 미래가 분명히 있다’는 문구와 함께 ‘외화정기예금 특판상품’을 소개하는 광고포스터가 붙어 있다.
 만기에 따라 초기 1~3개월간 연 13%(달러화)에서 연 25%(뉴질랜드 달러)까지 파격적 이자를 준다는 솔깃한 내용이다.창구의 다카하시 히로미 행원은 “올해부터 정년 퇴직하는 단카이(일본의 전후 베이비붐)세대의 퇴직금을 유치하기 위해 특판 상품을 내놓았는데, 반응이 너무 좋다”며 “오후엔 고객들이 밀려 2개의 임시 창구까지 만든다”고 말했다.

 경기회복과 단카이 세대의 본격적인 정년퇴직으로 목돈을 쥐게 된 일본인들이 외화예금 등 외환투자에 몰리고 있다.연 0.5%도 안되는 일반 정기예금 금리에 지친 개인들이 엔화를 달러로 바꿔 고수익 외화자산에 적극 투자하고 있는 것.개인들의 엔캐리트레이드(이자가 싼 엔화를 빌려 고수익 외화자산에 투자하는 것)인 셈이다.
 개인들의 뭉칫돈이 외화투자로 몰리자 금융회사들도 고수익 외화예금과 투자신탁 상품 등을 내놓으며 ‘개미들의 엔캐리트레이드’를 부추기고 있다.개인 엔캐리트레이드는 도쿄 외환시장 거래액의 20~30%를 차지할 정도까지 불어 이젠 ‘엔화 약세’의 핵심 요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고수익 해외예금·투신 불티,환전 배팅까지


2006년말 현재 외화예금과 외화신탁을 합친 일본 가계의 외화자산 잔고는 약 40조300억엔(약 320조원).1년전에 비해 7조5000억엔 늘었다.이 증가액은 일본의 2006년 무역흑자액 7조9000억엔에 육박하는 수준.기업들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개인들이 고스란히 들고 나가 외국에 투자한 셈이다.엄청난 무역흑자에도 불구하고 엔화약세가 지속되고 있는 이유중 하나다.

 외화투자에 나선 일본인들은 투기적 거래도 서슴지 않고 있다.대표적인 게 최근 급팽창한 ‘증거금 외환거래(FX거래)’.금융회사에 일정액의 증거금을 맡기고 그 액수의 20~30배 만큼 인터넷으로 외화를 살 수 있는 환전거래다.예컨대 개인이 10만엔(약 80만원)을 증거금으로 맡기면 언제든지 온라인으로 200만~300만엔(1600만~2400만원) 어치의 달러를 살 수 있다.일종의 외환파생상품으로 환차익을 노린 전형적인 투기 거래다.
 일본의 야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FX거래를 위한 개인들의 계좌수는 지난 3월말 64만개,증거금 잔고는 6678억엔에 달했다.1년전 33만 계좌, 3781억엔에서 두배 가까이 늘어난 것.FX거래에 따른 개인들의 외환거래액은 지난해 약 200조엔으로 추정된다.도쿄외환시장 전체 거래액의 20~30% 규모다.
 도쿄금융선물거래소 관계자는 “지난해 엔화 약세로 FX거래에서 돈을 번 사람이 많다”며 “입소문이 퍼지면서 대학생부터 정년 퇴직한 노년층에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현재 FX거래 상품을 파는 전문중개회사와 온라인 증권사만 100여개사에 달한다.지난달부터는 일본 최대 증권사인 노무라증권 산하의 조인베스트증권도 이 거래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단카이 퇴직금 등 몰려 외화자산 3년간 2배 불어

 

은행 예금 밖에 모르던 일본인들이 환전투기에 까지 나선 이유는 뭘까.그 배경엔 불어난 금융자산과 일본의 초저금리가 겹쳐 있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단카이 세대가 퇴직하면서 일본 가계엔 퇴직금 등 목돈이 생겼다.퇴직한 노년층은 이 돈을 굴려 생활비를 충당해야 한다.그런데 지금 일본 은행의 1년 정기예금 금리는 연 0.35% 안팎이다.이 금리론 생활비가 안 나온다.일본인들이 높은 이자에 환차익까지 볼 수 있는 외화투자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일본 캐피탈파트너스증권 석송규 이사)
 실제 단카이 세대의 퇴직금은 50조엔 이상으로 추정된다.게다가 경기회복으로 개인들의 소득도 늘어 2006년 일본 가계의 자금잉여(금융자산-금융부채)는 전년대비 2.7배인 17조7984억엔에 달했다.그러나 이 돈을 굴리기에 일본의 금리는 너무 낮다.2006년 7월 제로(0) 금리를 탈피했다곤 하지만 단기 정책금리가 여전히 연 0.5%다.미국(연 5.25%)과 비교해 4.75% 포인트나 낮다.

개미들 ‘달러 사자’공세로 엔 약세 지속 전망

어쨌든 개인들의 엔캐리트레이드는 최근 엔화 약세의 핵심 요인이다.외환거래 중개회사인 외환토도콤의 타케우치 준 상무는 “개인들의 특징은 헤지펀드나 기관이 엔케리를 청산해 엔화가 오름세를 보여도 계속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인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3월 한때 기관들이 엔캐리 청산에 나섰는 데도 엔화가 계속 약세를 보인 이유도 여기 있다는 얘기다.도이치증권의 오오니시 토모오 부장은 “지난 2월말 세계 증시 연쇄 폭락 이후 헤지펀드 등이 엔캐리트레이드를 청산하기 시작해 엔화가치가 한때 달러당 115엔대까지 올라갔었다”며 “그러나 개인들의 엔캐리트레이드는 지속돼 결국 엔화는 다시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자산이 불어난 개인들에게 확실한 대체 투자대상이 떠오르지 않는 한 외화투자는 지속될 것”이라며 “그때까지는 엔저도 쉽게 해소되기 어럽다”고 내다봤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