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탈리아 스페인은 물론 칠레 미국 등 와인 신대륙의 프리미엄급 와인이 속속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저마다 최고라 자부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그래도 프랑스 보르도 와인의 아성을 깨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리거나 불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만큼 보르도 그랑크뤼 와인은 명품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맛과 흉내내기 힘든 풍미를 갖고 있다. 문제는 가격도 명품답게 높아 대다수 와인 애호가들이 입맛만 다시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절망하기엔 이르다. 저렴한 '세컨드 와인'이 있기 때문이다.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최고급 와인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세컨드 와인을 느껴보자.
◆맛은 최고급,가격은 절반 이하
세컨드 와인이란 최고급 포도밭에서 작황이 좋지 않아 그랑크뤼 와인을 만들기 어렵거나 블렌딩 과정 중 질이 약간 떨어진다고 판단한 원액통을 한데 모아 만든 와인이다. 같은 포도밭에서 동일한 품종으로 만들며,포도를 수확하는 사람이나 양조업자도 '퍼스트 와인'과 동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컨드 와인의 시초는 1932년 내놓은 샤토 무통 로쉴드의 '무통 카데'다. 당시 샤토 무통 로쉴드의 오너인 필리프 드 로쉴드 남작은 1930년 작황이 나쁘자 '샤토 무통 로쉴드'의 생산량을 줄이고,품질이 떨어지는 포도로 와인을 따로 만들었다. 카데는 프랑스어로 '막내'라는 뜻이다. '무통 카데'는 출시되자마자 최고 샤토에서 저렴한 와인이 나왔다며 화제가 됐고 인기에 힘입어 이듬해부턴 별개의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샤토 무통 로쉴드는 이후 1993년에 '르 프티 무통 드 무통 로쉴드'라는 이름의 세컨드 와인을 내놓았다.
세컨드 와인의 가장 큰 매력은 가격이다(표 참조).일부 와인은 빈티지에 따라 가격이 퍼스트 와인의 10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 세컨드 와인도 생산자 이름을 걸고 내놓는 것이기에 가격 대비 맛이 좋은 게 장점이다. 서울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엄경자 소믈리에는 "5대 샤토의 세컨드 와인은 일반 그랑크뤼 와인들보다 뛰어난 품질도 있다"며 "무조건 그랑크뤼급 퍼스트 와인이 세컨드 와인보다 좋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라도 시도해 보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그랑크뤼급 세컨드 와인먼저 그랑크뤼급에선 '샤토 라투르'의 세컨드 와인 '레 포르 드 라투르'가 세컨드 와인 중에서도 최고 품질로 꼽힌다. '레 포르 드 라투르'는 전문가들로부터 '샤토 라투르'에 비해 무게감이 덜하고 숙성이 빠른 점을 제외하고는 놀랄 만큼 닮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와인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가진 '샤토 마고'의 세컨드 와인으론 '파비용 루즈 드 샤토 마고'가 있다. 우아한 자태와 고결함이 퍼스트 와인의 기품을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와인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가 샤토 마고에 100점 만점을 줬던 2000년 빈티지의 세컨드 와인에 94점을 주면서 증명됐다.
와인의 여왕이 있다면 왕도 있다. '와인들의 왕,왕들의 와인'이라는 별칭을 가진 '샤토 그뤼오 라로즈'가 그 주인공.그랑크뤼 2등급인 '샤토 그뤼오 라로즈 1985'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엘리자베스 여왕이 함께 마신 와인으로,세컨드 와인은 '라로즈 드 그뤼오'다. 프랑스 항공사 에어프랑스가 1등석에 '샤토 그뤼오 라로즈'를,비즈니스석에는 '라로즈 드 그뤼오'를 제공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크뤼 부르주아의 세컨드 와인그랑크뤼 아래 등급인 크뤼 부르주아 와인들도 세컨드 와인을 내놓고 있다. 크뤼 부르주아 등급은 1855년 그랑크뤼 등급에 불만을 가진 실력 있는 와이너리들이 만든 새로운 등급체계로,그랑크뤼에 필적할 만한 우수한 와인이 적지 않아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국내에서 인기 있는 크뤼 부르주아 와인은 '샤토 샤스 스플린''샤토 시트랑''샤토 브리에' 등이 있다. '슬픔을 떨쳐버린다'는 뜻의 '샤토 샤스 스플린'은 프랑스 시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가 헌정한 이름이다.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샤스 스플린'을 "지난 30여년간 꾸준히 그랑크뤼에 필적할 만한 우수한 퀄리티를 지닌 와인"이라고 평가했다. '샤스 스플린'의 세컨드 와인 '샤토 오라투아르 드 샤스 스플린'은 퍼스트 와인보다 한 단계 가벼운 보디감을 제외하곤 맛이 매우 흡사하다.
'샤토 시트랑'의 세컨드 와인,'물랭 드 시트랑'은 검붉은 레드빛의 샤토 시트랑에 비해 농도가 한 단계 낮은 루비 컬러를 띠지만,'샤토 시트랑'의 우아함과 풍미를 잘 담아낸 와인이다. 2000년 빈티지의 경우 '샤토 시트랑'이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91점을,'물랭 드 시트랑'이 84점을 기록하면서 나란히 품질을 인정받았다.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