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2.0 Expo에 대한 기대 [San Francisco/Berkeley] 2009/03/30 1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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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과 재작년에 그렇게 가고 싶었는데,출장 일정을 잡지 못해 올 수 없었던 web 2.0 Expo를 올해는 드디어 갈 수 있게 됐다.지리적인 잇점 덕분이다.

게임개발자컨퍼런스(GDC)가 열렸던 샌프란시스코의 Moscone Center에서 3월31일-4월3일까지 나흘간 열리는 이번 Web 2.0 Expo는 일찌감치 알고 미리 신청한 덕분에 금방 승인을 받았다.

미국의 EXPO가 다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Web 2.0 Expo는 온라인으로 등록할 때 각자 프로필을 올려놓고 그 프로필을 홈페이지에서 검색할 수 있게 해 놓았다.내가 만약에 모르는 사람이지만 어떤 분야의 경력이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쉽게 그 사람을 찾을 수 있게 한 것이다.나 같은 경우도 한국에서 온 기자라는 여러가지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0명이 넘는 실리콘밸리의 기업인이 내가 올려놓은 프로필을 보고 컨퍼런스 장에서 한번 만나 인사하자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내가 이 정도이니 아마 기업인이나 투자자들이 얼마나 많은 요청을 받고 계획을 잡을지 상상이 간다. 각자의 경력과 관심 분야를 다 공개해놓고 만나고 싶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게 한 시스템이다. 나로선 이런 시스템은 처음 보는데, 아주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회를 거듭하면서 (이런 Expo의 성격상 어쩔 수 없이) 집중도나 영양가가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심지어 요즘에는 웹 2.0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지만 새로운 만남의 기회들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참으로 재밌는 시도가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혹시 한국에서 이번 Expo에 참석하시거나 참석하시진 않더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이메일이나 블로그 댓글로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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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가 이미 200년전부터 존재했다? [뉴미디어 세상] 2009/03/26 08: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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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립대 교수인 Aaron Barlow가 2007년에 쓴 'The rise of the Blogosphere'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는데, 지금 인터넷에서 우리가 매일같이 접하는 블로그가 21세기의 현상이 아니라 18세기부터 있었다는 것이다.즉 그는 블로그가 기술의 발전에 의해 느닷없이, 또는 전혀 새롭게 나타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주장을 저널리즘의 역사를 통해서 전개하고 있다.그에 따르면 블로그는 과거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목격했던 18세기말-19세기초 미국 사회 풀뿌리 언론의 재현이다.(그의 주장이 전개되는 과정을 따라가다보면,대학원 시절 교수님이 그렇게 강조했던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번역본으로 대충대충 읽었던 것이 정말 후회가 되곤 한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블로그는 기술의 발전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 사이에 존재해왔던 미디어의 모습이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인터넷에서도 가능해진 것 뿐이라고 지적한다.

당시 토크빌이 미국 사회에서 목격했던 것은 철저하게 지역적인 언론이었다.그것은 지금처럼 상업화된,거대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언론사가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운영하는 부정기적인 간행물이나 또는 (심지어) 카페,레스토랑,거리 등에서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정보를 주고받고 사회 현상에 대해 논평을 하는 것을 가르키기도 한다.

이때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토론을 할 수 있었고 대화를 나누면서 정보를 수집했다.동의와 반박,새로운 정보 제공 등이 모두 오프라인에서 실시간으로 이뤄졌고 그런 행위 자체가 직업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생활이었던 것이다.

사실 토크빌이 목격한 미국 사회의 시대엔,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널리즘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저널리스트라는 것 역시 직업으로서가 아닌 활동 자체를 뜻하는 것이었다.(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지 않은 나는 이런 내용이 무척 재미있었지만 저널리즘 전공자에겐 학부 1학년 수업 수준일지도 모르겠다)

20세기 들어서 직업으로서의 저널리즘이 등장하고 저널리스트들이 활동하면서 풀뿌리 민주주의 시대의 미디어도 사라졌다고 할 수 있고,사람들은 그때부터 철저하게 정보에 소외된 채 직업적인 저널리스트들이 제공하는 그런 정보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한 블로그 시대의 도래는 잃어버렸던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원인 시민 미디어의 재등장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런 관점에서는 블로그의 확산과 일반화 자체가(블로그가 전문적이냐에 전혀 관계없이) 사라졌던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물론 엄청난 혼란 또한 내재된)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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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만에 돌아온 전제완 사장 [원기가 만난 사람들] 2009/03/10 14: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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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 유아짱(www.uajjang.com)을 창업하면서 2002년 12월 이후 벤처계에 복귀한 전제완 사장은 1999년 프리챌을 창업해 전국에 프리챌 커뮤니티 열풍을 불러일으킨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전 사장은 최근 복귀와 함께 자신의 미니홈피(  http://www.cyworld.com/uaboss )도 만들었는데, 미니홈피를 통해 다시 '자유인'으로 복귀하게 된 소감과 다짐,과거 이야기 등을 비교적 자세히 풀어놓고 있다.그에 대해선 그의 홈피를 참고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지만,한때 인터넷 업계 화제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에 대해 나름대로 제3자 입장에서 정리를 한번 해보는 것도 괜챦을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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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의 전제완 사장의 모습.강남 사무실에서>

삼성그룹의 엘리트 사원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83학번인 전 사장은 1989년 삼성물산 인사팀에 입사해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이다.전 사장은 1991년 삼성그룹의 인사정보시스템 개발 업무에 투입돼 94년까지 이 일을 맡아서 하게 된다.

당시 그가 이 일을 맡아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인사과에서 일하던 시절 인사 업무처리가 비효율적으로 되는 것을 보고 독학으로 컴퓨터를 공부했기 때문이다.그는 4년간 이 업무를 마치고 제1회 자랑스런 삼성인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국으로 1년간 지역전문가로 파견되기에 이르른다.지금도 그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회상하는 때다.

40여일동안 미국 40개주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오레곤주에서 공부도 한 그는 당시 실리콘밸리에 대한 투자가 진행되던 미국의 현실에 깊은 인상을 받고 큰 자극과 도전을 받은 것 같다.(그에 의하면 이때가 인생이 바뀐 시점이라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 3년 정도 삼성에서 더 근무했지만 대기업의 구조에서 탈피해 자유로운 생활을 동경했던 전 사장은 '자유와 도전'이라는 두가지 가치만 들고 미련없이 삼성을 그만뒀다.

자유와 도전정신으로 프리챌 창업
그가 1999년 4월 15일 자본금 5000만원으로 설립한 프리챌((주)자유와도전)은 다음,네이버 등 다른 포털이나 이미 당시 국내 최대 인터넷사이트였던 야후코리아에 비해 뒤늦게 출발했지만 확실한 차별점을 갖고 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인간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인터넷 상의 공간을 생각하면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쇼핑 섹션 바이챌, 금융 및 증권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찰닷컴, 게임업체 드림챌과 조이챌, 디자인 회사 인디챌 등 그가 프리챌 설립후 확장해 나간 사업들은 이후 인터넷기업들의 모델이 될 만큼 중요한 역할들을 했었다.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꿈이었던 전제완 사장은 프리챌을 통해 그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프리챌에서 강력한 커뮤니티를 구축한 것은 그런 그의 꿈을 위한 1단계였던 것이다. 커뮤니티를 통해 소프트웨어를 보급하고 그 플랫폼을 통해서 전 세계에서 누구나 자신들의 언어로 접속해 사용하는,그런 모델을 꿈꿨다고 한다.때문에 그는 다음이나 네이버 등 포털업체와 경쟁할 필요가 없다고 봤고,독자적인 모델을 구축하려고 애썼다.

프리챌 돌풍
프리챌은 당시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젊은 층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설립 2년만에 회원 1000만명을 끌어모아 야후,다음과 함께 포털 빅3로 거론될 정도로 성장을 했다.

소프트웨어 업체의 경영자로서 그는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으로서 유료화를 생각했던 것 같다.사용자가 최소한의 사용료를 내야 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사업자의 입장에서는 필수적인 수순이었겠지만 2002년 하반기 당시엔 엄청난 파장을 몰고왔었다.인터넷은 전부다 공짜라는 인식이 강했던 시절이었기에 프리챌의 새로운 시도가 미칠 영향에 다들 주목했던 것이다.

주위의 우려와는 달리 40% 이상의 회원들이 유료화에도 불구하고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전 사장은 서비스의 유료화 이후 글로벌화 및 전혀 새로운 개념의 SNS,소프트웨어 제공 등으로 서비스의 선순환을 유도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구속과 7년의 잠적
하지만 이런 모든 과정은 2002년 12월3일 오전 전제완 사장이 주식대금 가장납입 혐의로 전격 체포되면서 모두 끝나 버렸다.

그가 꿈을 안고 세웠고,현재 NHN에 있는 조수용 본부장,오승택 레드덕 대표 등 그가 직접 뽑은 최고의 인재들이 그가 구속된 이후 차례로 프리챌을 떠나게 된다.창업자가 구속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선장을 잃은 프리챌과 프리챌홀딩스 등은 창업 초기의 정신을 모두 상실하고 매각과 부도 등을 거치면서 지금은 완전히 다른 회사로 변했다.

결국 긴급체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던 가장납입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이미 그는 2년의 옥살이와 회사 부채를 개인이 떠안은 것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됐다.

경제적인 파산과 구속이라는 엄청난 일은 그를 이후 6년이 넘는 기간동안 조용히 지낼 수 밖에 없게 했다.2004년 12월에 출소한 이후에도 그는 여러차례 재기를 모색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한다.

텔미정보통신으로 복귀 시도
그는 2007년 텔미정보통신의 전문경영인으로 근무하면서 클릭질이라는 서비스를 개발해 오픈했다.그로서는 출소후 2년반만에 시도한 복귀전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전문경영인의 영역은 한계가 있었다.뿐만 아니라 오너와의 의견 충돌로 인해 그가 계획됐던 대로 일은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지난해 봄 그는 이 회사를 떠났고 그가 떠난 후 텔미정보통신은 폐업처리됐다.모처럼 잡은 기회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신분 회복과 유아짱 오픈
그는 2월20일을 기점으로 금융거래를 할 수 있는 신분으로 회복됐다.그 동안 그가 대표이사로서 떠안았던 부채 등이 해결되지 않아 결국 파산 신청을 했고 그것이 20일로 최종 끝난 것이다.

최근에는 유난희 대표와 함께 유아짱의 공동 대표이사로 취임도 했다.그가 이렇게 외부에 공식적으로 대표이사로 재등장하는 것은 2002년 12월 이후 햇수로 7년만의 일이다.

그가 대표이사로 취임하는 시점에 콘텐츠 전문투자사인 베넥스인베스트먼트로부터 1억원을 투자받기로 계약을 했다.적은 돈이지만 그에겐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이 어려운 시기에,과거 큰 실패를 경험했던 그에게 다시 온 기회이기에 소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가장납입 부분응 무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실추됐던 명예 일부분을 회복헀다.하지만 대박의 문턱에서 좌절한 벤처기업인이라는 딱지에서는 아직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그가 결국 그의 명예를 온전하게 회복할 길은 보란듯이 재기에 성공하는 길 뿐일 것이다.

이를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는 듯,그의 미니홈피를 들어가보면 과거에 대한 담담한 정리와 함꼐 새로운 결의와 의지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다.그가 성공을 시도하다 좌절한 숱한 다른 벤처인들과 같은 길을 갈지,두번째로 인터넷으로 대박을 일궈내는 희귀한 사례의 주인공이 될지는 조만간 밝혀질 것 같다.

전제완, 프리챌, 유아짱, 커뮤니티, 소프트웨어, 인터넷 댓글(2) l 트랙백(0) l 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