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생각나는 것 [夢幻泡影-살아가는 이야기] 2008/12/29 22:36:00
트랙백 주소 :
우리나라에서는 나 같은 사람이 제법 있을 것이다.겨울만 되면 군대 시절이 생각나는 사람들 말이다.

94년 11월에 군에 입대해 97년 1월에 제대한 나는 군대에서 '제대로' 겨울을 3번 보냈다.평택 미군 부대에 있었기에 전방에서 군생활을 한 분들 처럼 힘들게 훈련 일변도의 군생활을 하지도 않았고 눈 치우느라 군 생활을 다 보내지도 않았다.하지만 대신 눈길에서 운전은 정말 실컷 했다.

당시 평택 안정리 미군 부대엔 정말 눈이 많이 왔다.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어떻게 그렇게 눈이 많이 오는 동네가 있을까.그때만 그랬을까.

용산 헌병대에서 대기하다가 나를 픽업하러 온 선임병장을 따라 평택 자대로 들어가던 날도 눈이 펑펑 내렸다.나와 이 병장은 발목까지 오는 눈을 헤치고 막사로 걸어갔었다.제대하던 97년 1월의 그날에도 눈이 정말 많이 왔다.마지막 군용 물품을 반납하고 갖고 나갈 짐만 챙겼건만 더플백이 한가득이었다.(주로 전자제품,CD,책 등이었던 것 같다) 부대 입구까지 나가는 버스를 놓친 나는 그 무거운 더플백을 한쪽 어깨에 들쳐메고 터벅터벅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신기하게도 군 생활에 숱한 경험을 했을 법 한데,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제대하던 날 눈이 하염없이 내리던 그 날의 풍경이다.스물세살 팔팔했던 나는 10km 가까이 되는 외곽도로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아마 그 길을 걸어가면서 나름대로 군 생활을 떠올리고,정리했던 것 같다.그때 여러 기억들을 다 떠올렸기 때문일까.지금은 그닥 떠오르는 게 없다.2년2개월을 보냈고,여자친구를 사귀다가 헤어졌으며 수많은 곤욕을 치루기도 하고 기쁜 날을 겪기도 했건만 이제는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군 생활 중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한 사람을 제외하면 일일이 기억하기 위해선 정말 오랜시간 생각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눈 내리던 그 날의 기억만이 오래 오래 남는다.그 당시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고민했는지는 모르는채 말이다.기억이란 정말 이상한 것이어서-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이 말에 난 아주 동조하는 편이다-나는 당시 제대하던 날 눈 내리던 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풍경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하지만 나중에 생각나는 것은 이 풍경 뿐이었다.나는 분명 그때 여러가지 크고 작은 기대감과 골치아픈 문제들로 많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주변의 풍경 따윈 아무래도 좋았을 터였다.

하지만 12년가량의 시간의 지나고 나서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당시 신경도 쓰지 않던 그런 일들이다.내가 그때 그렇게 고민했던 것들은 지금 와선 기억도 나질 않는다.

어제 딸 아이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다가 다시 그 옛날 생각이 났다.딸에게는 첫 영화관 나들이인 셈인데,우리의 선택은 핀란드 애니메이션 '니코'였다.아빠를 찾아 날고 싶은 사슴(순록?)의 이야기인 이 애니메이션은 러닝타임 1시간20분내내 눈이 내렸다.눈으로 가득한 화면을 보면서 나는 다시 그 시절을 떠올렸다.

겨울이 오면,특히 눈이 내리는 날이 오면 그 날의 그 풍경이 머리 속에 아련하다.더플백을 메고 끝도 없이 걸어야 도달할 것 같은 길의 저쪽을 향해 혼자 걸었던 그 장면.
댓글(2) l 트랙백(0) l 스크랩
나에게 필요한 건 용기였다 [夢幻泡影-살아가는 이야기] 2008/12/08 13:09:00
트랙백 주소 :
난 20대에 접어든 이후 나름의 개똥 철학이랍시고,이런 기준을 갖고 있었다.

1.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2.그런 사람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다.

훈련도 아니고,질책도 아니고,칭찬도 아니고,교육도 아니고,오직 진실한 애정,사랑만이 사람을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 같았다.(남녀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30대가 되고 나서 언제부턴가,명제 1과 명제 2 사이에 아주 큰 간격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뭔가 두 명제를 이어주는 조건이 없으면 둘은 절대 만날 수 없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두 명제를 각각 하나의 별이라고 한다면 수백만 광년이나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사람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사랑이라고 치자.그런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다는 거지?

지금까지 내가 발견한 답은 '용기'다.한때 나는 그것이 '희생'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기에 '희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요즘엔 '용기'가 더 중요한 것 같다.희생 역시 용기 없인 안되기 떄문이다.

위의 명제에서 '사람'이라는 단어에 꼭 다른 사람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나를 집어넣으면 생각하기 편하다.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그런 나를 변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다.

그럼 누가 나를 사랑해야 나는 변할 것인가? 부모님,배우자,형제,친지,친구들,은사님 등 다양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닐까?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어찌 남이 나를 사랑하겠으며,내가 변화될 수 있겠나?

그런데 내가 나를 사랑하기란 항상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다.돌이켜보면 잘못한 결정에 대해 후회하는 경우보다 내가 스스로에게 떳떳치 못했을 때 후회하는 일이 많은데,그런 경우 대부분은 내가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서인것 같다.그리고 100이면 100 원인은 '용기'가 없어서였다.

부족한 자신을 감싸안기 위해서도,실패한 뒤에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도,아픈 가운데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고 거기서 핵심은 '용기'였던 것 같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에 대해 얘기했지만,사실 난 요즘엔 아예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용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필요한 용기의 정도는 다르겠지만,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에 있어서도,하지 않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에 있어서도,남들이 뭐라고 해도 나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도,나만 혼자 딴 것을 하는데 있어서도,사람들과 생긴 갈등을 풀어나가는데 있어서도,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는데 있어서도,일상 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사실 나는 용기가 있는가,없는가를 시험받고 있는 것 같다.

내가 하루하루의 생활에서나 내가 세운 여러가지 계획들,살면서 치르는 시험들 중에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보다는 내가 얼마나 용기있게 대처했느냐가 훨씬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청춘은 곧 정열이라지만,정열 역시 용기가 없으면,담대함이 없으면 실천되지 않는 공허함뿐이다.

하지만 나도 어렴풋하게나마 안다.하루하루 생활 가운데 용기를 내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내가 자신을 돌이켜보고 가장 큰 후회의 눈물을 흘릴 때는 비겁한 행동을 했을 때임을.그렇기에 더더욱, '용기'가 있다면 세상은 살아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용기, 사랑, 사람 댓글(2) l 트랙백(0) l 스크랩
잊을 수 없는 라오스의 밤하늘 [夢幻泡影-살아가는 이야기] 2008/10/10 08:25:00
트랙백 주소 :
지난 8월말 라오스 출장을 갔을 때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은 경험을 했다.
라오스에 간 둘째날,루앙프라방에서 식사를 하고 이동할 때였다.비교적 불을 켜놓은 건물들이 많은 루앙프라방 중심가를 빠져나와 호텔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마을이 작기 때문에 라오스에서는 왠만한 데는 걸어다닐 정도로 다 가깝다) 문득 하늘을 쳐다보게 된 것이다.

그런 하늘을 어디서 또 다시 볼 수 있을까.밤 하늘은 온통 다 별이었다.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별을 다 모아 라오스 하늘에 풀어놓은 것 같았다.불빛이 드문드문한 땅은 오히려 캄캄했지만 밤 하늘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하늘은 환했다.다양한 빛의 별로 하늘이 가득차 있었고 별들 사이로 아주 조금씩,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적은 비중으로 캄캄한 밤 하늘이 잠깐 보일 뿐이었다.

원래 밤 하늘엔 이렇게 별이 많은 거였다.그걸 한번도 제대로 못 보고 살아온 것이다.아버지의 고향인 청송이나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울산에서도 서울보다는 훨씬 별을 많이 봤지만,라오스의 밤하늘과는 비교 자체가 되질 않는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된 별을 한번도 못 본 나의 딸이 생각났다.이 녀석에게 이런 제대로된 밤하늘을 보여줘야 할텐데...서울에서는 힘들 것 같고,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보여줘야 하려나...밤 하늘의 별을 한번도 제대로 못 본 사람과 별을 보고 자란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갑자기 왠 별 타령인지는 모르겠지만,어제 밤 늦게 일을 마치고 귀가하면서 한강 근처에서 하늘을 쳐다보다가 별이라곤 하나도 안 보이는 서울 하늘을 보면서 문든 그때 생각이 났다.
, 밤하늘 댓글(0) l 트랙백(0) l 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