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대망'이라는 일본 소설을 읽었을 때의 일이다.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가 도쿠카와 이에야스를 방문하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와인이 등장했다.그들말로 '친타'라 부르는 유럽산 포도주를 히데요시의 어머니가 선물로 들고간 것이다.영국에서 온 술이니 아마 요즘의 보르도산이었을게다.지금도 그렇지만 영국인들은 보르도산 와인의 최대 소비자였다.
일본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까닭에 대망의 작가가 언급한 더 이전 시기에도 일본인들이 와인을 즐겼는지는 모르겠다.하지만 1500년대 말엽에 이미 일본 상류층들이 와인을 즐겼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기껏해야 고종 때 러시아인 손탁의 도움으로 커피,와인 등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한국과는 그 시대적 간극이 얼마나 큰 지를 절감했다.
그만큼 우리의 와인 문화는 짧다.대중화의 길을 걸은지도 채 5년이 안된다.급성장하긴 했지만 수입액 기준으로 한국인들의 와인 소비는 1000억원 가량에 불과하다.일본의 10분의 1이다.따지고 보면,와인을 공식적으로 수입한 것이 1987년부터니까 마주앙만 알던 한국인들이 시중에서 유럽산 와인을 구할 수 있게 된 것도 20년을 조금 넘었을 뿐이다.
물론,한국은 세계의 와인업자들이 주목하는 장사 잘 되는 국가들 중의 하나다.로마네콩티같은 비싼 와인은 없어서 못 팔 정도다.얼마전 강남의 한 유명 백화점을 취재하다 안 일인데,수백만원짜리에서 하다못해 수십만원짜리 고가 와인들이 선물용으로 꽤 나갔다고 한다.A기업은 한 해에 몇 상자밖에 안 들어오는 로마네콩티를 한 상자(20병) 구해달라고 청을 했다고도 하니 고가 와인은 이미 '접대'용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듯 하다.
짧은 시간에 시장이 급성장하다보니 생긴 병폐중의 하나일 것이다.애초부터 잘못 길들여진 한국의 와인 문화는 이뿐만이 아니다.'와인 지상주의'가 그 중의 하나다.와인이 즐기는 대상이기 보다는 남들에게 스스로를 과시하고 싶은 현시욕의 수단이 됐다는 얘기다.이같은 사고 방식은 일부 와인 동호회의 시음 행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사정이 이렇다보니 음식보다 와인이 우선시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와인 수입사에서 주최하는 와인 시음 행사에 갈 때면 가장 곤혹스러운 일이 깔깔한 입 속에 와인을 털어 넣어야 할 때다.그 때마다 난 "음식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게 느껴질텐데"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지난 3년간 꽤 유명한 인물들을 인터뷰하면서 늘 이부분에 대해 질문했다.샤토 마고의 여주인 코린느 멘젤로폴로스,세계적인 와인 컨설턴트 미셀 롤랑,로버트 파커와 더불어 와인 평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젠신스 로빈슨에게 '와인을 마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똑같이 물었다.
이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혹자는 디캔팅의 무용론을,누군가는 마시기 직전의 온도를 얘기하기도 했지만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바로 음식과 친구였다.
어깨에서 힘을 좀 빼야한다고 할까,20년을 조금 넘은 우리의 와인 문화는 이제 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비싼 와인보다는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와인보다는 와인을 통해 이뤄지는 이야기와 사람들에게 좀 더 주목하는 성숙함 말이다.
앞으로 100회에 걸쳐 시작하려는 '한국의 100대 와인' 소개도 이같은 맥락에서 기획했다.'뭘 마시면 좋을까'라는 주변 지인들의 물음에 답하기 위한 차원에서 시작했다.작년 1년 동안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마신 게 무엇인지를 1위부터 100위까지 선정해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였다.생각은 간단했지만 방법은 꽤 복잡했다.
백화점,호텔 등 최종 소비처를 취재해 100대 와인을 선정하는 일은 불가능했다.그래서 아예 국내에 와인이 들어오는 첫번째 창구인 수입사를 취재하기로 마음먹었다.그렇게 해서 금양인터내셔널,두산주류,아영FBC,신동와인,대유와인,롯데아사히,길진인터내셔널,아간코리아,까브드뱅,레뱅드메일 등 10개사의 판매실적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이들 상위 10개사가 수입하는 와인은 전체 시장의 95% 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기준은 판매량보다는 판매금액으로 잡았다.판매량으로 할 경우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1만원 안팎의 데일리 와인이 압도적으로 상위권을 차지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다양한 와인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내린 고육지책인 셈이다.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샴페인인 모엣샹동은 분명 100위 안에 포함될 것이 확실하지만 수입사인 모엣헤네시 그룹이 자료를 밝히길 거부하는 바람에 정확한 매출액을 알 수 없었다.차선책으로 모엣샹동은 100위에 넣었다.
보르도 1-5등급 와인이나 알마비바,오퍼스원같은 공개시장(대부분의 와인은 수입사가 와이너리로부터 독점 수입한다)에서 판매하는 와인의 매출은 수입사별로 따로 받아 합산했다.이 과정에서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으나 큰 영향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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