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화려하다’.2006년 3월,콘차이토로 등 칠레의 와이너리를 보고 와서 든 생각이다.프랑스 앙튀르 드 메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가업을 이어 묵묵히 와인을 만들고 있는 농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칠레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 같다.사실 칠레의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이주한 귀족들 소유다.프랑스가 혁명을 거치며 농부들에게 포도밭을 불하한 것과 달리,칠레의 포도밭들은 큰 굴곡없이 군부를 비롯한 상류층들의 재산으로 남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칠레의 와인 산업은 이들 대규모 토착 자본들이 장악하고 있는 덕분에 일찌감치 수출이라는 ‘광맥’을 일굴 수 있었다.칠레 사람들이 농담처럼 하는 말 중에 ‘아르헨티나가 밀면 칠레 사람들은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칠레 사람들이 아르헨티나를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우스갯 소리다.늘 중국에 치여 살던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라고나 할까.
칠레의 와인 수출은 아르헨티나와의 이같은 경쟁 의식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모든 산물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할 수 있는 아르헨티나와 달리 칠레는 뭐든 수출하고,여기에서 번 돈으로 필요한 것들을 수입해야 했다.와인도 그 중의 하나였다.
사실 와인을 좋아하는 인구 비율로 따지자면 아르헨티나는 아마 세계 최고일 것이다.주요 와인 산지 중 하나인 멘도사는 말할 것도 없고,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 곳곳마다 와인이 넘친다.멘도사의 한 노천까페에 갔을 때의 일이다.하루 세끼 꼬박 와인을 마시는 일에 살짝 질리던 나는 메뉴에서 ‘beer’를 찾으려 수십장은 될 법한 와인 리스트를 뒤적인 적이 있다.참 놀랍게도 그 흔한 ‘버드와이저’조차 찾을 수 없었다.맥주 종류는 딱 한 종류(토종 맥주였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뿐이었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식량은 기본이고,무엇하나 수입하지 않고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국가이기에 와인도 자기네끼리 즐기기 위한 존재일 뿐이었다.우리에게 유독 칠레 와인이 친숙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한·칠레 FTA 체결도 칠레 와인 전성시대의 또 다른 요인이다)
삶의 절박함에서 나온 칠레인들의 개방성은 글로벌 와인 양조법을 배우고 익히는데서도 발휘됐다.‘샤토 무통 로쉴드’의 바롱 필립 드 로쉴드를 비롯 미국의 로버트 몬다비,이탈리아의 안티노리 등 ‘글로벌 스탠다드’로 인정받은 유명 양조업체의 기술과 스타일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그 결과 ‘알마비바’같은 칠레산 명품 와인들이 나올 수 있었다.
주변의 지인들과 와인을 주제로 얘기를 나눌 때면 으레‘그러면 어떤 와인을 마시면 좋을지 추천좀 해달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만 난 칠레산을 자주 권한다.단일 포도 품종으로 만든 품질 좋은 와인들이 많기 때문이다.미국이나 호주산과 비교해 가격도 약간 저렴한 편이다.대륙별로 같은 품종이라도 미묘한 맛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품종별 특색을 입맛에 각인시켜두면 보르도 스타일의 블렌딩 와인(여러 품종을 섞어 만든 와인)을 즐기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카르멘 카베르네소비뇽 리제르바는 ‘와인 고수’들이 흙속의 진주로 꼽는 칠레 와인들 중 하나다.회원수 3만여 명을 거느린 국내 최대 와인 전문 카페인 ‘와인카페’같은 곳에서 카르멘 시리즈는 늘 상위권에 오르곤 한다.(보통 온라인에서 카베르네소비뇽이란 포도 품종은 ‘카쇼’ 혹은 ‘CS’로 축약해 부른다.리제르바는 숙성 기간이 2∼3년쯤 길다는 의미다.)
1850년에 설립된 칠레 최고(最古)의 와인 회사에서 내놓은 와인인 만큼 칠레 와인의 전형성도 간직하고 있다.카르멘 시리즈는 총 60여 개국에 약 150만 상자가 수출되고 있다.와인 전문 잡지인 와인&스피릿(Wine & Spirit)에서 최근 9년간 여덟 차례 ‘올해의 칠레 와이너리’로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