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잘살아보세
원문 : http://blog.hankyung.com/myway777/317869

출처 : 한경닷컴 > 뉴스
원문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110171801&sid=01051003&nid=000&ltype=1


중소기업 전문 대출 전문은행인 미국 CIT그룹이 조만간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할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달 31일 보도했다.

총 750억달러 규모의 자산을 가진 미 20위권 은행인 CIT그룹이 파산을 신청하면 리먼 브러더스,워싱턴 뮤추얼,월드컴,제너럴모터스(GM)에 이어 미 역사상 자산 기준으로 다섯 번째로 큰 파산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WSJ는 채무 재조정안 동의와 상관없이 CIT그룹이 1일(현지시간)께 뉴욕 파산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할 것이라고 전했다. 억만장자 투자자로 CIT에 투자한 칼 아이칸도 합의 파산에 찬성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따라 미 정부가 CIT그룹을 구제하기 위해 지출한 23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이 날아가버릴 위기에 처했다.

1908년 설립된 CIT그룹은 그동안 대형 금융사들로부터 대출을 받기 어려운 중소기업들의 대표적인 돈줄 역할을 맡아 왔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한 100만달러 이하의 소규모 대출이 주력 사업이며,현재 95만여개에 달하는 중소기업과 거래하고 있다. CIT의 파산이 자금조달이 힘든 수만 개의 중소기업들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WSJ)는 분석도 그래서 나온다.

CIT는 경기침체 여파로 지난 1분기까지 8분기 동안 총 30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CIT는 대출자금을 예금이 아닌 기업어음이나 회사채 등으로 대부분 조달해왔으며,2007년 하반기부터 신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CIT그룹의 최고경영자인 제프리 피크는 실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올해 말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CIT 파산이 중소은행의 파산도미노를 부채질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CIT가 다른 중소 은행들에도 지급 보증을 서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방의 중소은행들은 상업용 부동산 대출 부실화 여파로 잇따라 문을 닫고 있다.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지난 주말 애리조나주의 뱅크USA와 캘리포니아주의 샌디에이고내셔널뱅크 등 지방은행 9곳을 폐쇄했다. 하루에 이처럼 많은 지방은행이 문을 닫은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로써 올 들어 파산한 미국 은행은 모두 115개로 늘었다.

3조1000억달러 규모에 달하는 미 상업용 부동산 대출은 연체율이 8% 수준까지 높아진 상태다. 9월 말 기준 빌딩 공실률은 15.2%로 치솟았다. 상업용 부동산 가격은 2007년 1월 최고 수준 대비 29% 하락했다. 월가의 유명 투자자인 윌버 로스는 최근 블룸버그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미 상업용 부동산 시장이 조만간 대폭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투자의 귀재인 조지 소로스는 미국의 상업용 부동산과 차입매수(LBO) 시장 손실로 내년이나 2011년께 또 다른 경기침체를 맞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뉴욕=이익원 특파원/이미아 기자 iklee@hankyung.com



출처 : 조재길 기자의 자동차세상
원문 : http://blog.hankyung.com/musoyu9/318641

 기아자동차 노조 조합원들이 엊그제 지부장 투표를 했습니다. 중도 실리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박홍귀 후보와 '강성 중의 강성'으로 꼽히는 김성락 후보가 맞대결해 관심을 모았는데요,결국 김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기아차 노조는 향후 금속노조 투쟁의 선봉대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김 당선자는 금속노조 대의원 및 중앙위원직도 맡고 있지요. "금속노조가 주도하는 일방적인 파업관행 고리를 끊겠다"고 공약했던 박 후보와는 정반대의 인물입니다.

 

 강성인 김 당선자는,"기아차가 국내에서 만드는 차종을 해외로 이전하지 못하도록 못박고,상여금을 800%로 올리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었죠.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사내 모듈공장을 짓는 한편 경기 광명시 소하공장에 미래형 자동차 생산체체를 구축하겠다"고도 했습니다. 기업 경영자가 해야 할 말을,노조 지부장 후보가 했던 겁니다.

 

 강·온 두 후보의 표 차이는 단 1005표였습니다. 3만여 표 중 2.6%가 당락을 가른 것입니다. 김 당선자는 51%, 2위인 박 후보는 47.4%의 표를 얻었습니다.(나머지는 무효표입니다.)

 

 그런데 득표 내용을 분석해보니,흥미로운 부분이 있더군요. 노조 조합원 투표가 얼마나 구태의연한 지 여실히 드러난 겁니다.

 

<지난 6월 기아차 노조의 파업 선포식 모습>

 

 김 당선자는 조합원 수가 가장 많은 화성공장 직원입니다. 그는 이 공장에서만 54.8%의 득표율로,40% 초반 득표에 그친 박 후보를 크게 따돌렸습니다. 여기서만 두 후보의 표 차이가 1200표 가까이 됐지요.

 

 반면 광명시 소하공장 출신인 박 후보는 소하공장에서만큼은 김 당선자를 이겼습니다. 52.9%를 득표해 630표 앞섰습니다.

 

 판매지회를 제외하고,광주공장이나 정비지회 등 다른 곳에선 두 사람간 표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조합원들 사이에서,"우리 공장 출신을 밀어주자"는 논리가 먹혔다는 겁니다.

 

 지역주의 정치의 구태가 기아차 노조 선거에서도 재연됐다는 얘기에 다름 아닙니다.

 

 이번 기아차 노조 선거는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공약 차이가 확연한 만큼,향후 기아차 진로를 판가름할 잣대가 될 수 있으니까요.

 

 결국 기아차 조합원들은 '지역주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따라 내년에도 파업 투쟁을 벌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20년 연속 파업이란 새 기록을 쓰는 것이지요.

 

 기아차 조합원들이 투표 과정에서,좀더 치열한 고민이 부족하지는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출처 : 김동욱 기자의 역사책 읽기
원문 : http://blog.hankyung.com/raj99/318653

괴테, 『파우스트』

 

 파우스트. 파우스트 민담은 초기 루터교에선 “악마와의 결탁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이어 대문호 괴테가 비극 ‘파우스트’를 쓴 뒤에는  한갖 시장거리에서나 거론되는 잡스런 얘기가 아니라 독일 최고의 작가가 쓴 고급스런 얘기로 탈바꿈 하게 된다. 19세기에 접어들면 파우스트는 독일 민족 고유의 전통을 띤 신화적 인물로 ‘급’이 올라가게 되고, 독일 통일 이후에는 ‘활동하는 지식인’이자 ‘식민지 개척에 앞장서는’ 모델로 재조명 된다. 진보세력들도 파우스트를 “자기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 독일인의 이미지로 재창조해냈고, 20세기에 접어들어선 니체의 초인사상과 결합된다. 곧이어 나치독일은 파우스트를 인종정책의 도구로 활용하기에 이른다. 파우스트는 2차 대전후 동독에선 “사회주의적 민중해방의 선도자”로 떠받들게 된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모두 저마다 보고 싶은 점들을 파우스트에 투사해 저마다의 파우스트 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해설서만 1000권이 넘는다는 괴테 ‘파우스트’자체의 난해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자의적으로 파우스트를 해석하면서 나왔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원래 파우스트 전설의 주인공은 요한네스 파우스투스라는 역사적 인물로서 1460-1470년경 하이델베르크 근처 헬름슈타트 인근에서 태어나 1536-1539년 사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학사(1484)학위와 석사(1487)학위를 받은 뒤 방랑생활을 하다 신학과 의학을 연구하다 이후 크라쿠프로 도주해 마술에 몰두하면서 유대계 신비학자들과 교제하면서 점성술 등을 연구한 예연자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당대의 학자들 사이에선 ‘사기꾼’으로 불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비행시도를 하고, 마울브론에선 금을 제조하는가 하면, 에어푸르트에선 호메로스의 주인공들을 주문으로 불러내는 기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악마를 개의 모습으로 만들어 다니던 파우스투스는 뷔르템베르크의 어느 여관에 투숙했다가 “오늘밤 놀라지 말라”는 예언을 한 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즉 당대인들 사이에선 악마에게 살해된 것으로 믿어진 괴짜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황당한 기행을 일삼은 역사적 인간이 죽고나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점차 민담으로 형성돼 갔다. 그러면서 스토리에 살도 붙어 나갔다.

 그러던 중 1587년 프랑크푸르트의 출판업자인 요한 슈피스가 ‘지나친 마술사 요한 파우스트 박사의 이야기’라는 이름의 민중본을 발행하고, 십여년 사이에 19쇄가 출간될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된다.

 이어 파우스트 박사와 악마와의 계약이란 테마는 영국과 독일의 대문호에 의해 재창작되기에 이른다. 영국에선 말로우가 희곡 ‘포스터스 박사의 삶과 죽음에 관한 비극적 이야기’를 1604년 출간하고, 독일에선 괴테가 그 유명한 ‘파우스트’를 쓰면서 민담은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앞서 독일내에선 파우스트 박사를 소제로 한 작품들이 잇따라 선보였다. 17-18세기 동안 독일내에선 다양한 형태로 변형된 민중본들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의 비드만은 1599년 슈피스본을 확대한 책을 내게 되고, 1725년에는 ‘기독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익명의 작가가 새로운 파우스트 요약판을 내놓게 된다. 또 17세기 동안에는 유랑극단들이 파우스트의 스토리를 공연하며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괴테 역시 어린시절 인형극을 통해 파우스트 스토리를 접하게 된다.)18세기에는 계몽주의 작가 레싱이 선이 얼마나 빨리 악으로 변하는가를 주제로 미완성작 ‘파우스트 박사’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파우스트에 오늘날과 같은 클래스의 힘을 불어넣은 사람은 누가 뭐라해도 괴테다. 괴테가 없었다면 파우스트의 민담은 아마 ‘전설의 고향’ 수준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괴테가 평생에 걸쳐 집필한 비극 ‘파우스트’는 공간적으로는 천상에서부터 지옥을 거쳐 지상에 이르는 전 우주를 포괄하고,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이르는 3000년의 세월을 배경으로 하는 스캐일 큰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괴테 이전의 작품들이 주인공이 신의 저주를 받은 죄인으로 지옥에 끌려가는 것으로 그린 반면, 괴테는 파우스트의 영혼이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 이끌려 천상으로 인도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괴테는 전통적 작품들을 단호히 거부하고 선을 그은 것이다.

 묘하게도 괴테 이후 파우스트는 마침 부상하고 있던 독일 민족주의와 어울리면서 예상치 못한 ‘대표’역할을 연이어 떠맞게 된다.

 나폴레옹의 독일 점령으로 민족적 정체성에 위협을 느낀 낭만주의자들은 파우스트를 독일 민족 고유의 전통을 띤 신화적 인물로 격상시켰다. 파우스트는 순식간에 기행을 일삼는 무엇인가 이상한 인물에서 전형적인 독일인으로 동일시되고 이상화된 것이다.

 가장 위대한 독일 작가가 썼다는 이유로 파우스트는 작품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 이상에도 불구, 국수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 변화되게 됐다. 특히 비극 제2부에 나오는 식민지 개척사업,눈먼 환상가로서 자기 기만에 빠진 파우스트의 환상적 독백 등에 민족주의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독일인들은 파우스트에게서 △부단한 노력 △팽창의 동력 △행동에 대한 찬양 △주저없는 식민지 사업 등의 요소들을 뽑아냈다. 파우스트는 때로는 행동주의적 영웅적 남성의 표본이 됐고, 때로는 제국주의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19세기 전반에 이상적 독일인과 동일화되기 시작한 파우스트는 1840년 이후 활동하는 유능한 인간으로서 현실성을 지향하는 인물의 대표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태초에 존재했던 것은 말씀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파우스트의 대사는 경험과 실천을 중시하는 목소리로 해석되며 힘을 얻어갔다.“모든 이론은 잿빛이고 생명력 빛나는 나무는 초록색”이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졌다.

 다른 한편에선 과거 지향적 보수적 낭만주의자들의 파우스트 우상화 작업과 별개로 진보성향 청년 독일파 작가들이 파우스트를 젊은 독일과 동일화 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파우스트가 학자적 삶에서 세속적 삶으로 이행하고, 사변적 관념에서 감각적 영역으로 이행하는 것을 놓고 하이네는 독일인들이 발전시켜야 할 자기 해방과정의 모델로 삼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진보파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독백중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이란 표현에 주목, 당시 그들의 새로운 자유국가에 대한 희망을 그리는데 사용했다.

 1871년 독일제국이 성립되면서 파우스트는 새로운 민족적 자의식과 새로운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활동적이고 유능한 인간상으로 평가된다. 이제 ‘잘나가는’ 독일제국의 신민들은 파우스트의 비행에 침묵하고, 파우스트 이야기에서 비극적인 것을 배제하며, 내적모순을 감추는 식의 완전무결한 해석에 열중한다.

 제국주의자들은 파우스트의 식민지 개척 노력을 극구 찬양하고, 식민지 개처가로서 파우스트에 스스로를 일치시켰다. 이제 파우스트는 ‘거인적 노력’과 ‘영웅적 위대함’의 상징이 된 것이다.

 20세기초 파우스트는 초인개념을 이루는 니체사상과 결합된다. 1차 대전 패배후 상실감에 젖었던 슈펭글러는 ‘파우스트적 인간’을 ‘독일적인 것’과 동일시 했고, 퀴네만은 1930년 파우스트를 ‘지도자’로 칭하기에 이른다

 나치 시대가 되면서 파우스트는 “피와 토지 이데올로기”의 소제로 활용됐다.나치 제3제국 시대에 히틀러와 파우스트가 동일시되면서 파우스트는 나치의 인종정책 선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파우스트는 나치에 반대하는 세력에게도 주목받았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토마스 만은 1947년 소설 ‘파우스트 박사’에서 “절대와 무한을 추구하면서 인간성의 척도와 이성을 파괴하는 독일 지식인의 전형”으로 파우스트상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2차 대전후엔 동독에서 파우스트가 “사회주의 토지개혁의 상징”으로 이념화되기도 했다. 2차 대전후 동독에서 파우스트는 모범적 영웅으로 도식화된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긍정적이고 문제성 없는 모범적이고 무해한 고전적 인간상으로 주목받은 것이다. 1962년 동독 공산당 지도자 울브리히트는 파우스트를 일종의 ‘민중서’라고 평가하기에 이른다. 즉 울브리히트는 파우스트의 “자유로운 땅에서의 자유로운 백성”이라는 결론 부분을 “괴테는 노년의 파우스트로 하여금 해방된 민중의 창조적 공동 노력만이 최대의 행복을 낳는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자기편한데로 해석한 것이다.

 요즘 드라마 ‘선덕여왕’은 역사적 실체와는 무관하게 보는 사람데로 갖가지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며 재탄생되고 있다. 얼마전 10월 26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안중근 의사가 또다시 재부각되면서 이들 역사적 인물들이 현실의 문제의 상징으로 새 생명을 얻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파우스트를 만들고 있는 것인지, 또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만의 파우스트에 대한 시각은 과연 어느정도 수준에 해당하는 것일지 잠시 궁금해졌다. 


<참고한 책>

이인웅 편, 파우스트 그는 누구인가?, 문학동네 2006

안경환, 법과 문학사이, 까치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