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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긍정하게 된다 [홍사장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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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와 생쥐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은 특히 빨리 변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그 변화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리고 그에 대한 3가지 비슷하면서 아주 다른 책이 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who moved my cheese?), 스펜서 존스 지음


누가 치즈를 잘랐어?(who cut the cheese?), 메이슨 브라운 지음


치즈, 내 것만들기 (Idon't want anymore cheese - I just want out of trap), 스틸턴 잘스버그 지음


맨 처음에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이 나왔고, 그 후에 나머지 두권이 패러디로 나왔다. 세권의 책이 가정하는 상황은 모두 같다. 미로에 사는 두 마리의 생쥐와 두명의 꼬마인간이 즐겨먹던 치즈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생쥐는 재빨리 상황에 적응하고, 새로운 치즈를 찾아 나선다. 두 명의 꼬마 인간중 한명은 남고, 한명은 시간의 지체 끝에 치즈를 찾아 나서고, 결국에는 훨씬 더 맛있고, 다양한 치즈가 있는 창고를 찾아낸다. 원작과 패러디작이 같은 부분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잘랐어?’는 한정된 치즈를 독차지하기 위한 인간의 경쟁심과 교활함이 남들과 선한 협력을 어렵게 만들고, 또한 이 모든 상황은 기득권층이 조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불쌍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치즈, 내 것만들기’에서는 모든 사람이 합리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치즈를 찾는 것은 아니며, 치열한 경쟁 때문에 찾아낸 치즈를 즐기만한 여유를 찾을 수도 없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인터넷에 ‘who cut the cheese'라고 치면 2권의 책이 나온다.

        누가 치즈를 잘랐어? (who cut the cheese?)

        Who cut the Cheese(A culture History of the Fart - 방귀의 문화사)


또 사전에서 ‘who cut the cheese’라고 찾으면 ‘누가 방귀를 뀌었어’라고 나온다. 우선 ‘방귀의 문화사’라는 책이 나와있다는 것이 나와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리고 스펜서 존스의 작품을 패러디한 Mason Brown이 자신의 책을 두 가지 의미를 갖는 ‘who cut the cheese(누가 치즈를 잘랐어?와 누가 방귀를 뀌었을까?)로 했다는 것도 재미있다. 패러디 작가인 메이슨 브라운은 자신이 방귀를 뀌었다는 건지, 아니면 ‘who moved my cheese?’의 작가인 스펜서 존스가 방귀를 뀌었다는 건지 모르지만, 독자들에게 누가 헛소리를 했는 지 묻는 의도임은 분명하다. 누가 방귀를 뀌었지? 패러디 작가들은 원작을 쓴 스펜서 존스에게 묻는다. “당신은 말이야, 세상을 너무 좋게 보는 것 아니야?, 변화 그게 무엇이 좋아? 그리고 그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한다고 해서 성공한다고 보장할 수있어?. 아니잖아!, 세상은 언제나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 보상해주지는 않아!, 그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데, 스펜서 존스 당신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합리적으로 굴러가고 있다고 잘못이끌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쓴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는 한마디로 말해서 방귀같은 책이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번역서에는 이런 말들이 전혀없다. 제목에서부터 패러디의 재미가 반감되었다.


 ‘...옮겼을까?’는 결과물들을 주인공들이 공유하는 해피엔딩인데 비하여, ‘...잘랐어?’는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하다. 두 책의 주인공을 보면 원작은 상호 협력적인데 비하여, 패러디작은 상호 경쟁적이다. 그것도 아주 살벌하게. 사실 한정된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회사생활이나, 한정된 시장을 놓고 경쟁해야 하는 경영자 입장에서 보면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기는 하다. 문제는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데 있다. 회사원은 경영자의 철면피함을 탓할 수있고, 하청업체는 원청업체의 철저한 경비절감 대책을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런 상황을 만들었는 지 생각해보자. 아무도 그런 상황을 고의적으로 만들 수는 없다. 왜냐하면 1-2명의 인간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적응해갈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의 범위도 한정되어질 뿐이다. ‘...옮겼을까?’는 이처럼 상황은 애초부터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고 시작하는 데 비하여, 나머지 두 개의 패러디작은 누군가가 상황을 사전에 설정해놓고, 끝없이 인간을 농락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생활의 하위 단계에 있는 조직이나 사람은 결코 그 단계를 넘어설 수없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착취당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아마 이런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상이 마르크스적인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사용자는 노동자를 끊임없이 착취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사용자들이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모여서 노동자들을 착취하자고 약속을 했었는 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회사의 월급을 받는 한, 영원히 착취를 당하는 피해자로 스스로를 묘사한다. 그 들의 모든 상황은 경영자인 사용자가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경영자들은 자금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회사의 경영이 어려울 때도 여전히 임금은 지불되어야 하니까.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벌어져서 회사가 망해도 모든 책임은 경영자가 지게 되어있다. 그렇게 보면 경영자도 역시 ‘상황의 희생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고 성공했을 때 그 과실을 경영자 혼자 즐길 수있는 것도 아님에도 불과하고 말이다.


결국 ‘....잘랐어?’는 아주 미시적인 어느 조직에 국한해서 경영자가 모든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가정을 말한 것이고, ‘치즈 내 것 만들기’는 끝없이 경쟁을 해야 하고, 그 경쟁에서의 승자도 결국은 그 과실을 오래 즐길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옮겼을까?’는 세상이 변하면, 사람도, 조직도 잘 적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예외는 거의 없다. (예외없는 법칙은 없으니까)


패러디 작품은 현실성이라는 이유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를 거부하고 있다. 왜? 아무리 노력한 들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허무함만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으니까?  뿐만 아니라, 패러디 작품들은 내가 무엇을 이루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내 탓이 아니라,  남을 먼저 탓하게 한다. 비록 우리가 험한 세상에서 살고 있고, 반드시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패러디된 것처럼 비합리성이 우리를 전적으로 지배하지는 않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원작과 패러디 작을 비교했을 때, 역시 독자들에게 원작을 권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도 원작은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었지만, 패러디 작들은 소리도 없이 절판되었다. 그 것은 원작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하고, 희망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간이 상황을 만들지 못한다면, 인간이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고 따라야 한다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 삶이 우연성이 짙기는 하지만, 그 우연성도 결국은 희망을 갖고 성실하게 노력하면서, 준비된 자만이 맞이할 수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지만, 결국 소수만이 그 우연의 혜택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준비되지 못한 자는 그 혜택이 와도 즐기지를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래서 자신의 할 도리를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라는 말이 아직도 우리에게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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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이런 책을


어렸을 적에 형은 나한테 한 질문중에서 기억이 나는 것이 있다.

“염세주의가 인생을 더 사랑할까?, 아니면 낙천주의가 인생을 더 사랑할까?”


비관론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삶은 매우 비극적이며, 삶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비극의 결말이 고통 그 자체여도, 비극의 본질을 찾아내야 하기 위하여 끝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한다. 이에 비하여 낙관론자들은 인생의 의의와 가치는 궁극적으로 善 이면, 악의 존재조차도 선의 보호자인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인생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기 보다는 즐기라고 한다.


염세주의자들은 인생에 대하여 끝없이 고민하기는 하지만 항상 불행하고, 낙천주의자들은 인생에 대하여 고민하기 보다는 인생 자체를 즐기려고 한다. 과연 염세주의자들이 낙천주의자들보다 인생을 더 사랑하는 것일까? 불행해지기 위하여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들중에는 염세주의자보다는 낙천주의자가 많다. 굳이 통계를 따져보지 않아도 소설, 에세이의 대부분은 해피엔딩이니까. 그러니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 수록 인생을 긍정하게 될 것이라는 가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선진국의 도움으로 후진국의 가난을 몰아낼 수있다는‘빈곤의 종말’,

파키스탄에서 가난한 여성들에게 대부를 해줌으로써 빈곤율을 연간 2%씩 줄이는 이야기를 적은 ‘가난한 사람들의 은행가’,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다’며 수백척의 왜선에 맞서기 위하여 전장으로 나가는 장군의 이야기를 쓴 ‘칼의 노래’


아직도 염세주의자인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들이다.

홍사장의책읽기, 필맥스, feelmax, 염세주의, 낙관주의
posted at 2008/03/08 08:55:00 댓글(0) l 트랙백(0) l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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