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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페미니즘 [시장의 모순]
 

딸과 페미니즘

                (알파걸, 남과여, 남과여 은폐된 성적계약)


가부장제 : 가족의 부양과 보호를 위하여 힘쓰지만, 식구들과 거리감이 있는 아버지이야기

페미니즘 : 뭔가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남자들에겐 왠지 거북한 이야기


알파걸 : 딸의 부모에게 희망을 주면서, 아들의 부모들에게 부담을 덜어주는 여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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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 알파걸

저자 : 댄 킨들런


알파걸은 재능있고 욕심이 많고 자신감이 있는 신세대 소녀를 지칭한다. 알파걸은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우선 인간이고 그 다음이 여자인 것이다. 섹스와 남녀의 역할, 의존과 독립, 지배와 복종같은 전통적인 사회구도들은 알파걸과는 별 관계가 없다. 알파걸에서 묘사하는 심리는 새로운 법과 사회 정책들이 여자들에게 남자와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보장하게 되면서 지난 한 세대동안 우리 사회가 경험한 급격한 변화들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알파걸의 엄마를 비롯하여 강력한 여성 역할모델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하면서 형성된 심리이기도 하다. 자녀 양육에 적극 참여한 신세대 아빠들이 딸들의 생각과 감정에 영향을 미친 것 역시 알파걸 심리에 기여했다. 알파걸들은 소녀들이 자부심이 별로 없고 외모 때문에 비틀린 심리를 갖고 있다는 통념으로부터 자유롭다. 지난 시대 심리학계와 대중 심리학을 지배했던 부정적이고 불안하며 수세에 몰려있는 소녀들의 모습과는 판이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장차 리더의 재목인 그녀들은 바로 ‘알파걸’이다.


알파걸들이 운영하는 세상에서 남자들은 더 오래, 스트레스도 덜 받으며 살 수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미처 개발하지 못했던 남성의 다른 면들을 개발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부드럽고 남을 배려하는 면을 꽃피울 수도 있다. 아이들을 기르며 집안 살림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농경사회 시절처럼 자녀의 최고 스승 겸 길잡이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다음 세대의 남자들은 모든 부와 기술의 원천적 목표이자 꿈인 인류의 큰 희망을 달성할 수있을 지도 모른다. 더불어 사는 것을 즐길 여유와 사는 것 자체의 단순한 기쁨을 음미할 수있는 사회를 이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들은 남자다워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더 사랑스러워질 수도 있다. 알파우먼들이 개미도 잡고, 양식도 벌어오면서 부양자 역할을 하는 사이 남자들은 한없이 무의미한 놀이에 빠져 지낼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다.


책 제목 : 남과 여, 은폐된 성적계약

저자 : 캐럴 페이트먼


사회계약론은 통상 자유에 관한 이야기로서 이해된다. 자연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불안정한 자연적인 자유(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자 할 때 일어날 수있는 타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막을 수있는 수단이 없는 상태)를 국가에 의해 보호되는 시민적 자유와 맞바꾼다는 것이 원초적 계약에 대한 한 해석이다. 또 다른 시민사회에 대한 해석은 아버지의 지배(또는 가부장적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기위해서, 아버지를 무너뜨림으로서 아버지의 지배를 시민정부로 대체함으로써 얻어진다는 해석이다. 그런데 페미니스트인 캐럴 페이트만은 이 계약의 당사자로서 여성이 제외되었으며, 남성만이 원초적 계약의 당사였음을 초지일관 주장하면서, 남성의 지배에 의한 여성의 피착취 내지는 노예상태를 주장한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는 결혼계약에 의하는 데, 결혼계약에는 두가지 암묵적인 가정이 있다. 첫재, 남성들이 시민법을 있게 한 원초적 사회계약을 만들었기 때문에 남편이 시민적인 주인이라는 것이다. 원초적 계약을 만든 남성들은 가부장적인 정치권리가 시민사회에서 보장되도록 한다. 둘째, 자연상태에서 남성처럼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인 여성들을 사회계약에서 배제하는 데, 그 것은 합리적이며 자유롭고 평등한 여성들은 시민사회에서 남성에게 복종하게 되는 계약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이 만들어 질 때까지 자연적인 조건에 있는 모든 여성들은 꼭 남성에 의해 정복되어 남성의 신민(하인)이 된다는 가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페미니스트는 질문한다. 결혼 계약이라? 과연 그 계약이 동등하게 이루어졌는가? 계약은 계약 당사자들간의 자발적인 동의에 기초한다. 결혼을 당사자들인 남성과 여성이 동의하여 맺은 계약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계약이 결혼의 불평등한 조건들을 바꿀 수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제까지 결혼 생활을 통해 누려왔던 막강한 권력을 스스로 벗어 던질 용기가 있는 남성이 있겠는가? 아무도 그럴 수없을 것이다. 그럴듯한 계약으로 보이는 결혼의 조건에 대하여 여성들에게 상의한 적이 있는 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남성들은 남성의 권리에 관한 법에 침묵함으로써 이미 그 안에 담긴 남성들의 이익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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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걸’을 읽다보면 속이 개운해진다. 이에 비하여  ‘남과 여, 은폐된 성적계약’을 읽다보면 마치 나는 나의 아내를 착취하기 위하여 결혼하지 않았나 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 성적계약’은 남자와 여자의 대립을 만들어 이슈화하고 있다. 노동자는 영원히 피해자일 수밖에 없듯이, 여자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피해자일 수 밖에 없다는 논조이다. 이러한 페미니스트의 논조는 여자들이나 페미니스트적인 남자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나, 나로서는 내가 ‘나쁜 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이다.


그에 비하여 알파걸을 읽으면 짜장면을 먹다가 노란 무를 깨무는 것처럼 개운함을 느낀다. 우선 내가 ‘나쁜 놈’이 아니어서 좋고, 내 딸들의 미래가 밝아서 좋다.


알파걸들은 자신들이 어떤 속박이나 제약도 받고 있지 않으며, 무한한 선택권을 갖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이전에 남자들이 지배하던 분야에 진출할 때 여자라는 점이 불리하기보다는 오히려 유리하다는 것을 알 정도로 영리하다. 알파걸들은 자신들을 페미니스트 이후 세대로 보고있다. 지난 세대 여성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얻기 위해 투쟁했던 내부 혁명의 산 증거인 것이다.  아동심리학자로서 알파걸의 저자가 분명히 알 수있는 것은 이제 많은 소녀들이 여자가 억압당하고 있다는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정신건강에 해롭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알파걸의 저자가 인터뷰했던 알렉시스와 사라가 ‘여성사’에 대해 듣는 게 지겹다고 했을 때 단순히 따분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마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피억압자 역할이 자신들의 ‘내면적 주권’을 박탈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신 여성 심리학’의 기반 역할을 했던 (진정한 자아를 희생하고 남들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관계지향 여성개념으로는 요즈음 소녀들, 특히 알파걸들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알파걸들은 자신의 여러 다른 측면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연결된’ 자기와 좀 더 자주적이고 이기적인 ‘분리된’ 자기를 조화시킬 능력이 있다. 이 새로운 균형잡힌 입장덕분에 소녀들은 이전 세대들보다 더 강한 정신력을 갖게 됐고, 그 결과 고전적인 관계지향 여성 성격에 따라오던 정신적 문제들을 덜 겪게 되었다. 이들은 과거 소녀들을 괴롭혔던 여자의 본분에 대한 온갖 사회적 통념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났다. 알파걸 정신은 이들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검토해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선택할 수있는 새로운 자유를 부여했다. 이는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며 성공과 실패가 모두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이에 비하여 페미니스트의 책은 읽는 사람(나만 그런가?)의 마음을 참 무겁게 한다. 하트만은 마치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통제하듯이 남성들이 여성의 노동력을 지배함으로써 가부장제의 물적 기초가 마련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델피는 결혼이 특수한 인구집단인 여성-아내의 무임금 노동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고 주장한다. 즉, 그에 의하면 결혼계약은 아내의 노동력이 남편에 의해 전유되는 노동계약이다. 이러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많은 남성들을 공동정범으로 몰아세우면서 여성에 대한 ‘악의 축’으로 규정되어진다. 페미니스트의 논조는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자와 상당히 비슷하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구조를 끝없이 만들어 가는 듯이, 남성과 여성의 끝없는 대립을 만들어 간다. 사실 ‘,,,,성적 계약’도 새로운 남녀관계가 정립되어 가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남과 여 사이의 불평한 ‘성적계약’이 종결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남녀간의 상호계약’이라는 ‘정치적 허구’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남아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 책에는 결혼의 전제가 되는 사랑이라든가, 배려라든가, 하는 것 마저 허구에 불과하다. 남자들은 그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존재가 되버린다. 결혼계약이라는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여자들의 억압자로서만 남자가 존재한다.


페미니스트들은 17세기 이래로 여성들이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교육을 못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해왔다. 여성의 무능력은 자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남성들이 만들어 낸 사회적 결과이다. 만일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교육을 받고 재능을 발휘할 수있는 동등한 기회를 갖는다면 그들의 능력은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을 만큼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여성들이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보장받고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새로운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있다면, 부양받는 대가로서 남성들에게 복종할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남성들은 더 이상 여성들의 성적 주인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사실 현재의 추세로 보면 분명히 결혼 계약의 조건이 동등해져 가고 있다. 톰슨이 말한 것처럼 남성들이 자발적으로 그 우월적 권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시장자본주의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공산주의적 사회주의가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쳐 무너졌듯이, 가부장제 또한 사회적 경제환경이 변했기 때문에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그 것은 한 남자의 능력만으로는 평생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어져 가는 고용환경의 변화에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 것은 단순한 ‘가부장제의 붕괴’에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사회구조로 전환되고 있다. 부권의 축소와 모권의 확대이다. 모권이 사회적 삶을 지배하던 ‘시초’에는 혈통이 모계로 이어졌으며 성적인 문란함으로 누가 아버지인지를 확인할 수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모권사회가 부권사회로 넘어가고, 자식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확실히 알게 된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이후 지속되었던 여성의 삶의 방식은 가정의 사적 부분에 속해 있었다. 이제 또 다른 ‘남성의 세계사적 패배(부권사회에서 모권사회로의 이전)’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아들(남자)과 딸(여자)의 역할이 명확했을 때 아버지들은 딸과 아들의 차이 때문에 헷갈리는 게 많았다. 딸은 딸답게 키우고, 아들은 아들답게 키워서, 현모양처가 되고, 능력있는 아버지가 되는 과정을 아이들 엄마의 뒤에서 바라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두 딸과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갈수록 단순해진다. 딸도 아들처럼 키우고, 아들도 딸처럼 키우면 된다. 그리고 우리 딸들이 리더가 되기를 원한다면, 사회의 영향력있는 위치에서 당당히 제 역할을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키우면 된다. 딸의 역할과 아들의 역할이 과거와 같이 절대성을 갖지는 못한다. 여자들의 능력이 커지고, 밝아지고 있고, 자유로와 지고 있다. 이에 비례하여 남자들의 부담도 줄어들고 있다.


두 딸과 한 아들의 아버지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추세임은 분명하다.

알파걸, 페미니즘, 남과여, 성적계약, , 경영, 홍사장의책읽기
posted at 2008/04/09 10:36:00 댓글(0) l 트랙백(0) l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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