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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자유 [시장의 모순]
 

사랑과 자유



자유(B2B21-1)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책 제목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저자 :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 공저


이 책은 멀리서 보면 제목이 마치 ‘사랑은 지독한 혼란’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이라는 글자는 아주 작게 씌여져 있고, 중간에 보일 듯 말 듯하게 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인 두 사람은 부부이지만, 현대의 사랑을 보는 관점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제목도 그렇게 정했을 지 모른다. 원서의 책표지를 보지는 못하였지만, 번역서의 책 표지가 원서의 책 표지를 이용하였다고 생각한다면 두 사람의 의견차이가 제목에서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남자인 울리히 벡에게는 현대의 사랑은 너무나 혼란스럽게 보이는 것이고, 여자인 엘리자베트 벡에게는 여자의 자유를 획득해가는 당연한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 부부의 현대 사회에 관한 질문의 시점은 이렇다. “왜 그토록 많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치 집단적 열광에 빠진 듯, 과거에는 결혼이 가져다 주는 지복이었던 것들을 포기하고 그 것을 새로운 꿈과 바꾸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왜 안전한 법률과 사회 안전망을 벗어나 ‘열린 결혼’관계로 함께 살아가거나 혹은 혼자 힘으로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하는 걸까? 왜 독립성, 다양성, 변화등을 쫒아 자아의 새로운 페이지들을 빠르게 넘겨가며 혼자 살기를 선택하는 걸까? 그러한 꿈이 악몽을 닮아가기 시작한지도 한참 지났는 데도 말이다.” 이 질문의 핵심은 ‘개인화’이다. 그러나 개인화는 자유를 찾고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한 개별적 투쟁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체계적인 규율이나 도덕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사람이 노동 시장의 이러저러한 요구 조건에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 와중에 성별역할이 파괴되고, 갈등의 골은 깊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 성역할을 피괴하는 주역은 여성이고, 남성은 그저 그 과정을 쳐다보며 혼돈스러워 할 뿐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에게는 너무나 혼돈스럽고, 여자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 사회의 사랑은 다른 모든 종교와 같이 스스로의 신비로움을 벗으면서, 차가운 합리성의 명제로 변화해가고 있다.


책 제목 : 자유

저자 : 지그문트 바우만


모든 의지는 자유롭지만 어떤 의지는 다른 의지보다 자유롭다.


이제까지 내가 알던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제약.구속을 받지 않는 소극적 자유와, 무엇을 하여서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적극적 자유였다. 그런데 바우만은 나에게 새로운 자유의 의미를 제공하였다. 앞의 두 자유가 개인적 자유와 의지의 실행을 중시하는 절대적 의미의 자유였다면, 바우만의 자유는 사회적 관계에 제약을 받는 상대적 의미의 자유이다.

 

(그래프가 보이지 않으시면 본문의 위에 있는 링크에서 다운받으시면 됩니다.)

     



18세기 이전까지 생산과 분배행위가 직접적으로 그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중요한 제도들의 존속과 재생산을 지향하는 여러 사회적 규범들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생산과 분배는 친족에 대한 의무, 공동체에 대한 충성, 협동적 연대, 종교적 의례나 생활방식의 위계적 계층화등에 종속되어 있었다. 자본주의는 이 모든 외적인 규범들을 부적합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경제를 수단-목적 계산과 자유선택 행위라는 도전받지 않는 규칙의 영역으로 해방시켰다. 여기까지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지향하는 ‘자유’의 의미가 같았다고 볼 수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경쟁을 발생시킨다. 경쟁은 승리한 자와 패배한 자로 나누고, 개인주의는 한계에 봉착한다. 그 것은 자유를 지원해줄만한 ‘자원’을 보유한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있는 것이 ‘자유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즉, 내가 아무리 부산에 가고 싶어도 차표를 살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다면 자유는 헛된 것이다. 이제 기존의 의미를 갖는 자유는 끝이 난다. 소극적 자유->적극적 자유, 생산적 관점의 자유는 더 이상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결국 새로운 출구, 소비적 관점의 자유를 만들어 낸다. 남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면서 그 범위의 한계를 무한정 넓힐 수있는, 상품의 소비를 통한 만족을 느낄 수있는 자유로. 이제 ‘소비자의 자유’는 더 큰 만족과 더 적은 만족(쾌락) 사이의 선택이며, 합리성은 적은 만족보다 더 큰 만족을 고르는 것과 관련된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정착이후 소비자의 유한한 자원이내에서 누릴 수있는 선택의 자유가 현대적 의미의 자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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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전  25세의 여자에요. 꿈도 많지요. 하고 싶은 것도 많아요. 제가 생각해도 전 무척이나 자유스러운 여자라고 생각해요. 옛날 여자들은 어떻게 살았는 지, 참 답답해요. 현모양처라니. 내 인생을 즐기기도 바쁜 데, 자신을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아요.


내가 생각해도 난 무척이나 자유스러운 여자라고 생각해요.  남녀는 동등하다고 생각하고요. 직업을 가지는 데 있어서 능력에 차이가 없는 만큼 고용에도 차별이 있어서는 않되고요.  남자 애인은 없지만, 섹스 파트너는 몇 명되요. 그들을 사랑하냐고요. 글쎄요. 짜릿한 감정은 좋지만, 결혼이 주는 속박이 싫어서 그냥 필요할 때만 만나요. 젊을 때 아이한테만 매달리는 것도 싫지요. 정말 나라는 인간은 정말로 자유를 사랑해요. 무언가가 나를 속박하는 것을 정말 싫어해요. 그래서 전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즐기고 있지요. 물론 사랑이 주는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살고있어요.


그런데 저도 세 번의 사랑을 했었답니다.


첫째 남자는 아주 부잣님 도련님이었지요.

우선 남자집에서 저희 집안을 보겠지요. 워낙에 제가 붙임성이 좋으니까 시부모가 되실 어른들이 절 좋아했지요. 그러데 변호사가 문제였어요. 헤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계약서를 들이밀더라고요. 결혼을 한 후에 해야할 여러 가지 조건들이 제시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이혼할 경우에 대비하여 예정된 위자료는 결혼 생활을 지속한 기간과 태어날 아이의 숫자에 비례해서 산정했더라고요. 아무리 있는 집안이지만 이래도 되나요. 자존심이 상하데요. 몸파는 여자도 아닌 사람을 너무 무시받는 기분도 들고요. 위자료 액수는 탐이 났지만, 그만 두자고 했지요.


두 번째 남자는 그저그런 중산층의 남자였어요.

직장도 그저 평범한 착한 남자였지요. 우리는 아무런 부담없이 서로 좋아했지요.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할려니 앞날이 답답해지기 시작했어요. 요즘은 남자만의 월급으로는 왠만해서는 살기 어렵잖아요. 게다가 언제 해고되거나, 직장을 그만두게 될지도 모르고. 결국은 맞벌이를 해야하는 데, 먼저 결혼한 친구들이 아등바등 사는 모습이 떠오르데요. 집한칸 마련하여도 대부금 갚기도 빠듯한 그들의 생활이 저를 암담하게 만들더군요. 게다가 시부모를 모시지 않아도, 가끔은 찾아뵈야 하고.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그런 부담은 없지만, 또 한 남자만 하고 사는 것도 어찌보면 속박이에요. 사실 요즘 남자들 믿기도 어렵고. 그러다 이혼하면 나만 손해인 것같고. 그래서 관두었지요.


세 번째는 가난한 사람이었어요.

멋있게 생겼지만, 좀비 기질이 있었어요. 직장을 가질려고 해도 변변치 못한 곳에서만 몇군데 전전하다 해고당했지요. 아무리 사랑이 좋다지만 구질구질하게 살기는 싫었어요. 그냥 몇 달 만나다 그만두었어요. 그래도 오랜 만난 편이지요.


그러면서 전 사랑이 이렇게 힘든지 비로소 알았어요. 그 때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사랑의 기술을 배우라고. 귀가 솔깃했지요. 그 기술만 있으면 쉽게 진정한 사랑을 하는 무슨 비법같은 건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건 ‘사랑을 하는 것’부터 배워야 하는 거라네요. 상당한 인내와 이해심이 필요하지요. 전 가만히 앉아서 사랑받기를 좋아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그런 기술은 필요없다고 생각해요.


지금와서 생각하니 사랑하기도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랑으로부터의 자유, 사랑이 주는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는 얻었는 데, 사랑으로의 자유, 조건이 없는 진정한 사랑으로의 자유는 아마도 제가 살아있는 한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사랑을 하고, 결실을 맺으려니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해야 하더군요. 바로 나에요. 나는 일을 하고싶어요. 이 사회에서 아주 멋있게 성공하고 싶거든요. 그러다보니 집을 떠나야하는 출장도 많고, 때로는 몇 년간 해외근무를 해야할 지도 몰라요. 현모양처요? 그거 정말 어려운 직업이에요. 저도 때로는 현모양처를 꿈꾸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사회를 알고부터는 포기했어요. 우선 남자들이 원하지 않아요. 요즘 남자들은 여자도 같이 벌기를 원해요. 그렇다고 직장과 가정을 같이 잘하기는 쉽지 않잖아요. 요즘 직장이 얼마나 살벌합니까. 경쟁도 치열해서 뒤처지면 바로 짤려요. 그러니 직장과 살림을 같이 한다는 건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죠. 나도 내가 살림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직장에 다니는 한 ‘살림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요. 그러니 ‘현모양처’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죠.


그런거 보면 우리 엄마.아빠가 부러울 때도 많아요. 젊었을 적에는 꽤나 부부싸움을 많이 했다는 데, 아직까지도 잘 살고 있어요. 신기하지요? 연애결혼도 아니고, 중매결혼인데도 말입니다. 아빠는 돈버느라 집에 계실 틈도 없이 밖에서 고생하시고, 엄마는 아빠와 우리 뒷바라지 하느라 자기를 희생하셨지만, 그런 삶도 괜찮아 보여요.


그런데 나는 엄마처럼되기도 어렵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아빠같은 남자만나기도 그만큼 어려워요.


그래도 발렌타이데이때 초코릿을 사주는 남자도 많고, 화이트 데이 때 사탕을 사줘야 하는 남자도 많아요. 사랑받고 있고,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잖아요. 


그냥 그러면서 살아야 할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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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불가능해진 미래, 짧아진 직장의 안정성아래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들(돈, 시간, 사회적 지위, 가정, 우정....)은 미래를 위하여 유보하거나 아껴두어야 한다. 과거보다 실질 소득이 늘지도 않았지만, 그나마도 언제까지 내 수중에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자유를 행하기 위하여는 자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누릴 수있는 자원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사랑을 누릴 수있는 자유도 사실상 줄어들고 있다. 본질적으로 생존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인간의 조건 속에서 누가 자유로울 권리를 지니고 있는 가? 자유로울 권리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사랑할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발렌타인데이의 초코릿처럼 우리는 사랑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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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at 2008/07/14 08:47:00 댓글(0) l 트랙백(0) l 스크랩
책, 미디어의 서평을 읽는다 [홍사장의 책읽기]

 

 

나는 신문을 2개 구독해서 본다. 하나는 종합지로 집에서 보고, 또 하나는 경제지로 사무실에서 본다. 신문에는 읽을거리가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자세하게 읽고, 기다려지는 신문의 기사가 있다면 각 신문이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싣는 ‘책에 관한 특집’이다. 신문사들이 그 아깝고 비싼 지면을 매주 2-4면을 할애해가면서, 책을 소개한다는 것에 대하여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세상에는 매일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써야할 기사들이 넘쳐날 텐데 말이다. 그 정도의 지면을 할애해서 매주 나오는 신간과 베스트 셀러에 대한 평가를 해줌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의욕을 고취해준다.


특히 내가 관심을 많이 갖는 국제경제나 미래의 트렌드에 관한 책은 꼼꼼하게 읽는다. 요즘은 세계화와 정보화에 대하여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는 내용이 많이 나와서, 처음 세계화할 때와는 좀 다른 분위기이다. 한동안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화가 우리에게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장밋빛 낙관론이 우세하였지만, 지금은 그 부작용을 우려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경제.경영 분야의 책에 대한 소개와 서평은 거의 빼놓지 않고 읽는다. 좋든 싫든 간에 내가 먹고 사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장사를 하면서, 특히 제조.무역을 하면서 경제.경영분야는 항상 내가 신경을 써야할 분야이기 때문이다. 항상 쏟아져 나오는 이 분야의 책들을 모두 읽어볼 수는 없지만, 어떤 책이 나오는 지, 새로운 내용이 있는 지를 쉽게 알 수있기 때문이다. 설령 책을 사보지 않아도 서평은 이런 면에서 좋다.


서평이 더욱 좋은 것은 흥미는 있지만, 굳이 책을 사볼 필요를 느끼지 분야의 책도 간단하게나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술이나 문화부문은 나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분야라고 생각하지만, 신간소개를 통하여 약간의 지식이라도 보충해준다. 소설 책도 거의 사보지는 않지만, 신간소개로 줄거리만 파악한다.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알 수 있게 된다. 10-20줄짜리 신간소개도 있지만, 지면의 1/3을 차지하는 신간소개도 있고, 기존에 나왔던 책들의 비교도 있다. 어쩌면 신문 전체보다도 많은 지식을, 신문의 서평 특집을 통해서 얻는다면 좀 과장일지 몰라도, 그리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신문이든 테레비든 뉴스는 거의 모든 부분이 ‘사실’의 전달과 약간의 ‘평가’로 이루어져 있는 데, 그 ‘사실’이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사이지 새로운 지식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사나 칼럼은 비평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남을 깍아 내려서, 기사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평은 우선 비평이 별로 없다.  설령 있다고 하여도 그리 기분에 거슬리지 않는다. 이 점에서도 서평은 정신건강에 좋다고 할 수 있겠다. 신간소개는 책의 내용을 요약해주기 때문에, 그 책을 읽지 않더라도 내용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신문의 신간 소개는 영화나 드라마의 소개와는 달리 감추는 부분이 없다. 영화나 드라마의 소개는 가장 재미있는 부분만 이야기하고, 결말이나 진짜 중요한 부분은 감춘다. 소비자를 감질나게 해서 직접 영화관에서 보거나, 테레비를 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신간소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읽고 나서도 기분이 깨끗하다.


서평이라고 다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드물게는 나를 몹시 실망시키는 서평도 있었다.


약간 오래 전의 일이다. 어디선가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의 서평을 읽고 당장 인터넷으로 샀다. 현재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랑'에 관한 분야이고, 장래에 ‘사랑’에 대한 책을 쓰려고 마음을 먹고 있어서, 꼭 읽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 온갖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나열하면서 사랑과 경제가 무슨 관계에 있는 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 증여에 관한 이상한 말들과 고대적 인용문만 잔뜩 나열하고 있다. 그러다보면 그 서평의 글이 생각났다.


‘인용문만 보아도 책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터무니없는 말.


내용을 보려고 책을 샀지, 인용문을 보려고 사는 것은 아닌데, 차라리 '증여에 관한 어느 일본학자의  독특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이라는 게 솔직한 제목이다. 아마 그 서평을 쓴 사람은 시간에 맞추어서 신문서평을 쓰기는 써야겠는 데, 별로 쓸만한 내용이 없으니, 출판사에서 보내준 보도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지 않았나 싶다.


읽으면서 처음에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탓하다가, 결국은 나를 화나게 만든 책이다. 물론 책을 읽는 내내 서평에 대한 원망도 많이 했다. 그런 다음부터 서평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서평을 읽으면서 난 계속 이런 질문을 한다. 이 책을 사, 말아? 이 것은 책을 쓴 사람, 책을 만든 사람, 서평을 쓴 사람과의 대화이다. 수많은 책 중에서 내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면, 그 책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갑자기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읽고 싶은 책은 너무 많은 데, 나의 시간이 모자란다. 책장에는 여분의 책이 10-20권이 꽃혀 있고, 수첩에는 읽어야 할 책의 제목이 늘어만 가는 데, 정작 책 읽을 시간은 모자란다. 그래도 책에 대한 욕심은 늘어만 간다.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서평을 읽으면, 우선 책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 책을 사면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될 까?, 이 책은 정말 재미있을 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일단 나를 진정시킨다. 그리고 사서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되면, 다시 한번 질문한다. 정말 내가 원하는 대답을 이 책은 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와 책을 쓴 사람, 책을 만든 사람, 그리고 서평을 쓴 사람과의 대답이다. 그래서 일반 기사와는 달리 서평을 읽을 때는 ‘서평을 쓴 사람’의 주관적인 평가도 무시하지 않는다. 이처럼 책의 서평에 대한 질문은 ‘충동구매’를 하는 나의 습관을 통제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신문을 읽는 동안 그 지면에 소개되는 수십 권의 책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얻을 수 있어, 서평을 읽는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서펑을 열심히 읽기는 하지만, 내가 책을 선택하는 주된 경로는 서평이나 인터넷이 아니라, 서점이다. 서평은 소개되는 책의 수가 작고, 매주 스크랩해놓기도 어렵다. 인터넷은 자기가 찾고자 하는 책이 명확하지 않으면 좀처럼 좋은 책을 찾기가 어렵다. 기껏해야 우선 순위가 앞이거나, 많이 팔리거나 한 책들이나 찾기가 쉽다. 하지만 서점에 가면 잘 정리되어 있는 진열대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좋은 책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미 사고자 정해진 책이면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평은 분명한 잇점이 있다. 스포츠를 볼 때, 운동장에 가서 보면 현장감이 있지만, 슬로우비디오와 해설자의 해설을 듣지 못한다. 서평의 장점은 바로 스포츠에서 해설자의 해설과 같은 존재이다.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해설을 들으면 경기의 흐름과 선수들의 행동을 문외한이라도 이해할 수있게 된다. 서평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생소한 분야의 책이라 하더라도 서평은 그 분야의 흐름과 책의 구성, 작자의 의도등을 알기 쉽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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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이런 책을


미디어의 서평은 천편일률적이다. 출판사가 보도자료를 보내면 거의 그 내용이 그대로 실리는 게 대부분이다. 서평에 관한 부분만큼 다양화되지 않는 분야도 많지 않다. 미디어에서 서평을 실으면 그게 대부분의 블로그로 그대로 인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평을 권하는 것은 책을 선택하는 데 꽤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책방마다 미디어 서평을 모아놓는 곳이 있고, 미디어 추천하는 책을 전시해놓는 장소가 있다. 꼭 들려보기 바란다. 흔히 말하기를 평론가의 평론이 좋은 영화는 재미가 없다고들 한다. 사실 그런 영화중에서 흥행에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책도 마찬가지다. 서평이 좋다고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와 책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영화는 애초부터 재미를 중점으로 만들어졌지만, 책은 저자의 자기 실현 욕구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영화는 한 편을 만드는 데 보통 수십억이 들어가고, 100만명을 손익 분기점으로 잡는다. 하지만, 책은 보통 1000만원정도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외국의 판권을 지나치게 높게 지불한 경우를 제외하면  책은 1만권정도면 손익분기점을 넘어선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재미있어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나 재미있고, 도움이 될 필요가 없다. 전문가의 서평은 저자의 서문을 근거로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독자가 읽은 후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아주 다른 관점을 다른 경우는 그 격차가 크겠지만, 그 차이는 책의 내용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사물을 보는 관점의 차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순수과학 책에 대한 서평은 주로, 그 책이 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찬사이지만, ‘세계는 평평하다’와 같이 긍정적 세계화를 다룬 책에 대한 것은 비판적인 것이 많다. 이처럼 책에 대한 서평은 읽기 전에 미리 다양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책을 읽은 후에 서평을 다시 읽는 다면, 나만의 시각을 넓혀가는 데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홍사장의책읽기, 서평, 필맥스, feelmax, , 경영, 사랑
posted at 2008/05/09 09:15:00 댓글(0) l 트랙백(0) l 스크랩
책, 저자의 이야기 풀어가는 과정을 즐긴다. [홍사장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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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미 모든 철학자, 사기꾼, 정치가, 경영자, 시인, 소설가들이 수천년에 걸쳐서 되풀이하지만, 여전히 사랑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거리를 던져준다. <로미오와 쥴리에>, <성춘향과 이도령>, <카사노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물론 남의 이야기를 너무 자기 이야기처럼하는 바람에 진부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사랑을 가지고 수백페이지의 책을 풀어가는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의 이야기에 푹 빠지고 있다.


<과학의 종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제목일 것같다. 그리고 실없는 책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읽어보면 정말 과학의 종말이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인간은 무한히 발전할 수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존 호건이 쓴 책에 의하면 과학은 이미 종말이 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개념’의 발견은 없고, 이제는 발견된 개념을 발전시켜 실용화시키는 ‘과학기술’의 향상만이 있다고 하니까.그러면서 그는 지리학을 예로 든다. “우리는 마치 거대한 대륙을 탐험하는 탐험가와 흡사하다. 그런데 그 탐험가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거의 모든 방향의 끝까지 도달했고, 주요 산맥과 강들을 지도에 그려 넣었다. 아직 채워넣어야 할 무수한 세부적인 지형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끝없는 지평선은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발견의 한계는 거의 모든 과학 분야에서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생물학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는 겨우 3가지 -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나의 수정란 세포가 어떻게 다세포 생물체로 발달하는가 그리고 중추신경계는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는 가-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리학도 마찬가지이다. 물리학도 양자역학이나 이중나선구조 또는 상대성 이론과 필적할 정도로 중요한 발견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지난 수십년간 그러한 발견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철학, 물리학, 우주론, 진화생물학, 사회과학, 신경과학, 케오플렉서티, 한계론, 과학적 신학, 기계과학의 종말을 설파한다. 이제 과학-진지하고 순수하며 경험적 과학-은 끝났다고 한다.


이처럼 모든 책의 핵심은 간단하다. 길어야 서너줄이면 수백페이지의 내용을 요약할 수있다. 교과서처럼 백화점식 주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따라서 책을 읽으려면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말을 ‘어떻게 풀어가는 가?’가 더 중요하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한두줄이면 된다. 그런데 왜 저자들은 그 간단한 이야기를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우선은 독자를 설득시켜야 한다. 그런데 달랑 한줄로 ‘내 생각은 이러니 그렇게 아쇼’ 하면 누가 이해하겠는가?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수많은 뿌리가 빨아들인 자양분의 결과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한마디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야 말로 진짜로 우리가 배워야할 많은 것이 있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 그에 걸맞는 사례와 논리,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풀어갈 때, 얼마나 지루하지 않게,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풀어가는 가이다.


만일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옛날에 옛날에 신데렐라가 있었는 데, 못된 계모와 이복 자매들한테 구박을 받다가, 왕자님을 만나서 행복한 결혼을 했데요’라고만 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아무도 감동을 받지 못한다. 신데렐라가 왜 구박을 받게 되고, 어떻게 구박을 받았으며, 어떻게 해서 요정을 만나고, 왕자님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는 지의 과정을 풀어가는 동안에 슬퍼하고, 화내고, 기뻐하면서 감정이입이 된다. 99%의 소설과 영화는 해피엔딩, 권선징악이다. 끝이 뻔히 보이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난 월드컵 때 조차도 경기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아침 인터넷으로 어느 팀이 이겼는 지, 그 결과만 확인한다. 그러니 도무지 남하고 축구.야구등 운동경기에 대한 대화가 되지 않을 뿐더러, 나역시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정말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박지성이 전반 몇 분경에 골인을 시켰는 데, 왜 오프사이드가 아닌지, 심판을 오심을 한 것에 대한 분노를 느끼면서 그 경기에 어떻게 감독이 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열변을 토한다. 그는 정말로 운동경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은 결과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뒷면에 써있는 유명한 사람들의 추천사나, 저자의 서문만 읽어서는 책의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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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땐 이런 책을


내가 보기에 미국사람들이 지은 책이 대체로 읽기가 쉽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쓴 책에 비하여 사례가 많이 들어가고, 문장이 평이하다. 일본 책을 번역한 것이 오히려 읽기가 난해할 때가 많다. 한국 사람들이 지은 책은 이전에 비하여 독자들에게 굉장히 친절해졌다. 우선 글자가 크고, 책 편집이 읽기에 편하다. 어떤 책은 논리적으로 책을 풀어가다가 갑자기 감정이 격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는 군더더기가 별로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은 아직은 부족한 듯하다. 그 것은 바로 ‘사례’를 별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번번한 사례없이 형이상학적인 설명문으로 채우는 책도 많다.


쉽지 않은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는 책을 쓰는 사람을 꼽으라면, 제레미 러프킨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만일 그가 ‘소유의 종말’이나 ‘노동의 종말’같은 책을 칸트처럼 썼다면 그는 결코 지금의 명성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의 모든 책은 사례로 시작해서, 사례로 끝난다. 한 페이지당 3-4개의 사례가 나오고, 400-500페이지짜리 책을 그렇게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권당 1,000개 이상의 사례가 들어있다는 말이 되고, 이 정도로 사용할려면 적어도 몇 배이상의 사례를 수집했어야 한다. 그 사례를 찾기가 힘들어 사건 하나를 두고서 몇 페이지를 그 배경과 영향을 말로 설명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런 책은 읽기에 지루함을 주기도 하거니와 독자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사건이 있을 때 이전에 유사한 사건들을 사례로 들고, 그 예상되는 영향을 또 다른 사례로 풀어가면 독자들은 지루하지도, 난해하지도 않는다. 저자의 수고로움은 독자들의 편안함으로 보답받는다. 그래서 그의 책은 어느 페이지를 펴보아도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 전혀 없다. 그리고 그 사례는 기억에 남기 쉽다. 철학책처럼 쓸 수 있는 내용을 그는 이야기 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책은 재미없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어야 하는 재미가 있다.

, 경영, 홍사장의책읽기, 시장의모순, 과학의종말, 사랑
posted at 2008/04/15 09:16:00 댓글(3) l 트랙백(0) l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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