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바다가 조아조아
가을 편지 [여백]

가을 노트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문정희****




집으로 가는 길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신경림****

 

가을, 신경림, 문정희
posted at 2008/08/29 14:25:00 트랙백(0) | 댓글(0) |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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