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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과 사람은 하나 !
하늘과 땅과 친구는 하나 !
하늘과 땅과 사랑은 하나 !
하늘과 땅과 지구촌은 하나 !
하늘만큼 / 땅만큼 .... 지구촌 여러분 !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그 실천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극은 불가능한 세계를 향한 열망과 그 실패의 도정에서 역설적으로 그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숭고한 파토스에 의해 구성되며 , 열망과 패배가 충돌하는 순간 한시대를 추동했던
강렬한 비극의 불꽃은 어두운 심연으로 사그라들고 , 남은 빈공간을 채우는 것은 씁쓸한
자기 모멸과 환멸의 자의식뿐입니다.
어느 시인이 비극을 상실한 채 폐허가 되어버린 , 영혼을 잃어버린 현재의 풍경에 자아의 내면을
겹쳐 놓은 표현을 이야기한것입니다.
양극화 방향속에서 노선을 상실한 채 길가에 우두커니 서있는 자의 혼란과 분열을 향한
우리시대의 우울한 내면 풍경을 비추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 냉혹한 거리속에서 난해한 미래의 자본주의적 현실속에 놓여 있는 모습속에서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잉여와 축적을 통해 냉혹한 삶과 원리를 강요하는 사회속에서의
심미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박탈하는 벌거벗은 자본의 한계, 자본의 이기주의는 , 세계 어린이
명작 동화속의 벌거벗은 임금님의 어린아이의 시각적인 진실한 모습속에서 , 세상을 바라보는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는 우리의 삶을 우스꽝스런 소극으로 연출하고 있는 지구촌의 세상 엿볼수 있는 모습이 믿음과 소망과 희망과 실천을 포기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바로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자라고 생각해 봅니다.
어느 사상가의 노랫 소리의 외침속에서
우리들은 죄인이 되어 있는것입니다.
하늘이여 , 땅이여 , 사람들이여 ...
저 죽음을 응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랍니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기를 바랍니다.
지구촌에서는 행복이 더 많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의 축제를 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든것을 평화 수호를 외치는 , 평화롭고 단순한 인생과 삶의 모습이였으면 , 좋겠습니다.
지구촌의 미래 경영속에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합리화 시키는
질문하고 있는 모습속에서 , 사회속에서의 조직속에서 자기 검열의 키워드적인 언어는 자아를
둘러싼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정당성에 대한 , 자본주의가 주장하는 평화의 경쟁과 생존 행위 그것에 대한 물음과 함께 인권과 생명윤리법은 나란히 버려진 현재의 세상속의 풍경에 겹쳐 놓는다.
비천한 세계에 놓인, 타락한 세상을 자기를 폭로함으로써 세계의 정당성을 회의하는 다수결의
원칙들 이러한 자기 노출은 비극을 상실한 단순한 다수결의 원칙 즉 시스템마저, 상실한 시대의
원칙인지 아이러니한 이야기라고 하고 싶다.
미래의 경영은 다수결의 원칙에서 결정한 단순한 문명의 모습인 시스템일것이다.
스스로를 썩은 시간속의 아들 딸 이라고 국제적 무한 경쟁속의 세계화의 모습들 , 낙오자와 오류자와 악성 바이러스로 명명하면서 사회체계속에서 폐배자와 폐륜아 , 탕자의 자아에 대한 환멸을 사회를 비유하며, 사회를 상대로 드러낸다.
20세기 중반의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 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 조합원을 숙청 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 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 교도를 숙청 했다.
나는 개신교도 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독일에서 서 있는 모습에서 바라본 , 세상 을 비유하였을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 바라 보는가에 따라 , 숙청된 사회의 모습은 달라질것이다 .
지구촌 사회속에서 나 자신도 모르게 숙청되어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우리들은 자신의 주체사상을 가지고, 인권으로 생명윤리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자신을 지켜주던 명예는 사라지고 , 수치심과 치욕을 상실한 " 어른들의 시간을 살아가야하는
우리 아들, 딸들은 침묵으로 굳어진 혀를 가지고 , 어른들의 시간이 지나가길 바랄뿐일것이다.
상실한 존재의 모습을 그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하고 그누구도 구원을 생각해 보지도 못하는것 같다. 세상 체계의 커다란 웃음소리는 냉소와 환멸로 가득찬 " 나쁜 냄새" 를 퍼뜨릴뿐이다.
명예와 위치와 직위와 직업과 가정속의 가장 그리고 교육을 상실하고 폐배해가는 모습, 폐인으로
전락해가는 과정속에 자아의 상실한 영혼 없는 , 영혼이 한 없이 초라한 , 누추하고 비루해지는
세상체계의 과정속에서 비루한 현실과 몰락의 시간의 살아가야하는 생명존재의 위치는 우울함
그리고 그 속에 스며든 우리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지구촌 환란속에 죽음의 이미지를 은폐하고
있을 따름일것이다. " 예수의 고난은 전 세계의 평화의 호소 입니다 "
생명은 태어나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생명 예찬을 하기에 지구촌에서 유지를 할수 있는것입니다.
진리는 생존이며 경쟁을 통해 자유케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 공간에는 지구촌에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는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믿음과 희망, 그실천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라는 시대에도 , 개화기 시대에도, 과도기 시대에도 , 현재에도
현실에도 , 미래에도 , 성탄절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 하나님이 구원 하신다 " 는 뜻을 가진다.
예수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지구촌에서 아주 흔한 이름중에서 일반적인 이름중에 속한다.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랄것이다.
한 사람이 독점한 신성불가침의 이름이 아니라
일반적인 이름이 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
그것은 바로 " 예수 "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 하나님의 구원 과 해방 " 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어떤 상황에서도 꺽이지 않고
21세기 전후 근대화적인 현실속에서도 미래속에서도 , 서민속에 있기를 바라듯이
사회 체계의 바닥에 맥맥이 흐르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
예수 께서 오신것은 , 섬김을 받으려 온것이 아니라 , 섬김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말씀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라는 흔한 이름을 가지고 , 그 이름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을 담았을것이다.
모든 고통과 환란을 당한 사람들이 . 예수라는 이름을 외침으로 , 호소했기에
" 예수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이 되었기에 , 결코 이 이름의 의미를 감소 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끝없이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의 세월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민중들의 믿음과 희망이 얼마나 끈질기게 이어져 왔는가를 이야기 하는것이다. 그러므로 " 예수 "라는 이름은 민중들의 믿음과 영생과 염원을 떠나서는 이해할수 없는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바로 고난과 환란의 역사속에서 , 서민들의 애환과 같이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이 얼레리 꼴레리 아리랑의 노래 가락을 붙잡듯이 , 붙들듯이 ...!
예수의 이름은 고난의 역사속에서 , 서민속에서 ...
하나님과 함께 하며, 구원의 확신을 간절히 염원하는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 성령의 불이 충만한 모습의 역사를 일으키는 ...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예수의 이름이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을 찾으므로써 , 구원을 얻는다는 " 임마누엘 " 의 모습인것이다.
" 보이는 물질의 세계는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 "
보이지 않는 세계는 신의 존재 확인 즉 로고스의 세워져있는 가치가 진리이다.
언어에는 창조력 과 사상의 힘 즉 서로가 통하는 협력의 힘 즉 각인력, 견인력 이라는
놀라운 힘이 내제 되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라.
우리가 흘리는 언어는 씨앗이 되어 , 믿음속에서 창조적 긍정의 힘이 작용하여
열매가 맺혀지는것이다. 만일 빵의 양식이 부족하고 , 세상이 춥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너무 작은 심장을 가졌기 때문일것이다.
에머슨은 생각하는일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일이라 보았지만 그보다
어려운 일은 생각한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한 사람의 생각과 그로인한 행동의 여파는 우주에 까지 영향을 끼칠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창조적인 사고를 키우는 자기 학습법으로 선택한것은
신의 존재에게 기도를 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에 집중을 하며 초점이 흔들리지 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모습이
우주에 까지 영향을 끼칠수 있는것이다.
신의 존재에게 기도하는 실천에 옮기는 창조적 행동의 미학이 필요한것이다.
" 거룩한 땅으로 바라보기 "
긍정적인 힘이 영향을 주는 모습의 땅 .
모든 의( 義 ) 를 이루는 허락한 땅의 모습들 .
우리의 손으로 거룩한 일을 하는 모습의 땅 .
우리들의 얼굴이 신실한 모습의 땅 .
선( 善 )을 향하고 받는 고난의 모습의 땅.
약속의 말씀과 언약의 믿음, 순종으로 기도하는 실천하는 모습의 땅.
무지개가 약속하는 , 영원한 언약된 모습의 땅 .
목자들이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한 모습의 땅 .
영장의 기쁨으로 사랑을 전하는 충만한 모습의 땅 .
온 국민이 합의 일치하여, 세계적인 행사를 맞이하는 모습의 땅 .
천사들이 받치고 있는 생명의 길, 축복된 모습의 땅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는 모습의 땅.
노동법이 알파와 오메가 같이 영원한 생명 윤리법으로 영원한 언약을 지키는 모습의땅 .
국제적 무한 경쟁 시대의 양극화, 지구촌 구석 구석 경제와 법치주의가 회복되는 모습의 땅.
거룩한 땅이란 ?
" 너의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발에서 신발을 벗으라.
그리고 신을 벗은 맨발로 그, 땅을 밟아 보라.
얼마나 거룩한 땅인지 알것이다. "
무한 경쟁시대의 양극화 회복은 1% 가 주는 행복한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길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하늘의 길 ( 天理 : 하늘의 이치 ) 가 있고
지상에는 지상의 길이 있습니다.
홍익 교육 사상과 전인 교육 사상으로 잘 가르치는 이치의 길입니다.
별들도 , 들풀들도 다 자연으로 향하는 제 길을 갑니다.
사람들도 , 자연으로 향하는 사람의 길이 있습니다.
자연으로 향하는 세상 모든 만물들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가야할길 , 가지 말아야 할길, 가고 싶은길, 갈수없는 길
바로 자연의 이치 즉 근본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는 인간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산소를 못먹으면 ,생명은 죽는 우주의 이치때문입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는 길 , 지금은 갈수 없지만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길
가기 싫지만 , 어쩔수 없이 가야 하는 길 ,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 없이 많은 길을 만납니다.
가고 싶은 길과 의지대로 갈수 있는 길만 있으면 , 좋겠지만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더 많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길입니다.
그 사람은 세상 전체속에서 일부가 되어 길을 잘못 들어 갔습니다.
욕심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일은 비난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세상 전체가 옳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옳은 길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는 양심이 그것을 가리켜 주니까요 !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핑계 거리로 생각하며, 가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길은 핑계 거리가 수 없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이 득세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실을 보면 나쁜 사람이 더 부귀 영화를 누리는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의 길은 핑계거리가 수없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늘의 일치속에서 음양의 조화를 부정하면 , 인과 응보 라는것도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 , 시대마다의 역사 , 현실의 역사속에서 인과 응보를 받는 역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 "는 격언이 하늘의 이치이며
세상 사회 공동체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옳은 길은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이 인과 응보를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등대의 빛이 되어 그것이 함께 가는 길이고 거룩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도반 ( 道 反 ) 의 길입니다.
바로 촛불 집회 의 의미를 이야기하면 , 횃불 이나 봉기하는 불 같은것은 , 강한 면과 같은
뭉치면 살고 , 흩어지면 죽는다는 결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촛불이라하면 , 모두가 조심을 하지 않으면 , 촛불은 꺼지고 맙니다.
함께 , 조심하면서 촛불이 꺼지지 않게 , 서로가 협력하는 모습이 도반의 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진짜이유는 제가 딛고 , 선 땅위에서 가야할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생명과 평화를 중심에 놓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 보면 큰길이 열릴것입니다.
빨리만 갈려고 하다보면 그것으로 인해 놓치는 것도 있기에 가끔은 천천히 가는 것도 좋습니다.
지구촌의 역사속에서 인과 응보를 받은 역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땅을 바라만 보아도 , 행복한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촌 사회 안에서는 떨어질때와 올라갈때가 있습니다.
사회속에서 떨어질때 우리는 무엇을 무엇을 내 버리는 가요 ?
가정파괴, 애써 쌓아올린 정체성과 평판, 소중한 자아를 내 버린다.
야망을 내버리고, 탐욕을 내 버리고,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이성을 내 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떨어지는가 ?
천국 과 지옥 , 선과 악, 열정속으로 공포속으로, 터무니 없는 영원하지 못한 기쁨속으로
떨어질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떨어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모두 높은곳에서, 넓은곳에서 , 깊은곳으로 , 떨어져 한참 하강하고 있는중이다. 우리는 신의 은총으로부터 추락하고 있다면 은총과 함께 추락하게 해 달라고 은총을
향해서 추락하게 해달라고 기도 하자 !
우리가 고통과 나약함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면 , 즐거움과 강력함을 행해서도 떨어지자.
우리가 죽음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다면 , 삶을 향해서 떨어져 보자.
우리는 지금 현실속에서 무엇을 향해 떨어지고 있습니까 !
얼레리 꼴레리 아리랑 !/ 행복한 동행
얼레리 꼴레리 아리랑 !/ 꼭두야 꼭두야 , 아라리 난다.
얼레리 꼴레리 아리랑 !/ 타박 타박 타박네야 ! 아라리 난네.
자원의 완성은 행복한 동행입니다.
원문 : http://www.hankyung.com/board/view.php?no=308&id=theme_3&ch=comm
하늘과 땅과 사람은 하나 !
하늘과 땅과 친구는 하나 !
하늘과 땅과 사랑은 하나 !
하늘과 땅과 지구촌은 하나 !
하늘만큼 / 땅만큼 .... 지구촌 여러분 !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그 실천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극은 불가능한 세계를 향한 열망과 그 실패의 도정에서 역설적으로 그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숭고한 파토스에 의해 구성되며 , 열망과 패배가 충돌하는 순간 한시대를 추동했던
강렬한 비극의 불꽃은 어두운 심연으로 사그라들고 , 남은 빈공간을 채우는 것은 씁쓸한
자기 모멸과 환멸의 자의식뿐입니다.
어느 시인이 비극을 상실한 채 폐허가 되어버린 , 영혼을 잃어버린 현재의 풍경에 자아의 내면을
겹쳐 놓은 표현을 이야기한것입니다.
양극화 방향속에서 노선을 상실한 채 길가에 우두커니 서있는 자의 혼란과 분열을 향한
우리시대의 우울한 내면 풍경을 비추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 냉혹한 거리속에서 난해한 미래의 자본주의적 현실속에 놓여 있는 모습속에서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잉여와 축적을 통해 냉혹한 삶과 원리를 강요하는 사회속에서의
심미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박탈하는 벌거벗은 자본의 한계, 자본의 이기주의는 , 세계 어린이
명작 동화속의 벌거벗은 임금님의 어린아이의 시각적인 진실한 모습속에서 , 세상을 바라보는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는 우리의 삶을 우스꽝스런 소극으로 연출하고 있는 지구촌의 세상 엿볼수 있는 모습이 믿음과 소망과 희망과 실천을 포기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바로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자라고 생각해 봅니다.
어느 사상가의 노랫 소리의 외침속에서
우리들은 죄인이 되어 있는것입니다.
하늘이여 , 땅이여 , 사람들이여 ...
저 죽음을 응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랍니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기를 바랍니다.
지구촌에서는 행복이 더 많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의 축제를 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든것을 평화 수호를 외치는 , 평화롭고 단순한 인생과 삶의 모습이였으면 , 좋겠습니다.
지구촌의 미래 경영속에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합리화 시키는
질문하고 있는 모습속에서 , 사회속에서의 조직속에서 자기 검열의 키워드적인 언어는 자아를
둘러싼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정당성에 대한 , 자본주의가 주장하는 평화의 경쟁과 생존 행위 그것에 대한 물음과 함께 인권과 생명윤리법은 나란히 버려진 현재의 세상속의 풍경에 겹쳐 놓는다.
비천한 세계에 놓인, 타락한 세상을 자기를 폭로함으로써 세계의 정당성을 회의하는 다수결의
원칙들 이러한 자기 노출은 비극을 상실한 단순한 다수결의 원칙 즉 시스템마저, 상실한 시대의
원칙인지 아이러니한 이야기라고 하고 싶다.
미래의 경영은 다수결의 원칙에서 결정한 단순한 문명의 모습인 시스템일것이다.
스스로를 썩은 시간속의 아들 딸 이라고 국제적 무한 경쟁속의 세계화의 모습들 , 낙오자와 오류자와 악성 바이러스로 명명하면서 사회체계속에서 폐배자와 폐륜아 , 탕자의 자아에 대한 환멸을 사회를 비유하며, 사회를 상대로 드러낸다.
20세기 중반의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 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 조합원을 숙청 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 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 교도를 숙청 했다.
나는 개신교도 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독일에서 서 있는 모습에서 바라본 , 세상 을 비유하였을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 바라 보는가에 따라 , 숙청된 사회의 모습은 달라질것이다 .
지구촌 사회속에서 나 자신도 모르게 숙청되어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우리들은 자신의 주체사상을 가지고, 인권으로 생명윤리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자신을 지켜주던 명예는 사라지고 , 수치심과 치욕을 상실한 " 어른들의 시간을 살아가야하는
우리 아들, 딸들은 침묵으로 굳어진 혀를 가지고 , 어른들의 시간이 지나가길 바랄뿐일것이다.
상실한 존재의 모습을 그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하고 그누구도 구원을 생각해 보지도 못하는것 같다. 세상 체계의 커다란 웃음소리는 냉소와 환멸로 가득찬 " 나쁜 냄새" 를 퍼뜨릴뿐이다.
명예와 위치와 직위와 직업과 가정속의 가장 그리고 교육을 상실하고 폐배해가는 모습, 폐인으로
전락해가는 과정속에 자아의 상실한 영혼 없는 , 영혼이 한 없이 초라한 , 누추하고 비루해지는
세상체계의 과정속에서 비루한 현실과 몰락의 시간의 살아가야하는 생명존재의 위치는 우울함
그리고 그 속에 스며든 우리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지구촌 환란속에 죽음의 이미지를 은폐하고
있을 따름일것이다. " 예수의 고난은 전 세계의 평화의 호소 입니다 "
생명은 태어나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생명 예찬을 하기에 지구촌에서 유지를 할수 있는것입니다.
진리는 생존이며 경쟁을 통해 자유케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 공간에는 지구촌에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는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믿음과 희망, 그실천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라는 시대에도 , 개화기 시대에도, 과도기 시대에도 , 현재에도
현실에도 , 미래에도 , 성탄절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 하나님이 구원 하신다 " 는 뜻을 가진다.
예수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지구촌에서 아주 흔한 이름중에서 일반적인 이름중에 속한다.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랄것이다.
한 사람이 독점한 신성불가침의 이름이 아니라
일반적인 이름이 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
그것은 바로 " 예수 "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 하나님의 구원 과 해방 " 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어떤 상황에서도 꺽이지 않고
21세기 전후 근대화적인 현실속에서도 미래속에서도 , 서민속에 있기를 바라듯이
사회 체계의 바닥에 맥맥이 흐르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
예수 께서 오신것은 , 섬김을 받으려 온것이 아니라 , 섬김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말씀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라는 흔한 이름을 가지고 , 그 이름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을 담았을것이다.
모든 고통과 환란을 당한 사람들이 . 예수라는 이름을 외침으로 , 호소했기에
" 예수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이 되었기에 , 결코 이 이름의 의미를 감소 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끝없이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의 세월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민중들의 믿음과 희망이 얼마나 끈질기게 이어져 왔는가를 이야기 하는것이다. 그러므로 " 예수 "라는 이름은 민중들의 믿음과 영생과 염원을 떠나서는 이해할수 없는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바로 고난과 환란의 역사속에서 , 서민들의 애환과 같이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이 얼레리 꼴레리 아리랑의 노래 가락을 붙잡듯이 , 붙들듯이 ...!
예수의 이름은 고난의 역사속에서 , 서민속에서 ...
하나님과 함께 하며, 구원의 확신을 간절히 염원하는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 성령의 불이 충만한 모습의 역사를 일으키는 ...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예수의 이름이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을 찾으므로써 , 구원을 얻는다는 " 임마누엘 " 의 모습인것이다.
" 보이는 물질의 세계는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 "
보이지 않는 세계는 신의 존재 확인 즉 로고스의 세워져있는 가치가 진리이다.
언어에는 창조력 과 사상의 힘 즉 서로가 통하는 협력의 힘 즉 각인력, 견인력 이라는
놀라운 힘이 내제 되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라.
우리가 흘리는 언어는 씨앗이 되어 , 믿음속에서 창조적 긍정의 힘이 작용하여
열매가 맺혀지는것이다. 만일 빵의 양식이 부족하고 , 세상이 춥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너무 작은 심장을 가졌기 때문일것이다.
에머슨은 생각하는일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일이라 보았지만 그보다
어려운 일은 생각한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한 사람의 생각과 그로인한 행동의 여파는 우주에 까지 영향을 끼칠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창조적인 사고를 키우는 자기 학습법으로 선택한것은
신의 존재에게 기도를 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에 집중을 하며 초점이 흔들리지 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모습이
우주에 까지 영향을 끼칠수 있는것이다.
신의 존재에게 기도하는 실천에 옮기는 창조적 행동의 미학이 필요한것이다.
" 거룩한 땅으로 바라보기 "
긍정적인 힘이 영향을 주는 모습의 땅 .
모든 의( 義 ) 를 이루는 허락한 땅의 모습들 .
우리의 손으로 거룩한 일을 하는 모습의 땅 .
우리들의 얼굴이 신실한 모습의 땅 .
선( 善 )을 향하고 받는 고난의 모습의 땅.
약속의 말씀과 언약의 믿음, 순종으로 기도하는 실천하는 모습의 땅.
무지개가 약속하는 , 영원한 언약된 모습의 땅 .
목자들이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한 모습의 땅 .
영장의 기쁨으로 사랑을 전하는 충만한 모습의 땅 .
온 국민이 합의 일치하여, 세계적인 행사를 맞이하는 모습의 땅 .
천사들이 받치고 있는 생명의 길, 축복된 모습의 땅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는 모습의 땅.
노동법이 알파와 오메가 같이 영원한 생명 윤리법으로 영원한 언약을 지키는 모습의땅 .
국제적 무한 경쟁 시대의 양극화, 지구촌 구석 구석 경제와 법치주의가 회복되는 모습의 땅.
거룩한 땅이란 ?
" 너의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발에서 신발을 벗으라.
그리고 신을 벗은 맨발로 그, 땅을 밟아 보라.
얼마나 거룩한 땅인지 알것이다. "
무한 경쟁시대의 양극화 회복은 1% 가 주는 행복한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길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하늘의 길 ( 天理 : 하늘의 이치 ) 가 있고
지상에는 지상의 길이 있습니다.
홍익 교육 사상과 전인 교육 사상으로 잘 가르치는 이치의 길입니다.
별들도 , 들풀들도 다 자연으로 향하는 제 길을 갑니다.
사람들도 , 자연으로 향하는 사람의 길이 있습니다.
자연으로 향하는 세상 모든 만물들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가야할길 , 가지 말아야 할길, 가고 싶은길, 갈수없는 길
바로 자연의 이치 즉 근본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는 인간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산소를 못먹으면 ,생명은 죽는 우주의 이치때문입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는 길 , 지금은 갈수 없지만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길
가기 싫지만 , 어쩔수 없이 가야 하는 길 ,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 없이 많은 길을 만납니다.
가고 싶은 길과 의지대로 갈수 있는 길만 있으면 , 좋겠지만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더 많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길입니다.
그 사람은 세상 전체속에서 일부가 되어 길을 잘못 들어 갔습니다.
욕심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일은 비난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세상 전체가 옳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옳은 길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는 양심이 그것을 가리켜 주니까요 !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핑계 거리로 생각하며, 가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길은 핑계 거리가 수 없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이 득세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실을 보면 나쁜 사람이 더 부귀 영화를 누리는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의 길은 핑계거리가 수없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늘의 일치속에서 음양의 조화를 부정하면 , 인과 응보 라는것도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 , 시대마다의 역사 , 현실의 역사속에서 인과 응보를 받는 역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 "는 격언이 하늘의 이치이며
세상 사회 공동체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옳은 길은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이 인과 응보를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등대의 빛이 되어 그것이 함께 가는 길이고 거룩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도반 ( 道 反 ) 의 길입니다.
바로 촛불 집회 의 의미를 이야기하면 , 횃불 이나 봉기하는 불 같은것은 , 강한 면과 같은
뭉치면 살고 , 흩어지면 죽는다는 결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촛불이라하면 , 모두가 조심을 하지 않으면 , 촛불은 꺼지고 맙니다.
함께 , 조심하면서 촛불이 꺼지지 않게 , 서로가 협력하는 모습이 도반의 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진짜이유는 제가 딛고 , 선 땅위에서 가야할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생명과 평화를 중심에 놓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 보면 큰길이 열릴것입니다.
빨리만 갈려고 하다보면 그것으로 인해 놓치는 것도 있기에 가끔은 천천히 가는 것도 좋습니다.
지구촌의 역사속에서 인과 응보를 받은 역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땅을 바라만 보아도 , 행복한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촌 사회 안에서는 떨어질때와 올라갈때가 있습니다.
사회속에서 떨어질때 우리는 무엇을 무엇을 내 버리는 가요 ?
가정파괴, 애써 쌓아올린 정체성과 평판, 소중한 자아를 내 버린다.
야망을 내버리고, 탐욕을 내 버리고,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이성을 내 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떨어지는가 ?
천국 과 지옥 , 선과 악, 열정속으로 공포속으로, 터무니 없는 영원하지 못한 기쁨속으로
떨어질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떨어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모두 높은곳에서, 넓은곳에서 , 깊은곳으로 , 떨어져 한참 하강하고 있는중이다. 우리는 신의 은총으로부터 추락하고 있다면 은총과 함께 추락하게 해 달라고 은총을
향해서 추락하게 해달라고 기도 하자 !
우리가 고통과 나약함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면 , 즐거움과 강력함을 행해서도 떨어지자.
우리가 죽음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다면 , 삶을 향해서 떨어져 보자.
우리는 지금 현실속에서 무엇을 향해 떨어지고 있습니까 !
얼레리 꼴레리 아리랑 !/ 행복한 동행
얼레리 꼴레리 아리랑 !/ 꼭두야 꼭두야 , 아라리 난다.
얼레리 꼴레리 아리랑 !/ 타박 타박 타박네야 ! 아라리 난네.
자원의 완성은 행복한 동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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