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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비트,남북한 경제통합 2010년까지 준비하라 했는데. [피플 인사이드]

1982년 출간돼 1400만부가 팔린 미래 예측서 '메가트렌드'로 일약 세계적인 미래학자의 반열에 오른 존 나이스비트 박사(79).

그가 17년 전인 1991년 9월 16일 한국을 처음 방문해 서울 힐튼호텔에서 '한국과 신경제질서'를 주제로 한 강연회를 가져 큰 성황을 이뤘는데요.이 날 강연에 대한 한국인들의 좋은 반응에 고무된 탓인지 나이스비트 박사는 이 후에도 한국을 자주 찾았습니다.가장 최근엔 2007년에 '마인드 세트' 한국어판 출간 기념으로 다녀갔지요.

존 나이스비트 박사 <사진=한국경제신문>

그의 첫 방한 때 저는 바쁜 선배 대신 기자회견에 가라는 데스크의 지시를 받고 얼떨결에(그때 메가트렌드 읽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참석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무조건 그의 말을 취재수첩에 옮겨 적기에 바빴는데 그 수첩이 아직도 남아 있네요.

사진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시피 나이스비트 박사는 잘 생긴 외모에 텁수룩한 구렛나루가 돋보이잖습니까.기자회견에서도 그것만 보이더군요.하지만 연세가 들어선 지 최근 사진을 보니 그 구렛나루도 많이 빠진 듯하던데요.

나이스비트 박사는 이날 "한국은 지금 고도성장에서 안정으로,수출 위주에서 내수 위주로 변화하는데다 북한과의 통일문제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 정말 오고 싶었던 곳"이라며 "이 자리에 선 것 자체가 흥분을 일으킨다"고 운을 뗐습니다.하지만 이런 변화의 시기에 한국이 자신의 역할을 확실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지요.

나이스비트 박사는 이 회견에서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남북한의 통일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한국 정부에 대해 충고를 했는데요.당시 그의 견해와 충고가 17년이 지난 오늘날의 상황과 어떻게 연결되는 지 살펴볼까요.

나이스비트 박사는 "독일 통일 과정을 연구한 결과 작년(1990년)에 그동안 견지해온 남북한 통일불가피성에 대한 시각을 일부 수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남북한 통일 빨리 진척시키지 말라는 얘기였지요.당시 북방정책을 편 노태우 정권은 2000년까지 남북한이 통일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었지요.

그는 "한국이 앞서 언급한 성장에서 안정으로,수출에서 내수로 이행하며 내부 진통을 겪는 상황에서 남북한 통일마저도 너무 빨리 진척될 경우 한국경제는 자살행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이에 대한 근거로는 독일이 통일된 후 겪고 있는 각종 후유증을 증거로 제시했고요.동서독과 남북한이 유사성은 많지 않지만 구조상 닮은 점이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지요.

나이스비트 박사는 이에 따라 남북한이 20년 이상 준비 과정을 거쳐 (노태우 정권이 추진하던 것보다 10년 늦춘) 2010년경 완전한 경제적 통합을 이루는 게 바람직하다고 충고했습니다.

나이스비트 박사는 당시 노정권의 희망대로 남북한이 통일을 이뤘을 때 양측이 질 경제적인 부담을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설명했는데요.통독의 사례를 비추어 볼 때 북한의 국유기업 절반이 문을 닫을 것이고 북한의 성인 중 절반인 500만명(총인구 인구 2000만명 추정)이 실업자가 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북한인들은 남한 사회가 가진 노동 윤리가 없어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어 대량 실업이 발생할 거라는 얘기지요.남한은 또 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추가적으로 엄청난 세금 부담을 감당해야 할 거라고 했고요.

이런 게 결국 서로간의 반목과 분노를 키울 것이라는 게 그의 견해였습니다.그는 특히 한국의 지역간 불화를 볼 때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이런 갈등이 충분이 예상된다고 했습니다.

남북한은 따라서 천천히,그리고 작은 변화로부터 통일의 활로를 찾기를 권했습니다.예컨대 그 해 4월에 이뤄진 남북한 통일탁구대회 등이 좋은 사례라고 강조했습니다.곧이어 이뤄진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등도 그가 꼽은 통일의 지렛대였습니다.

그의 이런 충고를 한국 정부가 받았들였는 지 어쨌는 지 판단할 수 없지만 이후 한국내에서 급속한 통일에 대한 환상은 많이 깨졌지요.그리고 남북한 대화에서 경제 협력이 주테마가 된 것이 사실이지요.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방북을 시작으로 금강산관광,개성공단 개설,개성관광 등이 실현됐으니까요. 

이 석학이 충고하며 제시한 남북한의 완전한 경제 통합의 시점이 2년정도 남았는데요.하지만 지난 17년간의 준비가 부족한 탓인 지 갈 길이 아직도 멀어 보입니다.

 

존 나이스비트, 메가트렌드, 남북한 경제통합
posted at 2008/05/16 17:36:00 트랙백(0) | 댓글(0) | 스크랩
42년 직장생활 마감한 거목 전윤철 윤종용 [피플 인사이드]

공직과 기업에서 각각 대한민국을 움직인 '거목' 두분이 어제 오늘(2008년 5월 15일) 공교롭게도 42년이라는 꼭같은 기간의 직장 생활을 마감했습니다.두 분은 특히 '고집을 피운다면' 그 자리에서 더 머물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물러나는 모습을 갖춘 공통점을 지녔고요. 

1939년 전남 목포 태생의 전윤철 감사원장과 1944년 경북 영천 태생의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주인공인데요.

두 분이 직장 생활을 한 기간은 강산이 네 번 변하고 공자께서 말씀하신 '불혹'의 나이보다 2년이 더 긴 세월이네요.햇수로 따지니 1966년에 처음 시작한 것이고요.

소인 보다는 딱 두배 더 긴 세월을 직장인으로 보내셨는데 한마디로 부럽습니다.소인은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으려나?

개인적으로 전윤철 원장은 노무현 정권시절 저녁 식사자리에서 대면할 기회가 한차례 있었는데 그 분에게 생긴 다른 긴급한 일로 인해 불발에 그친 적이 있습니다.

윤종용 부회장의 경우 해외에서 한번 대면한 적이 있습니다.

2000년 올림픽이 열린 호주 시드니에서 였지요.

성화봉송 주자로 뛰었던 윤 부회장이 취재차 현지를 찾은 기자들에게 점심을 쏘셨는데요.

테이블 정면으로 마주앉은 저에게 윤 부회장이 "파평 윤씨냐"고 묻고 "맞다"고 대답하면서 대화가 이어졌는데요.

곧바로 그 전에 제가 기사로 썼던 '전자회사 CEO의 아들은 엔터테인먼트 기질을 가졌네'라는 기사가 화제에 올려졌고요.

아다시피 윤 부회장의 아들은 탤런트 윤태영(윤 부회장이 처음에 이를 용납하지 않았지요)이고 삼성전자의 라이벌인 LG전자의 CEO이던 구자홍 부회장의 아들은 MBC 대학가요제 출전해 본선 8명에 입상했다는 내용이었지요.

그 얘기 나누며 어떻게 아들을 받아들이게 됐나 등에 대한 문답이 오간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경 임원기 기자(전윤철 원장)와 김현예 기자(윤종용 부회장)가 자신 블로그에 올린 퇴임사 전문을 보니 거목의 삶이 가슴으로 다가오네요.

윤종용 부회장은 "무거운 짐을 항상 두 어깨에 짊어지고 살다가 이제 내려놓게 되니 너무도 홀가분하다.그러나 만감도 교차한다"라며 퇴임의 변을 시작했네요.

그는 임직원들에게 "윗 사람의 지시를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고민하고 깨우쳐 길을 열어 나가는 창조적인 리더가 되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이어 사물 본래의 근본 이치를 알아내는 경지를 말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그는 직원들에게 강조했네요.

전윤철 원장은 "지금까진 너무 앞만 보고 살아왔기 때문에 퇴임 후엔 추스리고 뒤도 좀 돌아보고 싶다"고 했네요.제일 고생했던 아내와 그 동안 못다한 대화도 좀 나누고 싶다고 하고요.

그는 "공직자라는 이름 만으로 배척과 질시의 대상이 되서는 곤란하다"며 최근 공직에 대한 언론과 정부의 부정적 시각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윤종용 부회장, 전윤철 원장, 42년 직장생활
posted at 2008/05/15 17:55:00 트랙백(0) | 댓글(0) | 스크랩
백수시인 김종태의 영혼이 자유로운 삶 [피플 인사이드]

"그대는 아는가?방문과 창문의 차이를.방에 난 문은 방문이고, 창에 난 문은 창문이라고?

아니라네.사람이 드나드는 문은 방문이고,바람이 드나드는 문은 창문이라네."(이하생략)

한경닷컴 커뮤니티에 '풀꽃처럼 살다'라는 칼럼을 쓰고 있는 김종태 시인이 2008년 1월18일 칼럼을 개설하며 올린 시의 한구절입니다.

그의 칼럼 수가 오늘(2008년 5월 15일)올린 '생명예찬'까지 총 90편이 됐네요.얼핏 계산하니 1.5일에 한편꼴로 칼럼을 작성한 거네요.초인적인(?) 활동을 펼친 셈이랄까요.

이런 점을 인정받아 김종태 시인이 한경닷컴의 '이달의 칼럼니스트'로 선정돼 이날 김수섭 사장으로부터 상패를 받았습니다.

그의 칼럼 '풀꽃처럼 살다'는 대한민국 땅에서 자라는 야생화나 꽃,풀 등의 사진을 테마로 구성하고 여기에 시를 지어 붙인 형식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보통 사람들은 이름은 커녕 구경조차도 하지 못했던 갖가지 꽃,풀과 함께 힘들이지 않고도 읽을 수 있는 시를 동시에 만난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상식을 끝내고 그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나는 "와이프가 김 시인의 열렬한 팬입니다.칼럼을 통해 한국의 많은 야생화를 알게됐고 가끔 제게도 뒷동산을 오르내리며 이건 무슨 꽃,저건 무슨 풀하며 가르쳐 주기도 하지요"라고 했지요.사실이 그렇거든요.

이어 '이 정도 칼럼을 위해 사진을 찍기위한 출사를 자주 나가고 시간을 많이 투입해야 할 것같다'는 물음에 대해 그는 "(19년간)백수생활을 해 왔으니까 별 어려움이 없다"고 간단하게 답했습니다.

그의 이런 여유로운 대답은 아마도 일반인들이 쉽사리 선택할 수 없는 삶의 이력을 뒷받침하는 것같습니다.

김종태 시인은 연세대 법대를 졸업하고 대한전선에서 근무하다 직장생활 만 12년이 되던 어느 날 돌연히 '야생화를 찍고 시를 쓰겠다'며 회사를 때려쳤다고 합니다.영혼의 자유를 갈구한 거라고 할까요.

그 때 나이 38세라고 합니다.퇴직금 1천5백만원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보통의 직장인들이 생각하기엔 조금 황당할 지도 모르는 결정이었고 지금까지 19년을 이렇게 지내왔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파격적인 인생행로의 변경은 아마도 먹고사는데 지장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었나 합니다.혹시 이런 삶을 꿈꿀지 모르는 샐러리맨이 있다면 무작정 따라하지는 마십시오.

김 시인은 1990년부터 시작(詩作) 생활을 한 뒤 최근에 출간한 '너꽃해'를 비롯 여러 권의 작품집을 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백수'라고 칭하지만 그는 월수 20만원의 고정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하모니카 교실'의 강사로 활동중인데 월수금 세차례 강의한다고 합니다.

한 2년정도 됐는데 지금은 제자들의 실력이 늘어 합주단을 만들어 양로원 고아원 등에서 위문 공연을 하기도 한답니다.

"요새 하모니카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아 오전 10시부터 4시까지 꼬박 일하기도 해요.그래도 내가 정말 즐겁게 하는 일이라 힘든 줄 모르겠습니다.만약 강사생활을 하며 월 100만원을 받는다면 벌써 때려쳤을 지도 모르겠네요."

김종태 시인, 한경닷컴 커뮤니티, 칼럼, 풀꽃처럼 살다, 하모니카
posted at 2008/05/15 15:39:00 트랙백(0) | 댓글(0) |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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