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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1월 1일은 대한민국에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 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된 지 딱 10년이 되는날이었다.
1996년 1월 1일 당시 아날로그 방식 이동전화 서비스를 하던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좀더 뒤에 CDMA 서비스를 했으며 나중에 SK텔레콤에 합병됐다)이 CDMA방식으로 첫 전파를 날린 것이 어느 듯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이날 난 중앙일보에 실린 'CDMA 10주년'이라는 관련 기사를 유심히 읽으며 문득 10여년전의 일이 떠올랐고 새로운 감회로 다가왔다.1996년 당시 나는 정보통신부를 출입하며 통신기자로 활동했었기 때문이다.
이론상으로 존재하던 디지털방식인 CDMA 이동통신 서비스는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상용화돼 우리나라를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이끈 일등공신이 됐다.
이 방식의 휴대폰은 삼성전자 LG전자 팬택 등이 세계 시장을 압도하고 있고 SK텔레콤 KTF같은 서비스회사들은 전세계로 진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CDMA 방식 디지털 이동통신 서비스는 한국에서 서비스가 시작되기 직전인 1995년 중반(5월정도)에 좌초할 지도 모를 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바로 현재의 KTF(KT프리텔) 한솔텔레콤(KTF에 합병) LG텔레콤 등 3개 CDMA방식 PCS회사들이 탄생되기 직전 상황이다.
정부와 업계는 PCS회사 선정을 앞두고 전세계적으로 상용화된 사례가 없는 CDMA보다 이미 유럽의 여러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던 TDMA(이른바 GSM)방식을 선호하고 있었다.
상용화가 안된 것으로 모험을 할 게 아니라 이른바 '안전빵'으로 가자는 여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 경우 그 이전부터 서비스를 준비해온 SK텔레콤(당시 사장은 서정욱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이 될 가능성이 컸다.
SK텔레콤은 사면초가에 몰리면서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회사가 망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팽배했다.이미 이와 관련해 상당한 액수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한 상황이었고 이게 고스란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SK텔레콤의 홍보담당 임원인 L씨(후에 프로농구단 SK나이츠 단장을 지냄)가 내게 찾아온 것은 이러한 급박한 형편에서 였다.
회사는 CDMA방식 기술에 대한 상당한 양의 자료를 제시하고 CDMA방식의 선택의 정당성에 대해 설명했다.
SK텔레콤 측의 제시자료는 비록 지금은 상용화가 안돼 있으나 CDMA를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상용화할 경우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인지 등에 대한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었다.
나는 이 자료를 기초로 여러 관련 인사들을 대상으로 보충 취재를 했다.
이어 10여일 후 'PCS 디지털 방식 표준 논란'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이 기사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국내 신문들은 내 기사를 기본으로 전부 똑같은 형태의 기사를 써대기 시작했다.
며칠 뒤 신문사 방송사 논설위원들과 정부의 간담회에서 내 기사가 도마위에 올려져 토론이 이어졌다.
기술방식을 놓고 벌인 우리나라 건국이래 최대의 논란이 진행된 것이다.
그 이후 여론은 CDMA로 표준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 대세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TDMA를 기정사실화 했던 정부도 방향을 틀었다.
당시 끝내 물고 늘어진 신문이 있었다.J일보였다.
그 신문은 우리가 표준을 CDMA로 할 경우 '한국만 통신의 섬이 돼 외톨이'기 될 것(이른바 로밍에서 제외돼 우리만 고립된다)이라는 황당한 논리를 앞세워 이 방식을 공격했다.
이런 상황으로 치닫게 되자 사실 나도 내심 걱정스럽기는 했다.내가 기술에 대해 잘 몰라 여론을 잘 못 선도했나 하는 의심이 가끔씩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되돌릴 수가 없었다.
정부는 1995년 8월쯤 CDMA방식으로 국가 표준을 정해 발표했다.
SK텔레콤은 이후 삼성전자 LG정보통신(후에 LG전자로 합병됨)등 관련 장비제조업체들과 협력을 하며 상용 서비스를 위한 막바지 피치를 올렸고 마침내 1996년 1월 1일 첫 전파를 쏘았다.
나는 당시 CDMA에 반대를 했던 몇명의 인사들이 그 뒤에 CDMA를 성공시킨 주역으로 떠오른 것을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대표격인 어떤 인물은 나중에 정보통신부 장관까지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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