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0월27일은 그 유명한 블랙먼데이다.하루새 미국 다우지수는 554포인트 떨어졌다.
하루 하락폭으로는 사상 최대였다.
다음날,미국 팬실베니아 외곽에 있는 자산운용사인 뱅가드그룹 사옥에는 스위스 국기가 내걸렸다.
비상임을 알리는 깃발이었다.‘스위스 아미(Swiss Army)’라고 명명된 비상지원 조직의 동원을 알리는 것이었다.
스위스에는 군대가 없다.그래서 국가 전체가 비상시에는 군대로 전환된다.
뱅가드도 마찬가지였다.이 깃발은 모든 직원들에게 최전선인 고객과의 상담자리로 나가라는 신호였다.전시 동원 체제인 것이다.
뱅가드는 그해 봄 채권시장 붕괴 당시 고객들의 상담전화를 받지 못하는 사태를 겪고 스위스 아미 체제를 만들었다.위기시에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고객들에게 달려간다는 정신이다.사장도 부사장도 군대의 일원일 뿐이었다.
넘버2였던 존브라난을 비롯한 수백명의 펀드매니저들이 전화기 앞으로 달려가 상황을 설명하고 고객들에게 시장 상황을 설명했다.이날 뱅가드 본사로 걸려온 전화는 모두 7만5000통이었다.하지만 대기시간은 15초를 넘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뱅가드그룹은 인덱스펀드를 운용하는 세계적 자산운용회사다.이 일화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건 그들이 갖고 있는 정신때문이다.바로 고객.
자산운용사들이 떼어가는 엄청난 수수료를 부당하게 여긴 뱅가드 창업자 존보글이란 사람은 그 부담을 낮춰 고객의 수익을 높일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인덱스펀드다.
뱅가드그룹의 홈페이지 첫 화면에는 물컵이 두개 있다.물이 아주 적게 들어있는 컵은 더 낮은 비용을 의미하고,물이 가득차 있는 컵은 더 높은 수익을 의미한다.이 화면 하나로 뱅가드그룹의 정신을 엿볼수 있다.
그들에게 고객이 어떤 의미인지 알수 있다.블랙먼데이 다음날 내걸린 스위스 국기처럼.
요즘처럼 뱅가드그룹과 같은 펀드가 부러운 때가 없었다.
국내 1위의 자산운용사 미래에셋 얘기다.인사이트펀드 광풍이 불던 작년 10월말부터 11월까지 투자자들은 박현주의 미래에셋을 믿고 이 펀드에 가입했다.투기였건 투자였건 동기가 무슨 상관이겠는가.사람들은 높은 수수료를 감수하고도 수조원의 돈을 맡겼다.
박현주 회장을 믿고 어떤 주부는 남편 몰래 몇년을 저축해온 몇백만원을 맡겼고,어떤 이는 퇴직금을 맡겼고,어떤 할머니는 수십년 모은 통장을 통째로 건넸을 것이다.그런 돈이 절반으로 줄었다.
손실이 절반을 넘어 “펀드 환매한 돈으로 빵 사먹겠다”고 말하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미래에셋은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었다.“철학에 따라 원칙대로 운용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물론 철학과 원칙을 이해못하는 투자자들을 탓할 수도 있다.하지만 은행 창구에 가서 “미래에셋 주세요”라고 말하며 꼬깃꼬깃한 쌈짓돈을 맡긴 할머니에게 철학과 원칙이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
이런 그들의 태도는 펀드가입자들이 소송을 내겠다고 밝히자 또한번 빛(?)을 발했다.몇몇 펀드가입자들이 소송에 나서겠다고 인터넷에 카페를 만들자 미래에셋은 그곳에 메일을 보냈다.
요지는 “고객의 이익을 최선으로 펀드를 운용하고 있다.인사이트펀드를 운용함에 있어서 법령,약관에 위반한 사항은 없다.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당사 관계인 개인의 사생활 침해 등의 민·형사상의 마찰이 생길 우려가 있으니 불필요한 민사소송 이외의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 달라”는 것이다.
이 글의 느낌은 고객이니 정중한 사과니 하는 것은 요식일뿐이었다.그 핵심은 소송하다가 미래에셋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유포하거나 하면 자신들도 소송으로 맞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인터넷카페 가입자들은 물론 이 소식을 접한 기자들의 느낌은 대충 비슷했던 것 같다.“협박이네”
굳이 미래에셋이 이런 협박성 메일을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카페 가입자들도 자신을 믿고 펀드에 가입한(또는 했던) 고객들이다.기업이 자신의 고객을 상대로 여차하면 소송하겠다는 말을 저렇게 공개적으로 할수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도대체 어찌된 것일까.국민을 상대로 싸우는 누구와 비슷한 수준이 되가고 있는 것을 정말 박현주는 모를까.
이런 회사가 수년간 한국 자산운용시장에서 최고의 회사로 군림해왔다.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 하나 더.
지금은 미래에셋만 줘 터지고 있지만 실은 다른 자산운용사들도 수익률은 마찬가지 일듯하다.
미래에셋에서 고객들이 빠져나가도 갈데가 없는 이유는 다른 회사들이 그만한 믿음을 주지못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들도 비슷하기 때문이다.입으로는 고객,고객 떠들지만 속마음은 고객들의 수수료에 가 있기 때문이다.
고객의 자산증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객이 내는 수수료이며 이를 통해 나오는 월급과 인센티브다.또 승진도 있겠지.한 자산운용사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내부에서 운용하는 거 보면 도저히 펀드가입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말 다한 것 아닌가.
미래에셋은 그 뻔뻔스런 철학(중국에는 오늘도 도로가 깔리고,집이 지어지고 있다는)이라도 있다고 우겨대지만 다른 운용사들은 내세울게 뭐가 있을까.대형 자산운용사들이 기껏 한 일은 미래에셋 따라하기 아니었을까.
고객을 향한 투자철학을 갖춘 한국의 뱅가드는 언제쯤 투자자들 앞에 나타날수 있을까.배고픈 일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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