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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고향인 전남 장흥에 다녀왔습니다. 큰어머니는 1911년생이니까 한국 나이로 99세입니다. 장수하셨죠. 18년 동안 누워서만 생활하셨으니 노후엔 힘드셨을 겁니다. 71살 사촌형이 큰어머니 모시고 단 둘이 살았습니다. 사촌형은 청년 때 오른팔이 잘렸고 농사 지으며 삽니다.
여느 장례식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운구차가 읍내 장례식장을 떠날 때도, 마을 앞에서 노제를 지낼 때도, 뒷산 선영에 도착해 하관할 때도 아무도 울지 않았습니다. 70살 안팎인 세 사촌누나들도 울지 않았고 며느리들도 울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고사리 꺾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장사(葬事)는 마을 사람들이 했습니다. 봉분 쌓고 잔디 입히는 일을 능수능란하게 하더군요. “자네가 45년생이제?” “내가 왜 45생이여, 43년생이제.” 막걸리를 들이키면서 60대 어른들이 떠들썩하게 나이를 따집니다. 도회지에서 온 친구가 젊게 보였던가 봅니다. 그놈의 ‘민쯩까기’는 어른이나 애나 똑같으니….
큰집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방앗간을 했습니다. 사촌형은 방앗간에서 일하다가 로프에 오른팔이 감겨 잘리고 말았습니다. 이 바람에 큰아버지는 화병에 중풍까지 겹쳐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사촌형은 느즈막히 결혼했지만 형수가 가출한 바람에 70대 할아버지가 된 지금까지 큰어머니랑 둘이 살았습니다.
큰어머니는 장독간에서 넘어진 후 18년 동안 누워서 지냈습니다. 외팔이 사촌형이 대소변 받아내고 수발을 했습니다. 저는 사촌형이 싫은 내색을 하거나 화 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소문으로는 딱 한 차례, 마을 사람이 “자네 어머니 그만 돌아가셔야 할 텐데”라고 말했을 때 버럭 화를 냈다고 합니다.
사촌형은 과수원 농사로 생계를 꾸립니다. 집 주위에 빙 둘러 감나무를 심었습니다. 추석 때 큰집에 가면 사촌형이 단감을 한 바구니 따서 차에 실어주곤 합니다. 사촌형은 기계 다루는 솜씨가 최고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농기계나 보일러가 고장나면 무조건 사촌형한테 달려오고 형은 공짜로 고쳐줍니다.
사촌형은 효행상도 숱하게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까짓 종이조각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저의 마을 이름은 효자리입니다. 옛날에 안(安)씨 성의 효자가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고 해서 효자리라고 부릅니다. 마을 입구에는 이분을 기리는 비석이 있죠. 그 효자가 사촌형으로 환생했는지도 모릅니다.
큰어머니 모신 곳은 마을에서 2~3㎞쯤 떨어진 산골짜기 입구입니다. 인근에 제각(祭閣)을 겸한 민가가 한 채 있고 저수지도 있습니다. 쏘로우가 월든 호숫가에 지은 오두막집을 연상케 합니다. 간간이 꿩 우는 소리만 들릴 뿐 조용합니다. 산 아래 밭에는 자운영이 무성하더군요. 사진 덧붙입니다. 감사합니다. <광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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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효자이시자,,.'천사'이신 외팔이 사촌형님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영면하신 99세 큰어머님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호상이건 아니건, 효자이건 아니건 가까운 분이 곁을 떠났다는 것은 매우 마음아픈 일인 것 같습니다.
저 또한 큰 어머님의 명복을 기원하며 삼가조의를 표합니다.
간만에 글 읽다가 울컥 했습니다.
큰어머님의 명복과 선배를 비롯한 가족분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