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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벼루                          구양수

흙벽돌이나 기와가 하찮은 물건이지만
붓과 먹 함께 문구로도 쓰였다네
물건에는 제각기 그 쓰임이 있나니
밉고 곱고를 따지지 않는다네
금이 어찌 보물이 아니며
옥이 어찌 단단하지 않으랴만
먹을 가는 데에는
기와조각만 못하다네
그러니 비록 천한 물건이라도
꼭 필요할 땐 값을 견주기 어려운 줄 알겠네
어찌 기와조각만 그렇겠는가
사람 쓰는 일 옛날부터 어려웠더라네.


古瓦硯(구양수)

磚瓦賤微物, 得厠筆墨間. 于物用有宜, 不計醜與姸.
전와천미물 득치필묵간 우물용유의 불계추여연
金非不爲寶, 玉豈不爲堅. 用之以發墨, 不及瓦礫頑.
금비불위보 옥개불위견 용지이발묵 불급와력완
乃知物雖賤, 當用價難攀. 豈惟瓦礫爾, 用人從古難.
내지물수천 당용가난반 개유와력이 용인종고난


결국 사람이다

구양수는 가난해서 어머니가 모래 위에 갈대로 써준 글씨로 공부했지만 당대 최고 시인이 됐다. 낡은 벼루도 먹을 가는 데에는 탁월하다는 그의 시처럼 뛰어난 경영자는 사람과 사물의 쓰임새를 알아보는 안목을 갖춰야 한다.

북송 황제 휘종이 어느날 화가들에게 '어지러운 산이 옛 절을 감추었다'는 주제를 주면서 감춰진 절을 제대로 표현하라고 주문했다. 모두들 골머리를 앓다가 작은 절을 희미하게 그려 놓았는데 유독 한 사람만 절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깊은 산 속 계곡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스님을 그려놓았다. 휘종은 그에게 1등상을 줬다.

인재를 찾는 노력도 마찬가지.15세기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이 그냥 관노로 일생을 마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눈 밝은 임금 세종은 장영실의 비상한 능력을 알아보고 종6품 상의원 별좌에 그를 임명했다. 세종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으로 그는 최첨단 물시계를 발명할 수 있었다. 측우기와 해시계 등 세계를 놀라게 한 성과도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세종의 혜안 덕분이었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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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보는 달                         왕양명

산이 가깝고 달이 먼지라 달이 작게 느껴져
사람들은 산이 달보다 크다 말하네
만일 하늘처럼 큰 눈 가진 이가 있다면
산이 작고 달이 더 큰 것을 볼 수 있을텐데.

蔽月山房詩(폐월산방시)

山近月遠覺月小,便道此山大於月.
산근월원각월소   편도차산대어월

若人有眼大如天,還見山小月更闊.
약인유안대여천   환견산소월경활

하늘처럼 큰 눈을 가진 사람

명나라 시인 왕양명(王陽明·본명은 수인)이 열한 살 때 지었다는 <폐월산방시(蔽月山房詩)>다. 어린 나이에 우주의 이치를 이처럼 명료하게 꿰뚫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세파에 시달리는 어른들에게는 보이지 않아도 해맑은 아이들의 눈에는 다 보이는 법.

용평 숲에서 사흘을 보낸 적이 있다. 발왕산 정상에 올랐더니 전망대 안의 식당 벽에 수백 장의 편지가 매달려 있었다. 아무개 왔다 간다는 메모부터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문구까지 갖가지 ‘말씀’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쯤 되는 아이의 ‘고해’였다. ‘아빠 그동안 말 안드러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 녀석은 어떻게 알았을까. 높은 곳에 오르면 누구나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것을.

산에서는 모두가 겸손해진다. 자연의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날 밤 발왕산 이마에 걸린 달은 유난히 커 보였다. 늘 거기 있는 산이지만 그 속에 들어 자신을 돌아보면 큰 잘못이 없어도 ‘죄송’해지는 이치와 닮았다.

과학자들은 달이 하늘 높이 떠 있을 때보다 지평선 가까이에 있을 때 더 커 보인다고 한다. ‘달 착시’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발왕산에서 본 달도 착시현상 때문에 그랬을까. 그것은 낮에 본 꼬마녀석의‘고해성사’처럼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나를 비춰주는 우주의 반사경이었다.

육체적인 ‘뇌의 인식작용’은 종종 착시현상을 불러온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감성작용’은 우리 영혼의 촉수를 건드려준다. 세상의 높낮이와 내면의 크기를 스스로 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세상이 복잡할수록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慧眼)이 더욱 필요하다. ‘산이 작고 달이 더 큰 것’을 볼 줄아는 ‘하늘처럼 큰 눈 가진 이’가 가장 눈 밝은 사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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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오라기                                         노동

옥으로 다듬었나 백로 한 마리
물고기 잡으려고 마음 조이며
물가 모래밭에 발 쫑긋 세우고 때를 기다리는데
사람들은 영문 모르고 그 모습 한가롭다 말하네.

白鷺絲
      鳥(백로사)

刻成片玉白鷺絲
                  鳥,欲捉纖鱗心自急.
각성편옥백로사   욕착섬린심자급

翹足沙頭不得時,傍人不知謂閑立.
교족사두부득시   방인부지위한립

때를 기다려라,그리고 집중하라

겉보기에는 한가로운 것 같아도 백로는 숨을 죽인 채 최대한 집중하고 있다. 물고기를 정확하게 사냥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당나라 시인 노동(盧仝)은 세상 사람들에게 '물가 모래밭의 백로 한 마리'가 매순간 얼마나 집중해서 한 생을 사는지를 일깨워준다.

무슨 일이든'때'를 잘 맞춰야 한다. 그 '때'가 우연히 찾아올 수도 있지만,대부분은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보다 '그래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통일 스페인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사벨 1세 여왕은 어릴 때 궁에서 쫓겨날 정도로 고난의 시기를 보냈지만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로 통일 왕국의 꿈을 이뤘다. 게다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다릴 줄 몰랐다면 신대륙은 못 찾았다' 그의 말처럼 콜럼버스가 약속한 황금을 가지고 오지 못했을 때도 주위의 문책 요구를 물리치고 다시 기회를 주었다. 그 덕분에 스페인의 황금시대를 활짝 열 수 있었다.

그가 공주로 태어나 '옥으로 다듬은 백로'처럼 고상하게만 살았다면 스페인의 전성기를 일궈낼 수 있었을까. 불우한 어린 시절과 수많은 정적 때문에 날마다 '마음 조이며/ 물가 모래밭에 발 쫑긋
세우고 때를 기다린'시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정적인 타이밍은 늘 그 순간을 기다리며 준비해온 사람에게만 보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