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Julio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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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나의 것 [나의 삶 바라보기]

내가 고등학생 아니면 막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 인기가수 중에 혜경씨가 있었다.

그 당시는 노래를 잘 해야만(?) 가수가 되었던 시절이었으니 노래는 당연히 잘 했고

약간은 독특하다 싶은 음색으로 많은 고정 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대학 2학년 어느 봄 날의 늦은 아침,

부평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인천을 가던 중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그대를 만날

때면 이렇게 포근한데,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사랑을 어쩌면 좋아요~ 하고 시작하는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를 무심코 듣다가 우연히 피곤에 지쳐 물끄러미 창 밖을

바라보는 앳된 차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은 예쁘장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엄청 뛰어난 미모라고는 할 수 없었는데 그래도

뭔가 홀린 듯 한 동안 내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아마도 봄 날의 나른했던 늦은 아침,

승객도 별로 없는 버스 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노랫소리가 서로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 어떤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결국은 한 마디 말도 못 붙일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차장의 옆 모습을 보는 듯 보지 않는

듯하며 종점까지 따라갔던 기억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민혜경씨의 다른 히트 곡 중에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가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젊은 시절 괜히 마음이 끌리고 고개를 주억거리게 했던 노랫말이다.

신흥 명문 고등학교의 명예(?)인 서울대학교 진학률을 높인다고 고대 법대를 가겠다고

하는 같은 반 친구를 어르고 꼬드겨서 학과는 보지 않고 서울대에서 가장 경쟁률이 낮은

대학으로 밀어 넣는 담임 선생을 보면서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란 정말 맞는 말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던 경험도 있고.

 

군대 다녀오고 졸업하고 결혼하고 또한 사회생활의 해 수를 더해 가면서

직장에 점점 온순하게 길들여가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보고

아이는 태어나고 그 만큼 식구들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도 무게를 더해 가면서

 

내 손과 발이 하나씩 함부로 휘저을 수 없게 되고

고개마저 감히 옆으로 돌릴 수 없는 느낌이 가슴을 누르는 듯할 때에 이르러서...

내 인생은 나의 것?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 민주와 함께 참석하는 Economist 스터디 그룹을 인도하는 Violia는 한국인이지만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 미국, 프랑스, 우벡키스탄, 일본에서 자라난 Global Citizen으로

한국말이 서툰 편이다.

 

캐나다 로펌과 우리나라 외교통상부 FTA팀 인턴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고 올 하반기에는

옥스포드에서 석사입학 허가를 받은 실력파이지만 옥스포드에 진학해야 할 찌 말아야

할 찌 고민이 된다고 한다. 마치 자신이 사회에 첨벙 뛰어들 자신이 없어서 자꾸 우회하는

길 (가능한 오래 학교에 남는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같은 스터디 그룹 멤버 중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똑똑한 친구들만 모인다는 대학의 물리

학과를 졸업 후 미국 코넬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돌아와 남들이 인정해주는 모 회사

연구소의 경력직으로 입사가 확정된 젊은 이가 있다. 그런데 자신도 앞으로 10~12년 지나면

사오정에 걸려서 회사에서 밀려 나게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입사도 하기 전에 하는 그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환경이 참 어려워졌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아무런 걱정 없이 패기있게 일 할 젊은 이들이 사회에서 혹시 경험하게 될

찌도 모를 좌절을 벌써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앞으로는 Specialist만이 살아 남는 세상이 될 것같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그의 책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지금과 같이 Globalized된 세계에서는

Untouchable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주장했듯이.

 

직장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생존권하고 연관되어 있는 문제다.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사항

(우리 가족을 위해서 직장생활은 꼭 해야 한다는)의 결정권을 남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간 갑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결정권을 남에게 넘기지 말고 자신이 쥐고 있어야 한다.

남들이 감히 넘겨볼 수 없는 어느 한 분야의 Untouchable이 되어서...

 

그러지 못하면 인생이 40~50을 바라보기 전에

내 인생은 남의 것!하고 노래 부르게 될 테니까.  

 

 

2008 7 25

posted at 2008/07/25 01:07:00 트랙백(0) | 댓글(0) | 스크랩
슬픔을 날려버린 유머 한마디 [나의 삶 바라보기]

부모님께서는 6층짜리 저층 아파트의 맨 꼭대기층에 사신다. 그래서 택배 아저씨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오면 힘들어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한다. 택배업을 하는 사촌

동생이 “형네는 택배 기사가 물건배달하면 꼭 감사하다 인사하고 음료수라도 한잔

대접해야한다“고 점잖게 충고하고는 했다. 


아버지는 옥상에 화단을 만드셔서 고추나 토마토 심어 가꾸시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6층을 오르내리는 것을 걱정하시면서도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겠다는 말씀을 꺼내지 않으셨다.

 

여름저녁 6층 아파트에서 옥상으로 연결한 호스로 더위에 축 늘어진 고추와 토마토에

시원한 물을 뿌려 주시면서 흐뭇하게 바라보시고는 했다.  작년 몸 깊숙이 박힌 몹쓸

병과 힘겹게 싸워가며 치료를 받으시던 중에도 가을 고추 농사를 다 거두어들이시고

거름을 마련해서 올 해를 위해 개토까지 이미 마쳐두셨다.

 

                                          <아버지의 고추밭>

 

그렇지만 올 해는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시게 되었다. 지난 2월 마지막 날에 하늘

나라로 떠나가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나 그리고 여동생이 편안하게 눈을 감으시는

아버지의 임종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어머니께는 장남인 나와 함께 브라질로 가시자는 말씀을

조심스럽게 드렸지만 어머니는 그냥 이곳에 계시겠다는 입장을 고집하셨다. 이모님과

주변의 가까운 친구 분들이 가시지 말라고 회유(?)와 압력을 행사하신 모양이다.


워낙 두 분의 금슬이 좋으셨음을 아는 나로서는 아버지 돌아가신 것에 대한 상심이 크실

어머님을 혼자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울 것 같아서 장례를 치루는 기간 중에도 몇 번

다시 이야기 해보았지만 '여동생 가족이 함께 살면 되니까 지금은 걱정 하지 말고 나중에

내가 거동이 힘드실 때나 함께 살자‘고 하신다. 마음이 이미 굳어지신 상태였다. 결국

나의 염려는 어떻게 하면 어머님께서 상실감으로부터 빨리 회복하실 수 있을 것인가로

옮겨지게 되었다.


사실 장남인 내가 94년 이후로는 계속 외국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버님 마지막 보내

드리는 장례식장이 너무 썰렁하면 어쩌나 하고 염려가 없지 않았는데 예상했던 것 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와 위로해주고 조문해주어서 아름답게 잘 마칠 수 있었다.


장례식 마지막 날 아버지 화장절차를 마치고 납골당으로 모시는데 하필이면 납골함이

가장 꼭대기에 위치했다. 중간정도에 위치하면 훨씬 좋았을 것을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지만 순서에 의해 차례대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그 자리에서 슬픔에 잠기신 어머님을 옆에서 부축하시던 아버지의 이종사촌 되시는

서부동 고모께서 “아니 이 양반은 살아서 꼭대기층에 살더니 돌아가셔도 또 꼭대기층이네.”

하며 우스개 소리를 하셨다. 어머님의 슬픔을 덜어주시기 위한 유머였음을 우리 모두는

알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님께서 가볍게 웃으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있는 표현

이라고 여기셨던지 그 이후로는 슬픈 표정이 눈에 띄게 덜어지셨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어머니께 전화하시고 또 찾아오셔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시면서

상실로부터의 회복을 도와주어서 이제는 거의 털어내신 것 같아 보이신다. 많은 분들의 도움

으로 이제 며칠 후면 다시 브라질로 떠나야 하는 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 같다.


2008년 3월 16일


posted at 2008/03/16 17:12:00 트랙백(0) | 댓글(4) | 스크랩
삶과 죽음 [나의 삶 바라보기]

어려서 밤중에 손톱이나 발톱을 깍으면 아버지로부터 심하게 한 소리를 듣고는 했다.

밥 숫가락을 꽂아놓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고르다가 된 통 혼난 적도 있다. 그러면서 점차

죽음은 나에게 뭔지 모르게 두려운 그 무엇으로 자리잡아갔다.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

셨던 모양이다.

 

이번 주 친구와 약속된 7층 식당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4층은 F라고 표시 되어있는

것을 보면서 역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는 두려운 그 무엇인가 보다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일상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것과 자주 맞부딪치게 되지만 그럴 때

마다 무덤덤한 체하며 애써 그 실체를 외면하려 할 뿐이다.  

 

지금 나는 아버지께서 준비하시는 그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 보야 한다. 이제 두려움은

뛰어 넘으신 것 같고 아버지 원래의 성격대로 강단 있으신 모습으로 담담하게 준비하고

계시지만 체념의 모습이 섞여 투영될 때 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고는 한다.

 

내가 한국에 나온 가장 중요한 이유대로

아버지께서 이 세상 삶을 잘 마무리하시도록 도와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떨치시고 마음 편하고 그리고 홀가분하게 떠나시게 해드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앞서지 주저주저 하면서 선뜻 그렇게 하지 못하니 가슴만 답답해

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하시고 싶은 이야기, 부탁하고 싶은 것들을 편안하게 이야기 하실 수 있도록

깊은 대화로 이끌어 드려야 하는데 내 스스로 그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던 중 잘 아는 분으로부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안녕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있어라 라는 책을 소개받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네 명의 환자와 그 가족

들이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인데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귀한 글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많이 눈물 흘리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다.

나도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죽음에 대해 정리해볼 수 있는 이 시간에 감사하면서

 

그 책에서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42세에 세상을 떠난 베스라는 여인이 죽음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건,

뜨거운 태양을 너무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마침내 서늘하고 어두운 방안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안도감 같은 것이 아닐까요? 하고

 

죽음을 가까이서 바라본 사람이 아니면 남길 수 없는 뛰어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에 나오기 전 나는 심한 두려움에

쌓여 있었으리라고.

 

과연 바깥세상은 어떤 곳일까?

지금 이곳이 나에게는 너무 따듯하고 편안한데 그냥 이곳에 남아있고 싶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어떤 사람들과 만나게 될까?

나는 어떤 상황, 어떤 환경을 대면하게 되나?하고

 

우리에게 죽음이란 이와 비슷한 경험이 아닐까?

때가 되어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왔던 것 처럼 과연 우리 앞에 어떠한 환경이 펼쳐

질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떠나는 여행

 

 

2008 1 26

posted at 2008/01/26 15:53:00 트랙백(0) | 댓글(0) |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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