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8일 뉴욕필하모닉의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 시작 8분 전.공연을 뉴욕필의 단원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음을 조율하기 시작했다.이 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뉴욕필의 몇몇 연주자들이 갑자기 무대 아래로 내려와서 새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
 사람들은 웅성거렸지만 곧이어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뜨렸다.하얀 옷의 주인공이 바로 유명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김이었기 때문이다.앙드레김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이긴 하다.하지만 그보다 그의 독특한 패션스타일이 연주자들을 과감하게 무대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는 짐작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앙드레김은 뉴욕필의 공연 뿐 아니라 웬만큼 유명한 공연장에서는 꼭 모습을 드러낸다.봉긋 부푼 어깨 소매와 S라인이 강조된 허리선,승마 바지를 연상케하는 옷을 입고 도도히 나타난다.좌석도 반드시 맨 앞줄의 정중앙에 앉는다.때로는 함께 일하는 쭉쭉빵빵한 모델들을 대동하고 나타나기도 한다.그럴 때 사람들은 공연보다 앙드레김을 쳐다보기에 정신이 없다.
 그가 나타나면 공연제작사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다.오히려 반갑다.그로 인한 공연 홍보 효과가 쏠쏠하기 때문이다.관객들은 자신들이 찍은 앙드레김의 사진을 공연 제목과 함께 블로그에 올리기에 바쁘고,공연 홍보는 자연스레 입소문을 탈 수 있다.앙드레김으로 인한 티켓 수익도 무시할 수 없다.가장 좋은 좌석을 적게는 5석에서 많게는 20석 가까이 구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앙드레김은 이런 값비싼 관람권들을 공연 때마다 사들일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인물은 아니다.1962년부터 디자이너 생활을 시작했지만 자신의 건물에서 의상실을 운영하게 된 건 2000년 들어서다.벌어들이는 돈만큼 패션쇼에 쏟아붓는 액수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클래식,뮤지컬,연극 등 장르 구분없이 공연장을 찾기 시작한 지가 수십년이 됐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앙드레김도 남들보다 일찍 삶의 질적 수준을 염두에 둔 것을 알 수 있다.게다가 20~30대 여성이 객석의 80%를 차지하는 한국 공연 문화의 현실에서 70대에 접어든 앙드레김의 공연장 나들이는 드문 경우일 수밖에 없다.
 지난달 일본에 공연 투어를 온 영국 BBC필 하모닉의 지휘자 자난드레아 노세다를 인터뷰하기 오사카에 들른 적이 있다.인터뷰가 끝난 뒤 BBC필의 공연을 보기 위해 콘서트장을 들어서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우리나라와 달리 공연장을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60대를 훌쩍 넘은 노인들이었기 때문이다.이들에게 공연 관람은 이미 연령에 상관없이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1980년대 한국 사람들은 집에 TV를 사들이기 바빴고,1990년대에는 승용차를 마련하기에 전념했다.집집마다 냉장고와 에어컨도 갖추고 있다.국민소득 2만불이 넘은 지금 시점에선,세끼 식사를 여섯끼로 늘릴 수도 없는 일이다.경제 성장의 한 축인 내수 소비도 이젠 ‘양’보다 ‘질’에 눈을 돌려야할 시기인 것.여기서 말하는 ‘질’에는 삶의 풍성하게 만드는 문화 생활도 상당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결국 2만불 시대 경제 성장의 답은 앙드레김이 쥐고 있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