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능
“무능한 자는 쫓아내도 된다”는 논리는 유럽에선 메로빙(메로빙거)왕조가 몰락한 뒤 등장했다.
유럽대륙에서 로마제국의 뒤를 이어 등장한 메로빙 왕조는 바로 ‘메로빙’이라는 왕조의 이름 외에는 사람들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거의 없다.(오늘날 유럽인들도 자신들의 국가의 시원으로 메로빙 왕조를 떠올리진 않는다고 한다. 대부분의 후손들에게 그들은 버려진 조상들인 것이다.)보통 카롤링(카롤링거)왕조가 뒤를 이었다는 사실 정도만 언급되는 이 왕조의 마지막 왕들은 ‘게으름뱅이’라는 별명들을 지니고 있다. 또 “촌스런 달구지를 타고 다니거나”, “바지를 거꾸로 입고”, “사냥터에서 겁에 질려 토끼에게 쫓기는" 어설픈 모습으로 묘사된다. 중세사의 대가인 브라이언 타이어니와 시드니 페인터가 "메로빙조 왕들은 대개 감상적인 퇴행성 환자로 묘사된다"고 지적할 정도다. 이같은 부정적 기록 속에서 분명한 점은 메로빙조 후기에 왕들이 단명하면서 나이 어린 왕들이 연이어 즉위해 실권을 잃어갔다는 것.

<메로빙왕조 킬데리크1세의 초상이 그려진 동전>
하지만 다른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메로빙왕조 후기 왕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일종의 상식으로 굳어졌다.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들에 대해 "위대한 전사로 메로빙거 왕조를 개창한 클로비스의 후손들은 모두 전사의 기질을 상실한 채, 아무런 권력도 보유하지 못한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고,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 무덤에 묻혔다"고 평했다. 메로빙 왕조의 마지막 왕들이 한 일이라곤 "콩피에뉴 근처 한 시골궁정에서 매년 3월이나 5월에 황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나와 프랑크인들의 회의 장소로 안내된 뒤 외국 사절을 접견하고 궁재가 한일들을 승인하는 것"으로 전해진 것이다.
이같은 메로빙조 마지막 왕들에 대한 이미지는 (카롤링 왕조 시기) 샤를마뉴의 전기작가였던 아인하르트의 묘사를 그 기원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아인하르트는 ‘위대한 왕’ 샤를마뉴의 일대기를 메로빙거 왕들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한다. 현직을 띄우기 위해 전직을 깔아내리는 풍토는 그때나 오늘날이나 비슷해서인지, 아인하르트의 저서에서 메로빙 왕조의 마지막 왕들은 하찮은 존재로 묘사된다.
아인하르트는 메로빙 왕조의 킬데리크3세가 퇴위하기 오래전부터 유명무실한 존재로 왕의 명칭만 지닐 뿐 할일이라고는 "머리카락과 턱수염을 흩날리며 왕좌에 앉아있는 것"이었다고 서술한다. 왕이 이동할 때는 "언제나 멍에를 맨 황소들이 끌고, 소치는 자가 모는 촌스런운 달구지를 타고 다녔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이런 이미지는 카롤링조에 호의적인 다른 역사가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돼 갔다. 샤를 마르텔의 이복동생 킬데브란드 伯이 재정비한 ‘프랑크인들의 역사서(Liber Historiae Francorum)'에는 무기력한 킬데리크3세의 아버지 킬데리크2세가 "지나치게 경솔한데다 경박하고, 그가 일으킨 추문으로 인해 받은 경멸 때문에 프랑크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고 평하고 있다. 폭군이나 독재자 라기 보다는 경멸이나 조소를 자아내는 이미지가 투사된 것이다.
이처럼 메로빙 왕조의 마지막 왕들을 경박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카롤링 왕조의 왕들을 "온화하고 자비를 배풀었다"거나 "명민한 사령관"이라고 묘사하는 것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고 패트릭 기어리 교수는 설명한다.
바로 카롤링 왕조의 정당성을 찾는 방법으로 "메로빙 왕조가 폭정과 악행, 불의, 부도덕 때문에 폐위된 게 아니라 단순히 무능했기 때문에 폐위됐다"는 논리를 선보인 것이다. 왕을 평가하는 데 ‘정당한 왕과 폭군’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외에 새로운 범주인 ‘무능한 왕(rex inutilis)’라는 범주가 추가됐다는 분석인 셈. 이에 따라 메로빙 왕조의 왕들은 그나마 (전통적인 관념에선) 수용할 만 했던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개념인 무능한 왕들의 전형이 되서 경멸의 대상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됐다.
결국 이같은 고정관념은 수천년을 지난 오늘날에도 이어져 현대의 프랑스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까지 메로빙조의 군주중 마지막으로 실권을 쥐고 있었던 다고베르트가 바지를 거꾸로 입고, 사냥터에서 토끼에게 쫓기는 어리석고 무능한 겁많은 왕으로 오늘날에도 그려진다고 한다.
이처럼 카롤링 왕조의 역사가들은 무능한 전왕조를 유능한 현왕조가 대체했다는 이데올로기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지만, 역설적으로 이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바로 신생 카롤링 왕조의 왕이 전임 메로빙 왕조의 왕을 폐위해 수도원에 보낸 뒤 새왕으로 선출됐다면, 카롤링 왕조의 왕들이라고 폐위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세기도 지나지 않아 카롤링 왕조 루이 경건왕(샤를마뉴의 아들이다.)이 무능하다며 폐위되는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이어 10세기경에 카롤링 왕조는 독일지역에선 작센가문에게, 프랑스 지역에선 카페가문에게 대체돼 각각 작센왕조, 카페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이들 후속 왕조들이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한 논리는 바로 카롤링 왕조가 사용했던 ‘무능한자를 대체한다’는 이데올로기였다. 결국 후기 카롤링거왕들 역시 게으름뱅이로 여겨졌고 그에 따라 왕조가 교체되는 게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카롤링거 이데올로그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이런 전통은 꾸준히 이어져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선 17-18세기까지 폭군뿐 아니라 무능한 왕도 쫓아내야 한다는 전통이 유지됐다고 한다. 단지 18세기말에 변형된 것이 있다면 “지독히도 무능력한 게으름뱅이”라는 선고를 받은 루이16세가 수도원이 아닌 단두대로 보내졌다는 점이 있긴 하지만.
결국 역사는 돌고 돈 것이고,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름 인과응보의 형태를 띤 채 이어졌다. 어떤 조직의 리더든 간에 물러난 뒤 좋은 평을 들으려면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모양이다. 싫든 좋든 간에 역사의 평가는 실적과 결과에 영향을 받는 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참고한 책>
패트릭 기어리, 메로빙거 세계-한 뿌리에서 나온 프랑스와 독일, 이종경 옮김, 지식의 풍경 2002
브라이언 타이어니· 시드니 페인터, 서양 중세사-유럽의 형성과 발전, 이연규 옮김, 집문당 1995
|
오늘 말복도 즐겁게 보내세요~
제가 미궁속에 빠진 세계사 100대 음모론이란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다이애너비가 메로빙거 왕조 후손인데 예수남 후손이 이교도인 이슬람을 믿는 파예드랑
결혼하려고 해서 일부러 암살을 했다는 주장이 써 있더라구요
그란데 그왕조가 사실은 비웃음을 사는 가문이었다니 ~~;;
특히 정권성립의 명분이 약하면 약할수록 전 정권을 깍아내리기 바쁘지 않았나 합니다.
외세를 끌어와 백제를 친 신라가 한평생 전쟁터에서 살던 의자왕을 삼천궁녀나 끼고 살던 무능한 파락호로 만들고 무력으로 세대교체기를 틈타 조선을 점령한 일본이 조선을 당파싸움에 망한 무능한 이씨조선이라 비하하며 깍아 내리기 바쁜것도 같은 맥락이겠죠.
헌데... 불현듯 747과 이달말 주가3천 이해 말 주가 5000천이 생각나는건 왜인지.....
당시 전쟁에서 성을 뺏어야 후방이 안정되고 보급이 원활하게 되어 성을 뺏는데 주력하였는데 그 기간이 길었답니다.
그래서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군세를 나눠 주둔시켰다 한곳에 집중하는 전략을 구사 하였는데 의외로 신라가 전격전을 펼쳐 사비성으로 바로 밀고 들어오기에 의자왕은 급히 피난가고 대신 계백장군이 시간벌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게 성공하여 나당 연합군이 보급문제와 외곽의 백제군사들에게 전략적으로 포위되어 위기에 몰릴수 있어 철군 하려던 시점에 피신했던 호족의 장이 불만을 품고 의자왕을 체포해 항복하여 구심점을 잃은 백제가 멸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위 내용대로라면 신라는 결코 혼자 백제를 상대할 능력이 안되므로 타국(당시 고구려가 되었던 일본이 되었던)의 도움을 받아 그것도 운 좋게 이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티비가 증명되지 않은 학설들을 흥미위주로 내기에 저도 긴가민가 하긴 합니다. 허나 신라가 당의 도움을 받았던 만큼 이 정도면 외세의 힘을 얻어 백제를 쳤다고 할 수 있지 않을 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