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부 김동욱 기자입니다. 개인적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기자는 하루하루 역사를 쓰는 직업이라 매력이 더욱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관심가는 주제별로 역사관련 글들을 올립니다. 평소에 쓰는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어보이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위와 풀의 역사라 부를수도 있을 것 같은데,그동안 읽은 역사서의 인상적인 내용들을 정리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설픈 글이지만 관심있는 독자님들과 의견 나누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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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이념’없이 성공한 첫 혁명-이념 [테마별 ]
이념

 

 프랑스 대혁명,1848년 혁명 그리고 러시아혁명에는 있고 1989년 동유럽 벨벳혁명에는 없는 것은 무엇일까?

 1989년 5월. 헝가리와 동독 국경간 가시철망이 절단되자 동독의 독재체제에 염증을 느낀 동독인들의 탈출이 줄을 이었다.9월 헝가리 당국은 ‘헝가리로 넘어온 동독인들이 외국으로 갈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결정했고, 동독을 탈출하는 행렬은 조그만 물방울이 삽시간에 홍수로 변하듯 급증했다.‘제2의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 불린 이 동독탈출 행렬은 첫 3일 동안 1만5000명에 달했고,10월까지 총 5만명이 국경을 넘었다.10월초부터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수천명 단위로 시작된 군중 시위는 10월 9일에는 7만명이나 참석한 수준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동독정부는 무력진압 가능성마져 포기했다. 이어 시위대 규모는 7만에서 14만으로 다시 30만,50만으로 불었다.동독 정부의 정국 장악력은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10월 18일에는 동독 공산당서기장이었던 호네커가 실각하기에 이른다. 결국 동독 정치국은 11월 8일 대대적으로 개편되고 11월 9일에는 ‘철의 장막’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된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을 때와 20년후인 2009년의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독일통일과 현실 사회주의 붕괴로 이어진 ‘1989년 혁명’이 발생한지 어느덧 20년이 지났다.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단기 20세기의 마지막으로 규정한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1989년 혁명은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인 것은 분명하다.그렇다면 1989년 혁명은 어떤 의미,특징이 있는 것일까.

 독일 사회사의 대가 위르겐 코카에 따르면 1989년 혁명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과 달리 새로운 유토피아적 이념을 따르지 않았다는 데 특징이 있다.1989년의 대변혁은 기존의 경제, 사회, 헌법 질서의 대한 대안적 비전을 동반한 것이 아니었다. 혁명에 앞서 등장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비전 역시 구체적인 내용을 담지하지 못한 창백하고 모호한 것이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전체적으로 1989년 혁명은 시민사회의 근본 원칙과 대의제적이고 법치국가적인 헌정국가적 정부 형태를 추구하는 민주와 자유의 이념을 쫓았지만 무엇인가 새로운 미래비전을 제시했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루이스 네이미어가 “혁명은 적어도 불만만큼이나 희망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했듯 1989년 혁명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발발했다는 시각이다.티모시 가턴 애쉬는 “1989년 동유럽 국가에서 대중의 저항을 촉발했던 것은 경제적 압박이 아니라 정치적 희망이었다”고 단언한다. 지방 곳곳에 퍼져있던 독재정부의 정치기관들이 대중의 희망을 꺽어버리려고 동원했던 강압에 대한 분노가 이런 희망에 결합했다는 것. 랄프 다렌도르프 역시 “시민사회와 시민의 자유란 목표를 향해 나아간 것이지 위험을 피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며 1989년 혁명의 의미를 부여한다. 1989년 혁명도 1848년 혁명과 마찬가지로 지식인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이런 시각에선 강조하고 있다. 극작가 바츨라프 하펠과 중세역사가 브로니슬로브 게레멕, 화가 베르벨 볼라이, 지휘자 쿠르트 마주르, 철학자 야노스 키스, 기계공학자 페트르 로만, 시인 미르치아 디네스쿠 등의 이름과 함께.

 그렇지만 이런 정치적 희망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과거의 혁명과 같은 무엇인가 딱 떨어지는 구체적인 이념이 없었다는 점만은 분명한 듯 하다.머리가 없는 혁명이란 말은 듣기에 거북할 수는 있지만,실제 1989년 혁명은 그다지 머리가 큰 혁명이 아니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듯 하다.

 그렇다면 이 1989년 혁명이 가져온 변화는 어떤 것일까. 코카는 이 혁명덕에 중동부 유럽의 각 민족들은 자신의 과거를 외면하던 오랜시간을 뒤로 하고,자기 나라의 역사를 진실되게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고 평한다. 소련은 혁명을 계기로 스탈린주의와 분명하게 단절됐고, 동독은 나치스 범죄를 자기 역사의 일부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설명이다.

 이런 시각에서 코카는 1989년 혁명의 궁극적인 의미는 그것이 중부 및 동부 유럽의 후진성을 성공적으로 만회해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이 과거에 이미 달성했었던 수준에 도달한다는 이른바 ‘만회혁명(Aufhol-Revolution)’이라고 바라본다.

 새로운 이념이 없었다는 점과 함께 1989년 혁명의 두드러진 특징으론 혁명의 평화적 성격이 꼽힌다.최고위층 정치가가 최단시간 내에 교체되고 근본적인 경제,사회,헌정,이념적 체제교체가 이뤄졌지만 그 과정은 대단히 평화적 이었다.동유럽 벨벳 혁명기간 동안 폭력은 차우세스쿠를 축출한 루마니아를 제외하고는 고전적인 혁명과 달리 두드러진 폭력이 동반되지 않았고 이후에 재현되지도 않았다.“바스티유의 감옥을 습격하면서 혁명을 시작한 사람들은 마침내 그들 자신의 바스티유를 짓고만다”는 역사가 아담 미슈니크의 발언을 무색하게 한 것이다.

 또 동유럽의 체제교체는 의회와 당 지도부 바깥의 대중 압력에 의해 강요됐지만 그 과정은 법적 절차와 당규상의 절차를 존중하는 가운데 진행됐다.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은 기존 구체제의 법을 무시했고,또 구지도층 인사들을 살해했지만 1989년 혁명에선 그같은 폭력성은 거세됐다. 동유럽 위성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후원이 결여된 상황에서 발생한 민중운동은 폭력과 탈법적 사태 없이도 신속한 변화가 가능할 만큼의 유연성을 보였다. 한마디로 1989년 혁명은 혁명가들의 피어린 승리도 아니었고, 쉬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낳지도 않은 ‘마일드한’ 혁명이었던 것이다.

 세번째 특징으론 1989년 혁명의 원인이 사회내부로 부터 왔다는 점이 꼽힌다.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중동부 유럽국가들 사회 내부에서 저항과 변화운동의 힘이 성장했고 여기에는 세대교체가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전쟁과 파시즘을 경험하지 못한 청년들에게 반파시즘과 종전이후 복구 업적을 근거로 체제를 정당화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주장은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여기에 TV등 전자매체의 시대가 도래하고 국제여행이 수월해진 시대를 맞아,서구체제가 동구권 생활 깊숙히까지 파고들면서 체제에 대한 의문은 커져만 갔다.엎친데 덮친 격으로 동유럽 블록의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정권의 붕괴는 빠르게 진행됐다.

 여기에 소련의 영향력 약화라는 외부요인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당시 유럽최후의 초국가적 헤게모니 국가였던 소련은 최종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대단히 약화된 상황이었다. 1980년대가 되면서 소련은 이전까지 위성국 정부들이 내적 정당성이 부족할때 체제를 유지시켜주는 대안이었던 군사력 제공을 포기하게 된다.즉 1953년 동독에서,1956년 헝가리에서,1968년 체코에서,1981년 폴란드에서 행했던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

 소련이 지원을 중단하자 동유럽 국가들이 국민들 사이에 지지도 별반 없고 정당성도 충분히 지니지 못한 극히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즉 동유럽 혁명의 본질은 예기치 못하게 취약했던 정부가 예기치 못할 정도로 무기력하게 몰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1989년 혁명은 소련의 약화로 발생한 국제정치적 진공상태를 자율적으로 채운 것이라고 볼 수 있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1989년 혁명은 유럽의 통일을 촉진시켰고,또 혁명은 그 힘을 기존의 민족적 정체성에서 얻었고 역으로 국제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의 몰락과 동서로 갈린 적대적 진영이 붕괴하게 됐다.이 틈을 민족적 정체성과 민족국가적 정치가 재창 부상하고 나섰다.

 통일과정에서 독일 통일에 대한 서독인들의 환호는 동독보다 적었다. 서독은 정당성의 위기를 겪었던 것도 아니었고 동독처럼 사회 정치 경제적 회생을 위해 통일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서독인들은 통일을 위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했다.“분단(Teilung)은 사실상 할애(Teilen)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혁명직후 집권한 동독 수상 드 메지에는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독에서도 통일 때문에 지불할 희생에 대해서 사회적 불만과 항의가 나타날 조짐 역시 포착됐다.

 좀 장황하긴 하지만 동독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제1국면의 특징은 대량 탈출과 대중시위였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인해 현실사회주의 내에서도 동독과는 다른 긍정적인 모습이 가능하다는 것을 동독국민들은 느끼기 시작했다. 이어 동독의 헝가리 국경과 폴란드 국경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많은 동독인들이 대량탈출 사태로 동독정권에 불만을 표출했다. 특히 1989년 5월 헝가리에서 국경선의 가시철망을 절단하기 시작하자 동독인들의 탈출이 줄을 잇게됐다. 헝가리 당국은 9월초 이들 동독인들이 외국으로 떠날 수 있게 한다고 공식 결정했다. 그러자 동독탈출자 수는 크게 늘어 앞서 말한 것처럼 첫 3일동안 1만5000명이 국경을 넘었고 10월까지 총 5만명이 월경했다. 그들은 바르샤바와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을 점거하는 등 극적으로 탈출로를 찾아 나섰다.

 때를 맞춰 동독 내부에서도 개혁에 대한 거대한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했고,대규모 가두시위가 발생했다.9월 이후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에서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수십만명 규모의 시위가 생겼고, 동독정부는 폭력적 진압카드를 소련의 반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특히 동독을 긴급 방문했던 고르바초프가 동독을 떠났던 10월 9일 월요일 라이프치히에서 시위가 전환점이 됐다. 정례적으로 월요일 저녁마다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스 교회에선 평화기원 예배가 열렸는데 예배는 교회에 인접한 칼 맑스 광장에서 벌어진 소규모 시위로 이어지곤 했다. 처음 5000여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10월 2일엔 1만5000-2만명 수준으로 커졌고 이는 1953년 봉기 이래 동독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자발적인 시위였다.10월9일에는 시위 규모가 7만으로 커지면서 동독정부는 무력진압 가능성마져 포기했다.이 평화기원미사 참가자는 다시 14만으로 늘었고,30만,50만명으로 증가했다.


 초기 가두시위에 등장한 플래카드들은 “대량 탈출이 아닌 여행의 자유를”이나 “집회의 자유,결사의 자유” 같은 점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동독의 민주개혁과 삶의 질 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아직 독일 통일이나 사회주의 폐지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요구사항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중시위 자체가 엄청난 힘을 간직하고 있었고 동독 정부의 경직성 때문에 전혀 혁명적이지 않았던 초기의 항의운동은 체제를 파괴하는 힘으로 발전해 나갔다.결국 10월18일 호네커가 실각하고,후임자 에곤 크렌츠의 안정화 시도도 무너진 뒤 11월 8일 정치국의 개편과 11월 9일 베를린 장벽 개방 및 서구여행의 전면적 허용이 이뤄졌다.예상치 못한 대격변이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다.이때에는 라이프치히 시위자들이 자유를 요구하면 동독의 지배자 크렌츠는 새로운 여행법률을 발표하고,군중들이 여행자유를 외치면 헝가리와 국경을 다시 개방하는 식으로 계속 물러섰다.1989년 10월 열릴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며 대내외적으로 탄탄한 정권의 안정성을 과시하려 했던 데 비하면 불과 한두달 사이에 일어난 놀랄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일단 무너진 뒤 과거의 동독은 더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대중들은 동독정부와 그 하수인에 대해 증오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1990년 1월이 되면 동독정부 건물들이 습격당하기 시작했고, 89년 11월과 90년 1월 사이 시위대의 구호는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에서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로 극적으로 변해갔다. 동독 국가의 한구절이던‘독일,하나의 조국’을 외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통일에 대한 요구가 높아갔고,결국 동독 내부적인 혁명이 민족 통일운동으로 변해갔다.

 이런 양상은 당시 서독 정계가 유도한 것은 아니었다.서독 정계는 차라리 급변하는 사태에 놀랐다고 하는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10개항 선언을 발표하던 11월 28일만 해도 통일은 단지 머나먼 목표에 불과할 뿐이었다.하지만 동독 주민 다수가 통일을 원하며 압력을 행사하자 어느덧 머나먼 꿈은 현실로 다가왔다. 1989년 12월 초부터 서독정부는 신속한 통일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시작했고,이어 통일을 열정적으로 추진했다.논란을 빚은 것은 통일의 방식과 템포였지 통일의 여부가 아니었다.서독정부가 동독에 벌이는 협상방식,금융지원 여부,신속한 화폐통합 제안,통일후 미래에 대한 장밋빛 약속 등이 모두 동독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국제정치 무대에서 걸림돌이 적지 않았지만 독일로선 행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다.우선 독일 통일이 가능해지려면 분단의 원인이었던 냉전이 먼저 종식돼야만 했다.결과적으로 동유럽의 벨벳혁명은 소련 최고 지도부의 태도변화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당시 소련은 자국민들로부터 도전받는 동맹국 독재정부들을 위해 과거처럼 군사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했지만 과연 동유럽 지역의 지배권마저 내놓을지는 의문시됐었다.영국,프랑스 등도 서방 주변국들도 독일 통일에는 노골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하지만 서방국들은 소련이 통일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 주기만을 기다렸고,소련은 굳이 이 복잡한 정국에 악역을 떠맡으려 하지 않았다.

 이어 1990년 3월 18일 동독지역 총선이 치러져 서독을 모델로 하는 신속한 통일을 주장하는 정당들이 승리했고, 동독국민들은 자기국가에 반대표를 던지며 스스로 동독을 포기했다.

<극적으로 통일에 성공한 통일독일은 과연 어느길로 가고 있는 것일까?> 

곧 서독정부와 새로 등장한 드메지에가 이끄는 동독정부는 몇달에 걸쳐 두개의 주요 조약을 체결했다.하나는 통화와 경제,사회통일에 관한 조약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일조약이었다.두 조약은 동서독 의회에서 각각 3분의2 이상의 지지를 얻어 통과됐고 각각 1990년 7월1일과 10월3일부로 효력이 발생했다.통일은 서독헌법 23조에 따라 동독이 서독에 가입함으로써 이뤄졌다.통일은 기존의 서독체제를 새로운 동독지역으로 확대시키는 방식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과정에서 소련은 놀랍게도 통일 독일의 나토잔류와 서구편향을 허용했고,1945년의 유산이었던 4대 강국의 독일에 대한 유보적 권리도 폐기됐다.독일은 독일대로 군사력을 최대 37만명으로 축소키로 하고,핵무기 세균무기 화학무기의 포기를 재천명하며 소련과 주변국의 비위를 맞춰줬다.독일은 특히 동독주둔 러시아군이 철수 하는 대가로 소련에게 막대한 재정지원을 약속했다.나토도 소련에 선제공격을 포기한다고 천명했고 소련과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게 우호와 협력의 새시대를 제창했다.독일의 통일은 이웃들의 동의도 평화적으로 얻어낸 것이다.

 독일 통일 및 현실사회주의 붕괴 20주년을 맞이해 이를 정리하는 외신들이 자주 나오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시절, 한참 독일어를 열심히 배우던 때 생긴 일이라 당시에도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나름 관련 기사도 써야될 듯 해서 자료를 정리해 봤는데, 처음 기대와는 달리 대단히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이 된 듯 하다. 아직 사건을 자유롭게 보기엔 너무 가까이서 일어난 진행형인 일이기 때문일까 싶기도 하다.


<참고한 책>

위르겐 코카, 독일의 통일과 위기, 김학이 옮김, 아르케 1999

티머디 가턴 애쉬, 인민은 우리다- 1989년 동유럽 민주화 혁명, 최정호·정지영 옮김, 나남출판 1994

Ralf Dahrendorf, After 1989- Morals,Revolution and Civil Society, Macmillan 1997

Walter Laqueur, Europe in our Time- A History 1945-1992, Penguin 1992

A.J.Nicholls, The Bonn Republic- West German Democracy 1945-1990, Longman 1998

Mary Fulbrook, Anatomy of a Dictatorship- Inside the GDR 1949-1989,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Karl Dietrich Bracher, Die Krise Europas seit 1917, Propyläen Verlag 1992

Eric Hobsbawm, The Age of Extremes- A History of the World 1914-1991, Vintage 1996


독일통일, 1989년, 벨벳혁명, 이념, 동독, 고르바초프, 소련, 탈출
posted at 2009/10/16 00:36:00 댓글(2) l 트랙백(0) l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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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alos | 2009/10/16 12:19 | DEL | REPLY

ㅋㅋ..마이클 잭슨 후유증 때문인지, 매우 드라이한 글을 쓰셨군요..^^
빨리 아픔을 떨어버리기 바랍니다..하하하

근데 한 일본 평론가가 쿠르트 마주르를 대단한 기회주의자인 것처럼 묘사하더군요.
마주르는 동독 공산당원이었다가 체제가 무너질 즈음 너무 쉽게 전향하고 미국으로 떠났는데,
당원도 아니었던 케겔은 그리 가볍게 움직이지는 않았다고 하면서요.
자세한 정황을 모르니 판단은 유보해야겠네요..^^
동글기자 | 2009/10/16 12:47 | DEL

egalos님/ㅎㅎㅎ,,,한의학의 대가 egalos님처럼 글을 잘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평소 많이 합니다.글솜씨가 없다보니 뭘써도 재미가 없지만 이번거는 특히 그리된 것 같습니다.길이도 너무 늘어졌고..ㅋㅋ..쿠르트 마주르에 대해선 그런 평가도 하는군요.개인적 느낌으론 너무 나간 평가가 아닌가 싶긴한데.ㅎㅎ..'기리'를 중시하는 일본인 다운 발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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