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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승
1949년 중국 공산화의 마지막 과정은 대단히 드라마틱하다.어느 한 순간 팽팽하던 세력 균형이 무너지면서 급속하게 공산당 쪽으로 힘이 쏠리는 것을 살필 수 있는 것. 한순간에 반도로 불리던 공산군에게, 빵빵한 군수지원을 받던 국부군(국민당군)이 대거 항복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전장에서 싸우던 군인,후방에 숨죽이던 민간인 할 것 없이 너도 나도 대세에 순응하고 시류에 편승하는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이같은 세력 변동의 최후 정점이 된 장소가 바로 중국의 경제 수도 상하이다.

1948년말경이 되면 국민당과 공산당간 힘의 우열관계는 공산당 쪽으로 급격히 기울게 되고, 국민당측 사기는 급속도로 위축되게 된다. 이에 따라 국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고, 이들은 대부분 공산당 지지로 돌아서게 된다.
결국 1949년 1월 21일 장제스(장개석 이라는 표기가 훨씬 자연스럽긴 하다.)는 중화민국 국가원수 자리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어 장제스의 후임 리쭝런이 공산당측과 휴전 협상에 나서고 열흘뒤 중국 공산당 군대가 베이징에 입성한다.
2월이 되면 국민당 세력은 중국 남부 광둥 지역으로 위축되기에 이르고 4월 20일에는 공산당 군대가 양쯔강을 도하해 남하작전을 펼치게 된다.도하 작전 3일만에 난징이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고 리쭝런은 광둥지역으로 도망가기에 이른다.6월이 되면 다시 국민당내 실권을 장악한 장제스가 대만으로 국민당 정부를 옮기게 된다.
장제스가 대만으로 쫓겨가기 전 국민당이 마지막까지 사수하고자 했던 곳은 바로 상하이였다.그리고 상하이는 국공내전 말기 대세변화에 빠르게 순응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무대이기도 했다.
1949년 4월말경이 되면 공산당 군대는 난징과 쑤저우,항저우 지역을 차지하고 상하이를 압박하기 시작한다.하지만 국민당 3군 사령관 당응포는 “상하이를 6개월에서 1년간만 지켜내면 전세는 수세에서 공세로 반전될 것”이라는 장제스의 희망섞인 주문과 함께 상하이 사수를 명받는다.
당응포의 휘하에는 15만명에서 20만명 가량의 군대와 민간인이 있었고 형식적으로 육·해·공군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상하이에는 5000여개 콘크리트 벙커와 각종 철제 방어막, 물이 가득찬 도랑 등 각종 바리케이트들이 시내 곳곳에 산제해 있었다. 이와 함께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에는 촘촘한 지뢰밭이 설치됐다. 국민당으로선 잘만 하면 버텨낼 수 있을 듯도 싶었다.
하지만 상하이 방어태세를 살피던 공산당군의 공격이 상하이 남쪽과 동남쪽,서남쪽,서쪽 순서로 전개됐다.이같은 공산당의 전략은 철길을 끊고 쑤저우 물길을 막아 상하이를 그 배후지로부터 단절시키는 의미를 띠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5월이 되자 상하이시로 진격을 시작했다.하지만 3일 내내 내린 비로 상하이 인근이 진흙밭이 되면서 제대로 진군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진흙탕 평원은 바퀴 달린 차량들이 지나갈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각종 중장비와 무기,탄약들은 모두 손으로 옮겨져야 했다.
5월 12일 상하이 남부지역을 비롯한 주요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공격이 감행됐다.13일에는 군사적 주요 철도역이었던 칭산웨이까지 공산군이 진격했고 14일 공산군은 국민당 해군 지휘관을 사로잡고 황푸강 우안을 확보하게 된다.
이와 함께 공산군 주력이 양쯔강 방면에서 공격할 태세를 취하게 된다.17일 공산군은 상하이 동북부 카오치아오에 진군하게 되고 이에 국민당 사령관 당응포는 카오치아오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기로 결정한다. 당응포는 카오치아오에 육군과 해군력을 총동원했지만 결국 공산군의 진격을 이틀 이상 막지 못하게 된다. 결국 국민당 함정들은 도시 탈출을 모색하게 되고 국민당의 마지막 거점이던 우성지역은 국민당의 덩케르크가 되고 만다.
바로 그시간 공산군을 피해 상하이로 도망쳤던 민간인들은 아직 해외 치외법권 지대였던 국제 조계지와 프랑스 조계지로 몰려들게 된다.이와 함께 상하이를 빠져 나가는 인구도 급증하고, 상하이에 거주하던 서방 외국인들도 탈출대열에 동참한다. 불과 몇주 사이에 상하이에서 거주하는 영국인수는 4000명에서 2000명으로 반토막이 된다.
5월 14일 부터는 상하이시 외곽에서 총소리가 들리게 되고 18일에는 국민당군대가 우성 마저 모두 비우고 탈출하기에 이른다.상하이 시장 첸리양도 이때 상하이를 버리고 떠나게 된다.
이때쯤 되면 해상을 통한 탈출마저 불가능하게 된다.19일 쑤저우만에선 "단 한척의 배도,단 한척의 정크선도,단 한척의 삼판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20일에는 미국 영사가 미국인들에게 해군 함정이 떠난 뒤엔 어떤 보호도 기대하지 말라고 미국인들에게 통보하기에 이른다.마지막으로 상하이를 탈출하길 원한 미국인들은 미국 구축함이 보낸 바지선을 통해 탈출하게 된다.
곧 상하이와 외부를 연결하는 수단은 항공수단밖엔 남지 않게 됐다. 하지만 항공 연락망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5월 21일 상하이 공항에 대한 폭격이 시작됐고 항공기 이착륙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5월 24일 상하이에 남겨진 일부 국민당군들은 실상과는 정반대인 ‘승전’퍼레이드를 마지막으로 벌이기로 결정하고 상하이시에는 마지막으로 국민당기가 펄럭이게 된다.(행사를 왜 했을까 싶긴하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국민당군들은 그들의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상하이 시민들의 일상 옷으로 갈아입은채 마치 시민들이었던 것인양 시민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어 공산군 진주를 기다리는 상하이 경찰들은 팔에 붉은 완장을 착용했고,상점들은 재빨리 반공산당 구호들을 걷어 치웠다.상하이시에서 숨어서 활동하던 공산당원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활동하게 됐다.가장 놀라운 사실은 상하이 시장 첸리양의 뒤를 이어 임시 시장이 된 차오추강이 그동안 숨겨왔던 그의 비밀공산당원증을 공개한 것이었다.
결국 공산군이 진주한 뒤 ‘반란세력의 혁명움직임’은 ‘해방운동’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고 1949년 5월 24일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상하이가 ‘해방’된 날로 명명됐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얼마나 관심이 있는 사안인지는 체감이 잘 안되지만 세종시(행정중심복합도시) 문제로 정가가 시끄럽다. 세종시 논란을 바라보면서 행복도시의 등장과 취소 논란 모두 시류와 여론의 눈치에 따른 대세 편승에 따른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몇년전 표를 의식해 대대적인 찬성표를 던졌던 여권내 정치인 상당수가 ‘국익’을 명분으로 입장이 180도 바뀌었고 여당내 실력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한마디에 또다시 여권 입장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행정중심복합도시안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세종시(행복도시)의 자생적 생존이 가능할지 의문이 드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과 별개로, 이 문제를 대하고 제기하는 위정자들의 태도가 순수한 국익을 위한 발로가 아니라 지나치게 대세에 편승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몇년 뒤 대선에서 다시 충청권이 캐스팅 보트를 쥐거나, 다른 정권이 들어선다면 또다시 시류를 타고 입장이 바뀌는 것은 아닐지 싶어서다.
<참고한 책>
Betty Peh-T'i Wei, Shanghai- Crucible of Modern China,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로이드 이스트만,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현대중국의 전쟁과 혁명 1937-1949, 민두기 옮김, 지식산업사 1994
배경한, 장개석 연구- 국민혁명시기의 군사적·정치적 대두과정, 일조각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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