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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김동욱 기자의 역사책 읽기 - 한국경제 블로그</title>
<link>http://blog.hankyung.com/raj99</link>
<description>한국경제 블로그</description>
<lastBuildDate>Sat, 21 Nov 2009 00:06:00 +0900</lastBuildDate>
<webMaster>webmaster@hankyung.com</web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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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무슨 뜻? 알듯 말듯 ‘난해함’이 세상을 바꾸다.</title>
<link>http://blog.hankyung.com/raj99/322652</link>
<description>&amp;nbsp;헤겔, 『법철학 강요』 
&amp;nbsp;
&amp;nbsp;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전형적인 독일식 이름을 모두 갖춘 것 같은 헤겔의 풀네임을 접하다 보면 벌써 이름에서부터 범접하기 힘든 강한 포스가 풍긴다. 
&amp;nbsp;게다가 그의 대표 저서의이름도 『법철학 강요』가 아닌가. 딱딱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법’과 어렵고 난해하기로 최고봉을 달리는 ‘철학’의 조합이니 만큼 극강의 난해함이 가득 벤 책 제목에서부터 보는 이를 압도한다. 

&amp;nbsp;
&amp;nbsp;한국어로 ‘법’으로 번역되는 독일어 ‘Rechts’는 법이란 뜻도 되지만 권리,올바름 등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법철학 뿐 아니라 권리의 철학, 올바름의 철학이란 의미도 담고 있지 않을까로 생각이 번지다 보면 제목이 적힌 첫장을 넘기는 것도 보통 가슴 떨리는 게 아니다. 
&amp;nbsp;게다가 책의 내용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어서, 방금 읽은 게 어떤 뜻인지 파악하는게 무슨 암호문 해독하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을 읽은 것인지 안 읽은 것인지, 어디까지 책을 본 것인지”조차 순식간에 ‘애매모흐’해지는 게 마치 늪에 빠지고 미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다. 
&amp;nbsp;대부분 이 『법철학 강요』를 접하게 되면 찾아보게 되는 구절이 바로 그 유명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등장하는 부분일 것이다. 한때 국내에서도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사태로 널리 알려진 박모씨의 아이디가 유래한 바로 그 구절말이다. 
&amp;nbsp;“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야 그 첫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라는 이 멋드러진 문학적 표현은&amp;nbsp; 『법철학 강요』에서 가장 많이 인용될 뿐 아니라,아마도 이 책을 읽은 이들이 가장 많은 상상의 나래를 펴개하는 부분일 게 분명할 것이다. 
&amp;nbsp;다행이 책의 비교적 앞부분 서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나래를 펴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부분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amp;nbsp;“철학은 애당초 언제나 너무 늦게 도착하는 것이다. 철학은 세계의 사상인 이상 현실이 그 형성과정을 완료해 자기를 완성시킨 뒤에야 비로소 철학의 시간 속에 나타난다. 이것은 개념이 가르치는 바의 것이지만 현실의 성숙 속에서 비로소 관념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의 맞상대로 나타나고 이 같은 세계를 그 실체에 있어 포착하며 이것을 하나의 지적인 왕국의 모습으로 자신 속에 건설하는 것이다. 철학이 그 이론의 잿빛에 잿빛을 겹쳐 그릴 때 삶은 이미 늙어버린 모습이 되어 있을 뿐이며 잿빛에 잿빛으로서는 그 삶의 모습은 젊어지거나 하지 않고 다만 인식될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찾아와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amp;nbsp;영어권에서 ‘sound like Hegel’이라고 하면 “장황하고 복잡한 얘기를 불명확하고 알아듣기 힘든 것”이라는 뜻이라고 한다는데 아무리 읽어도 어렴풋할 뿐 명확한 뜻을 알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amp;nbsp;‘철학의 달인’들에겐 위의 구절이 명료할 수 있겠지만 알듯 말듯 아리송송 애매모호한 헤겔의 글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오해와 잘못된 인식, 자신만의 해석으로 연결되기 쉬울 듯 하다. (그러면서도 바로 버려버리기엔 무엇인가 아쉽고, 사람을 붙잡는 묘한 힘이 있는 듯도 하다.) 
&amp;nbsp;만약 헤겔의 사상이 세상을 바꾸는 데 영향을 줬다면 그것은 바로 ‘오독’과 그에 따라 파생된 다양한 상상, 그리고 저마다의 이해가 이 세상을 바꾸는 계기와 힘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다. 바로 때때로 건설적인 창조는 오해와 오독에서 탄생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amp;lt;참고한 책&amp;gt; 
헤겔, 법철학 강요, 권응호 옮김, 홍신문화사 1994 
 </description>
<pubDate>Sat, 21 Nov 2009 00:06:00 +0900</pubDate>
<category>블로그</category>
<guid>http://blog.hankyung.com/raj99/322652</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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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청순 글래머’의 인기는 역사의 필연?- 풍만</title>
<link>http://blog.hankyung.com/raj99/322379</link>
<description>&amp;nbsp;풍만
&amp;nbsp;
&amp;nbsp;최근 ‘청순 글래머’라는 용어로 통칭될 수 있는 여성 연예인들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amp;nbsp;초딩이나 중딩 같은 앳된 얼굴에 몸매는 ‘나올 곳 나오고 들어갈 데 확실하게 들어간’ 대문자 S라인 미녀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amp;nbsp;어찌보면 ‘당연하다’고 치부할 수 있는 ‘청순 글래머’인기현상에도 나름 오랜 인류사의 흔적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amp;lt;진화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앳된 얼굴에 대한 선호는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또 인류사의 대부분 기간동안 굶주려온 인류는 '살집있는' 체형을 선호하는 형태로 적응돼 왔다고 한다.좌로부터 시계방향으로 대식가 가르강튀아,청순글래머 연예인으로 꼽히는 신세경씨,여성의 성적 신호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옷을 입은 청교도 여성,페르나도 보테로의 뚱뚱한 인판타 마르가레타상,가수 유이씨와 외국배우 미란다 커,그리고 기름진 살을 아름다운 이상형으로 묘사한 루벤스의 그림&amp;gt;&amp;nbsp;
생물학자이자 인간행동 전문가인 데즈먼드 모리스에 따르면 성인 여성의 얼굴은 성인 남성에 비해 어린아이처럼 생겼다고 한다. 여성의 얼굴이 남성에 비해 앳된 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보호자적 감성을 자극하는 진화의 한 수단으로 여겨진다는게 그의 설명. 남자들이 중딩같은 청순한 얼굴을 선호하는 데는 단순한 역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오랜 인류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전적 각인 때문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amp;nbsp;반면 S라인 몸매냐 D라인, 혹은 L라인을 결정짓는 핵심부위인 여성의 가슴은 문화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상당수 시기에 적잖은 문화권에서 큰 성적인 의미를 지녀왔다. 
&amp;nbsp;이에 따라 초기 영국 청교도들은 여성의 가슴이 지닌 이 성적 이미지를 ‘죽이기’위해 딱딱한 띠로 여성의 유방을 완전히 눌러 감쌌다. 17세기 스페인에서는 더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는데, 젊은 여성의 유방의 성장을 막기 위해 부푼 가슴에 납판을 대어야 했다고 한다. 
&amp;nbsp;이같은 조치들은 가슴에 대한 관심의 결여를 보여주는게 아니라(관심이 없다면 무시했을 것이다.) 오히려 가슴의 성적 신호가 표출되는 것을 문화적인 이유에서 처단한 것이라는 게 데즈먼드 모리스의 설명이다. 
&amp;nbsp;이처럼 남성들이 여성의 가슴과 그로인해 만들어진 S라인에 주목하게된 또다른 이유로는 인류가 인류사 대부분의 시간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채 기아와 끝없는 전쟁을 치렀다는 점이 고려돼야 한다. 
&amp;nbsp;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사이래 쭈욱 굶어왔으며 어느 나라든 귀족과 농민(또는 피지배층)을 구분하는 가장 구체적인 차이는 바로 음식이었다.귀족들은 자신들의 위신을 높일 필요가 있을 때는 엄청난 규모의 연회를 열어 부와 권력을 과시했다.또 근대 유럽의 사례에서 부를 얻은 부르주아들이 귀족을 흉내낼 때는 ‘사치 금지법’을 만들어 자신들을 모방하려는 행위를 금지시키듯 차별화,구별짓기 노력은 끊임없이 반복됐다. 
&amp;nbsp;언제나 굶고 살아왔던 일반 농민들도 평생의 소원으로 “음식이 지천에 널린 땅”을 꼽고는 했고,이런 소망이 반영돼 가르강튀아 같은 무지막지한 대식가,팡타그뤼엘 같은 끊임없이 모든 것을 먹는자에 대한 이미지도 창출됐다. 서양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로 만든 집 같은 것 역시 이같은 사람들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다. 
&amp;nbsp;이처럼 언제나 굶어왔으니 바짝 마른 여자가 예뻐 보일 수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이에 따라 전통시대에는 미녀들은 대개 통통한 몸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루벤스의 그림에서 나오는 여인들처럼 불그스름한 살집을 자랑하는 ‘비겟덩어리’들은 미의 극치로 통했다. 
&amp;nbsp;서울대 주경철 교수에 따르면 ‘기름기’라는 말은 전통시대에는 아주 긍정적인 의미를 지녀서 권력과 미의 상징으로 통했다고 한다. 예컨대 피렌체의 최상층 귀족을 지칭하는 ‘포폴로 그라소(popolo grasso)’는 말그대로 ‘기름기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amp;nbsp;이같은 상황은 20세기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아 1950년대까지도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은 풍만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amp;nbsp;날씬함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승리를 얻은 것은 20세기 마지막 30년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탐스러운 살집이 추한모습,가난한 이미지로 비쳐지게 됐다. 하지만 사람들의 뼛속, 핏속 깊숙히 각인된 오랜 역사의 흔적은 어쩌면 끊임없이 이같은 새로운 트랜드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들에게 ‘청순 글래머’가 인기인 것은, 오랜 진화의 산물이자 수만년간 누적된 역사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한밤중에 갑자기 해봤다. 

&amp;lt;참고한 책&amp;gt; 

주경철,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산처럼 2002 
데즈먼드 모리스, 인간의 친밀행동, 박성규 옮김, 지성사 2003 
미하일 바흐찐,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이덕형·최건영 옮김, 아카넷 2001 
&amp;nbsp; </description>
<pubDate>Fri, 20 Nov 2009 02:43:00 +0900</pubDate>
<category>블로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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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향락의 천국’에서 싹튼 이탈리아산 파멸의 씨앗- 사치</title>
<link>http://blog.hankyung.com/raj99/321976</link>
<description>사치 
&amp;nbsp;
사치는 정말로 망국의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불변의 요인일까? 
&amp;nbsp;베네치아나 제노바, 밀라노, 피렌체 같은 16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쇠퇴원인으로 저명한 경제사가 킨들버거를 비롯해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무역 및 생산의 약화, 스페인과 포르투갈과의 경쟁에 따른 몰락, 해외시장 독점체제 붕괴, 목재 부족, 흉작, 기상악화 등)과 함께 ‘사치’라는 요소를 쇠퇴의 원인으로 빼놓지 않는다. 

&amp;lt;'향락의 본산'이라는 베네치아의 이미지는 현대에 와서 마카오에서 재생되기도 했다.사진 오른쪽 아래는 마카오의 베네치아 호텔.&amp;gt;
&amp;nbsp;‘사치’의 개념을 약간 느슨하게 넓게 잡고, 베네치아를 비롯한 쇠퇴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실상을 살펴보면 도시국가들이 망하는데 사치는 곳곳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amp;nbsp;예를 들어 베네치아의 경우,15세기 갤리선에서 노를 저을 노수를 확보하는 게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몰타섬 같은 식민지 출신 사람들과 죄수들까지 동원해서 갤리선 근무를 시켜야 할 정도로 경제환경이 급변했다고 한다. 투르크에서 노예가 수입된 반면, 탁월한 항해 관련 기술을 지니고 있던 베네치아 뱃사람들은 보다 좋은 대우를 해주는 피사 등 다른 이탈리아 도시는 물론 멀리는 영국 함대로 까지 일자리를 옮겨갔다. 
&amp;nbsp;이같은 상황에서 킨들버거 교수에 따르면 베네치아에서 이미 한자리를 차지한 기간 선원들은 흰 담비 가죽으로 안을 댄 금색 옷과 같은 정교한 제복을 입기 시작했고, 점점 부패해 갔다고 한다. 결국 선원의 임금은 1550년대부터 1590년대까지 두배로 올랐지만, 임금이 오른다고 선원난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amp;nbsp;여기에 당시 최첨단을 달리던 금융산업과 그에 따른 부의 창출이 결과적으로 베네치아나 피렌체의 경제발전에 발목을 잡았다. 무역이란 힘들고 위험한 일보다는 안전한 돈놀이가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면서 굳이 모험적인 사업을 할 필요성이 적어진 것이다.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이 강해진 상인들은 해운업에서 자금을 빼서 주택과 점포, 공채로 돈을 돌렸다. 이 결과, 베네치아의 부자들은 세금 납부액을 상회하는 단기 자산운영 소득을 올렸다. 이미 15세기에 크레타섬에서 베네치아로 이주온 가족들의 삶에 대해 “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큰 재산을 모았고, 지금은 베네치아에 살면서 이자로 살고 있다”는 기술이 심심찮게 등장한다고 한다.&amp;nbsp; 
&amp;nbsp;이같은 상황에서 과시성 소비는 필연적으로 등장했고, 한번 자리잡은 사치성 소비는 멈출줄을 몰랐다. 베네치아 등 상류층에겐 의상과 시골토지, 교외별장, 공공건물, 예술품 등이 모두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자 대상이 돼 버렸다.16세기 베네치아는 ‘향락의 본산(sede principalissima del piacere)’이라고 불렸고, 동시대의 헨츠너의 여행기(1617)에선 ‘향락의 천국’이라고 지칭됐다고 한다. 무엇보다 베네치아는 축제와 여자로 유명한 도시가 됐다. 
&amp;nbsp;이같은 사치풍조는 사회 전반적인 기강에도 영향을 미쳐, 근무기강도 지배자의 관점에선 ‘헤이해’졌다.16세기 후반으로 가면 베네치아 경쟁력의 근간이던 조선산업에서 배를 만드는 인부들의 작업은 늦어졌고, 작업 수준도 형편없어졌다. 이전에는 나이든 인부들만 정시보다 30분 일찍 끝마치는 게 허용됐지만 1601년에는 젊은 인부들도 나이든 인부들과 함께 떠났다. 
&amp;nbsp;여기에 이탈리아 배들은 항해기간이 얼마나 걸리든 매일매일 선원들에게 급료를 지불하는데,이 때문에 굳이 힘들고 위험하게 일할 필요없이 가급적 폭풍을 피하고 항구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다. 한마디로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배들은 바람이 적게 불때만 항구를 나서기 시작했다. 반면 영국배들은 항해가 끝나야 보수를 받아 폭풍을 무릅쓰고 항해에 나섰고 이탈리아배들이 한번 항해할때 두번 항해를 마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amp;nbsp;여기에 돈맛을 본 은행가들과 금리생활자들은 국내 산업에는 거의 돈을 꾸어주지 않고 더욱더 큰 이익을 얻겠다는 한탕주의에 빠져 외국에 점점더 많은 돈을 빌려줬다. 하지만 이는 이탈리아 금융파산의 결정타로 돌아왔다. 베니스 등 이탈리아 경제는 1619-1622년의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결정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뒤 회복되지 못했다. 
&amp;nbsp;이보다 앞서 브리주와 리옹,런던에 거액을 무절제하게 대출한 메디치은행은 1494년 파산했고, 그 이전 14세기엔 바르디,페루치,알베르티 가문 등 유력 금융가문들이 잉글랜드 국왕 등 해외에 빌려준 거액의 자금이 떼이면서 파산의 운명을 맞이한 역사가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한채 또다시 반복된 것이다. 
&amp;nbsp;400여년전 머나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얘기지만, 이들 스토리에 등장하는 주체와 연도만 바꾼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를 게 없는 풍경이란 생각이 든다.또 요즘 내가 쓰는 기사들과 역사책속 많은 구절들이 너무나&amp;nbsp;비슷한 형태를 보이는데 나도 모르게 움찔하곤 한다. 

&amp;lt;참고한 책&amp;gt; 
찰스 P.킨들버거, 경제강대국 흥망사 1500-1900, 주경철 옮김, 까치 2004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7 
John A. Marino, Early Modern Italy,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George Holmes(Edited), 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Italy,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description>
<pubDate>Thu, 19 Nov 2009 01:50:00 +0900</pubDate>
<category>블로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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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소설이 되버린 백주대낮 역사의 현장,아리스토텔레스가 봤다면?</title>
<link>http://blog.hankyung.com/raj99/321708</link>
<description>&amp;nbsp;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amp;nbsp;
&amp;nbsp;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현대적인 저술가다. 
&amp;nbsp;정상적인 중등 이상의 교육과정을 거쳤다면 아리스토텔레스란 이름을 한번 듣지 않은 채 학교를 떠나긴 쉬운 일이 아니다. 또 대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 외에는 그의 저술을 직접 접할 일이 없을 듯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란 이름은 머나먼 옛날 서양에서 여기저기 건드려보지 않은 분야가 없는 ‘만득이’같은 할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amp;nbsp;하지만 필자의 경우엔 (감수성이 좀 남아있던) 20대 학창시절 “머리털이 곤두서고,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충격을 아리스토텔레스를 접하면서 느끼곤 했다.( 『정치학』중에 나오는 “장애인은 죽여야 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 조차, 아리스토텔레스의 음성을 통해 듣고 있노라면 바로 나 자신이 철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목한 장애인인 듯 느껴져 사라져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해 온몸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amp;nbsp;하지만 고대 그리스와 현대 대한민국이라는 수천년의 시간적 간극과 공간적 거리감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접하는 것은 여간 부담스런 일인 것도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여러모로 접하기에 약간은 부담을 덜어주는 책이다. 일단 분량이 매우 적어 두께가 얇을 뿐 아니라(뒷쪽이 망실돼 한참 논의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책이 끝난다.)다루는 대상도 시공을 초월한 문학을 논하는 것이어서 정치학 등에 비해선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도 주장의 유효성을 덜 상실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재미까지 갖춰 분량과 내용, 재미의 3박자를 고루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amp;nbsp;게다가 다른 고대 고전들과 달리 『시학』은 첫 페이지부터 수천년전에 쓰여진 책이란 느낌이 거의 들지 않고 오늘날 문학교과서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현대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책이란 점도 장점이다. 
&amp;nbsp;일반적으로&amp;nbsp; 이런 『시학』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을 꼽으라면 아마도 역사와 문학의 차이를 논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amp;nbsp;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점은 운문을 쓰느냐 아니면 산문을 쓰느냐 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얘기하고, 다른 사람은 일어날 법한 일을 얘기한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시(詩)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시학』 제9장)라고 단언한다. 
&amp;nbsp;즉 인간사란 공통의 소재를 언어란 도구를 통해 기술하는 몸이 한데 붙은 쌍생아라 할 수 있는 역사와 문학을 구분하는데 있어,“역사와 문학은 모두 운문으로 쓰여질 수 있지만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쓰는데 비해, 문학은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데 차이가 있다”고 구분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amp;nbsp;단지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역사는 순수한 의미에서 ‘창조’라 할 수 없는데 반해, 문학은 개연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상상력과 기교가 요구된다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옹의 일갈인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가 특수적인 것을 다룬다면, 문학은 보편성을 띨 수 밖에 없는데다 창조성이 가미됨으로 문학이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이며 보다 급수가 높다는 해석이 자연스레 도출된다.&amp;nbsp; 
&amp;nbsp;여기까진 나름 재미는 있지만 대학시절 교양필수 과목인 문학개론 수업에서 대충 접한 뒤 평생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을 내용일 듯도 싶다. 하지만&amp;nbsp; 얼핏 보면 ‘사는데 아무 도움도 안되는 말장난’ 같은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역사와 문학을 구분하는 노력이 불현듯 떠오르는 일이 오늘 발생했다. 
&amp;nbsp;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간 공동기자회견이 바로 그것인데.한국을 비롯해 해외 각국이 초미의 관심사를 두고 있는 ‘위안화 평가절상’여부와 관련, 양국 정상이 어떤 의견을 교환해 입장을 정했는지가 이날 회담의 핵심 관전포인트로 떠올랐었다. 그런데 중국이 초대박 ‘사건’을 하나 터뜨려 버렸다. 바로 기자회견 공식 중국어판 발언록과 현장 통역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말한 ‘환율’이란 단어를 빼버린 채 번역문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중국 입장에선 자국 경제에 적잖은 영향을 주는 민감한 문제다 보니 ‘환율’문제를 거론하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상대방 정상의 발언에서 ‘환율’이란 단어를 번역문에서 모두 삭제하는 황당한 일을 백주대낮에 수많은 사람들이 생생히 지켜보는 가운데 자행한 것이다. 

&amp;lt;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amp;nbsp;기자회견 모습.이날 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말한 내용중 '환율','민족'등의 단어는 중국어판 대화록에선 삭제되거나 다른 단어로 대체된체 제공됐다.&amp;gt;&amp;nbsp;
과연 이같은 중국이 행한 비정상적 정상회담 번역문이 작성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과연 이 사건을 역사의 한장으로 봐야할지, 소설이라고 봐야할지’라는 생각이 순간 절로 들었다. 마침 다시 들쳐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이날의 황당 에피소드에 적용할 만한 구절이 적지 않았다. 
&amp;nbsp;&amp;nbsp;“우스꽝스런 것은 남에게 고통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일종의 실수 또는 기형이다.”(『시학』제5장) 
&amp;nbsp;이날 중국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운 것은 확실했는데,과연 남에게 과연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었을까? 
&amp;nbsp;또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한다”(『시학』제2장)라고 했는데 이날의 해프닝은 과연 희극이었을까, 비극이었을까. 
&amp;nbsp;“한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인하여’일어나는 것과, 다른 사건에 ‘이어서’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시학』제 10장)라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옹의 말인데, 중국의 이번 행동은 일회성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더 황당한 일들이 일어날 전조일까.&amp;nbsp; 
&amp;nbsp;역사의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소설이 쓰이는 것을 접하면서, 그 소설이 과연 역사보다 우월한 존재가 될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바로 그런 수준의 돈 많고 힘센 이웃이 우리의 삶에 적잖은 영향을 줄것이란 생각에... 

&amp;lt;참고한 책&amp;gt;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삼성출판사 1993 
김윤식, 한국근대문학의 이해, 일지사 1993 

 </description>
<pubDate>Wed, 18 Nov 2009 01:40:00 +0900</pubDate>
<category>블로그</category>
<guid>http://blog.hankyung.com/raj99/321708</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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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블로그 운영 1년,방문객 1백만 돌파.감사합니다.</title>
<link>http://blog.hankyung.com/raj99/320554</link>
<description>&amp;nbsp; 
블로그를 운영한지 약 1년만에 누적방문객이 100만명을 넘었습니다. 지난해 12월4일 부터 시작해 ‘빼빼로의 날’인 지난 11월11일 ‘백만돌이’가 됐으니 아직 1년은 조금 안되는군요. 강호의 고수라 할 수 있는 여러 파워 블로거분들에 비하면 방문객수를 논하기가 좀 부끄럽긴 합니다. (사실 방문객수를 세보고 기념한다는 게 일견 유치한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또 언론사에 소속된 기자가 쓰는 ‘기자블로그’다 보니 여러분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유리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저로선 그동안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방문해 주셔서 관심을 표해주시고 의견을 피력해 주신데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음 한편에선 약간 자랑스런 마음도 없지는 않습니다.^^) 

&amp;lt;'블로그 폐인'이 된뒤 수면시간이 많이 줄었습니다. 사진출처:슈피겔&amp;gt;
&amp;nbsp;사실 블로그를 시작할 때 미처 예상치 못했던 점은, 블로그를 운영하기 전에는 결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소중한 경험을 지난 1년간 ‘진하게’했다는 점입니다. 
&amp;nbsp;여러분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블로그라는 일종의 마약에 빠졌다고나 할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블로그를 들락날락 거리며 ‘폐인의 길’로 접어든 듯 합니다. 그동안 블로그를 통해 비록 얼굴은 뵙진 못했지만, 매일 친한 친구처럼 접했던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amp;nbsp;개인적으로 처음 블로그를 시작할 때는 그동안 읽었던 책들 중 인상 깊은 내용들을 정리하는 일종의 독서노트를 마련해 보자는 생각으로 접근했습니다. (10여년간 기자생활의 경험을 투사해 나름 정리해 보고 싶었던 생각도 있었습니다.) 

&amp;lt;제 블로그의 주제인 '역사'는 매우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출처: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amp;gt;
&amp;nbsp;또 한편으론 역사는 박물관이나 책갈피에 쌓인 먼지 속에 죽어있는 단순한 학창시절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오늘날 삶에 끊임없이 재현되는 생명력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멋지게 표현해보고자 하는 허랑한 욕심도 있었습니다. 또 역사의 유기적 복합성과 다면성, 이와 함께 역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좋은점, 나쁜점, 자랑스러운 점, 부끄러운 점을 모두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하는 나름 원대한 목표도 있었습니다. 

&amp;lt;때로는 많은 분들을 뵙기위해 자극적인 소제로 어설픈 '낚시질'을 시도해 보기도 했습니다. 사진은 모피반대운동 단체인 PETA의 홍보 포스터&amp;gt;
&amp;nbsp;한마디로 처음에 블로그를 시작할 때는 제 딴에는 멋드러진 풍부한 내용을 갖춘 박물관이나 전시관에 비견될 만한 집을 짓고 싶은 욕망도 있었는데, 실제로 지어진 것은 이래저래 균형과 이빨이 맞지 않는 얼키설키, 뒤죽박죽 잡동사니들이 널부러진 공간이 된 듯 합니다. 
&amp;nbsp;그렇지만 세계의 온갖 신기한 박물학적 물건들을 잡다하게 모아놨던 근세 독일의 ‘분더카머(Wunderkammer)’가 후대의 멋진 박물관으로 발전했듯 이 블로그가 제 생각을 정리하는 멋진 거름이 되고 있다며 위안을 삼고, 희망을 가져보려 합니다. 

&amp;lt;질서정연하게 논리적으로 정리된 박물관을 꿈꿨지만 실상은&amp;nbsp;제 눈에만&amp;nbsp;신기한 것들을 잡다하게&amp;nbsp;모아놓은 '분더카머'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amp;gt;&amp;nbsp;
무엇보다 글을 쓰고 정리하고 여러분과 소통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점, 부족했던 점을 다시 짚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 듯 합니다. 
&amp;nbsp;때론 예의없는 인신공격성 악플도 접하고, 때로는 국수주의적인 유사역사학에 빠진 사람의 스토킹도 당해보며, 가끔 이분법적 사고관에 바탕을 둔 공격을 받으면서 기분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여러분들의 도움과 격려가 큰 힘이 됐습니다.
&amp;nbsp;
&amp;lt;블로그운영중 접한 따끔한 지적은 큰 힘이 됐습니다. 사진출처:슈피겔&amp;gt;
&amp;nbsp;

&amp;lt;하지만 막가파식 악플러는 곤혹스런 경험이었습니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amp;gt;
&amp;nbsp;약 1년간 130여개 포스트를 작성했는데, 돌이켜 보면 한편 뿌듯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선 부끄럽기도 합니다. 누군가 “블로그는 자기 파멸의 과정을 실시간으로 중개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봤습니다. 저도 이제 슬슬 밑천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언제까지 블로그를 계속 쓸 수 있을지 간혹 자신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블로그를 통해 인연을 맺고, 느끼고, 소통하며 배운 점들은 언젠가 블로그를 접더라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점입니다. 

&amp;lt;블로그 운영중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방문자 여러분의 격려였습니다.추천은 나의 힘^^. 사진출처:슈피겔&amp;gt;
&amp;nbsp;역사관련 블로그를 운영해 보면서, 이 블로그에 자체의 조그마한 역사기록을 남겨놓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몇자 끄적여 봤습니다. 지난 1년간 저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 보면서, 블로그를 방문해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description>
<pubDate>Fri, 13 Nov 2009 00:25:00 +0900</pubDate>
<category>블로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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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중세 첨탑속 계단이 오른쪽으로 감긴 이유는?- 계단</title>
<link>http://blog.hankyung.com/raj99/319909</link>
<description>&amp;nbsp; 
계단 

&amp;nbsp;중세를 상징하는 성에 꼭 등장하는 것이 뾰족한 첨탑이다. 레고 장난감에서부터 만화 신데렐라, 영화 드라큘라 등등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 중세 성채의 탑 내부에는 보통 나선형 계단이 있기 마련이다. 
&amp;nbsp;

&amp;lt;방어용으로 건설된 중세,근세 성곽의 첨탑내부에 있는 나선형 계단은 보통 오른쪽 방향으로 감겨나갔다.이는 전통적으로 성곽방어자에 유리한 설계가 도입됐기 때문으로 해석됐는데.실상은 어땠을까?&amp;gt;
&amp;nbsp;로마시대와 달리 규격이란 것을 찾기 힘든 제멋대로 중세의 건축물에서도 나선형 계단은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다고 한다. 보통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겨나가는 게 표준형이라는 것. 귀 카도간 로더리에 따르면 중세 첨탑의 계단이 이처럼 오른쪽으로 감기게 된 것은 싸울 때 방어자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단이 오른쪽으로 감겨 올라가면 오른손잡이인 방어자가 위쪽에 있을 때 오른손을 쓰기가 유리한 데 반해 아래쪽에 있는 공격자는 오른손이 벽에 걸려 불리하다는 것. 
&amp;nbsp;여기에 나선형 계단의 발판 형태가 오늘날 아파트 계단에서 볼 수 있는 직사각형이 아니라 한쪽은 얇고 반대편은 두꺼운 일종의 부채꼴형인 쐐기형인 점도 방어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한다.오른손 잡이인 경우 발판의 면적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발 디딤이 바깥쪽인 왼쪽으로 쏠리면서 오른쪽에 오른팔을 휘두르기에 유리한 공간이 확보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amp;nbsp;하지만 임석재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에 따르면 이같은 설명은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바로 성벽을 사다리로 기어 오르거나,공격자와 수비자 중 한사람이 왼손잡이거나,수비자가 아래에 있고 공격자가 위에 있을 경우,방어자 우위를 위해 설계됐다는 설명의 타당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인 것이다. 
&amp;nbsp;임 교수는 오히려 그같은 심오한 이유보다는 기술적·기능적인 문제 때문에 탑 내부의 계단 방향이 결정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바로 탑의 사용자가 아닌,설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건물설계 중 계단설계에서 중요한 요소는 바로 출발점과 종착지점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다.이때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출발하는 층이나 도착하는 층 내에서 다른 방과의 위치와 거리 등이지 계단을 오른쪽으로 돌릴지,아니면 왼쪽으로 돌릴지는 중요한 고려요인이 아니라고 한다.즉 계단을 오른쪽으로 돌리냐,왼쪽으로 돌리냐는 다른 주요기능이 결정된 다음에 부수적으로 결정되는 사항이라는 설명이다.한마디로 로더리의 ‘중세첨탑 계단의 방어자 우위설계론’은 지엽적인 부분을 확대 해석했거나, 실제와는 상관없는 견강부회 내지 오해일 확률이 크다는 입장인 셈이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실제 현실과는 동떨어졌지만 그럴싸한 해석을 하는 경우를 일상에서건, 정부정책에서건 간에 간혹 접할 수 있다. 때론 그럴싸한 해몽에 어울리지 않게 ‘실체’는 허망하게 초라한 경우도 경험상 살펴보면 적지 않은 듯 싶다.(물론 실체가 해석처럼 복잡한 경우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amp;nbsp;북한은 서해에서 왜 도발했는지, 정부는 왜 4대강 사업에 집착하는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비담과 선덕여왕은 왜 갈라서게 되는지, 미녀들의 수다 작가는 왜 대본에 “키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적었는지, 특정 언론사·기자의 논조는 왜 그런지 다양한 해석들이 나올 수 있고 또 이미 나오고 있다. 이들 다양한 해석들은 과연 ‘실체’에는 얼마나 부합하는 것일까. 또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amp;nbsp; 
&amp;lt;참고한 책&amp;gt; 
임석재, 계단, 문명을 오르다-계단의 역사를 통해 본 서양문명사 고대∼르네상스, 휴머니스트 2009 
 </description>
<pubDate>Wed, 11 Nov 2009 02:09:00 +0900</pubDate>
<category>블로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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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神에게 ‘몸바친’ 바빌론 처녀들</title>
<link>http://blog.hankyung.com/raj99/319650</link>
<description>&amp;nbsp; 
헤로도토스, 『역사』 

&amp;nbsp;세기의 입담꾼 헤로도토스가 그의 저서 『역사』에서 전하는 바빌로니아의 역사는 매우 매혹적이다. 때론 너무나 소설 같은 얘기 위주로 구성돼 있어서 과연 이 모든 기록이 사실일까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동양의 ‘역사의 아버지’인 사마천의 『사기』가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지닌 상대적으로 점잖은 학교 선생님이 연상되는 책이라면 서양의 역사학의 시조는 약간은 사기꾼 같고, 약간은 약장수 같지만 손을 때기 어려운 성인소설 같은 느낌으로 대조를 보이는 것도 재미있는 특징이다. 특히 헤로도토스의 기술 중에서 현대인들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끄는 자극적인 소제가 풍부한 것은 바빌론에서의 결혼 및 신전에서의 ‘종교 매춘(신성한 매춘)’과 관련된 내용이다.
&amp;nbsp;
&amp;nbsp;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고대 바빌로니아는 한마디로 외모 지상주의 사회였다. 한마디로 못생긴 여자, 돈 없는 남자는 결혼하기 힘든 사회였는데. 헤로도토스는 “지금은 이 좋은 풍습이 아쉽게도 없어졌다”며 ‘과거’ 바빌로니아에 존재했다는 결혼풍습을 카더라 통신으로 전하고 있다.&amp;nbsp; 
&amp;nbsp;내용인 즉슨 바빌로니아의 부락에선 일년에 한번 혼기가 찬 여자들을 전부 한곳에 모은 뒤 남자들이 그 주위를 빙 둘러서도록 했다고 한다. 이어 경매인들이 한 사람씩 여자를 세워 경매에 부쳤다. 경매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부터 시작해서 그 여자가 팔리면 두번째로 예쁜 여자가 경매에 부처지는 식으로 진행됐다. 적령기 남자 중 부유한 청년들은 서로 값을 올려 제일 아름다운 여자를 사려고 혈안이 됐다. 반면 돈없는 서민들은 돈을 주고 여자를 사기보다는 오히려 돈을 받고 못난 여자를 얻는 것이 통례였다. 
&amp;nbsp;이어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논쟁적인 풍습은 신전에서의 매춘행위다. 헤로도토스는 “모든 여자들은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 앞 뜰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낯선 남자와 성관계를 가져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여성의 신분고하와 관련 없이 무조건 해야만 하는 ‘종교적 의무’였다는 게 헤로도토스의 설명. 이에 따라 부잣집 여인들은 하층 여인들과 어울려 있는 것을 싫어해서 밀폐된 마차를 타고 그 뒤에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덮개가 있는 마차를 타고 신전에 들어가 지나는 남자에게 점지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amp;nbsp;여자들은 신전안에서 엮어서 만든 끈을 머리에 두른채 앉아 있었고(끈은 여신과의 연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일이 끝나면 끈도 풀었다.), 신전은 항상 떠나고 도착하는 여인들로 붐볐다고 한다. 
&amp;nbsp;여자들 사이로 남자들이 거닐면서 여자를 물색했다. 여자가 일단 신전에 앉은 이상은 어떤 여자도 여행자가 그 여자를 골라 무릎에 동전을 던져 주고 그 여자를 신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성관계를 갖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은화를 던진 남자는 “밀릿타(아프로디테의 앗시리아식 이름)여신의 이름으로”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돈의 액수는 얼마라도 상관이 없었고, 적은 돈이라도 한번 던지면 신성한 것이 되기 때문에 거절하거나 돌려줘선 절대로 안됐다고 한다. 여자는 동전을 맨 처음 던진 남자를 따라가야 하며 (아무리 남자가 후지고, 별볼일 없어도) 결코 거절해서는 안 됐다. 
&amp;nbsp;남녀가 몸을 섞은 뒤 여자는 여신에 대한 봉사를 다한 것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고 그후로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그 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amp;nbsp;이 상황에서 헤로도토스는 ‘외모 지상주의’풍조를 다시한번 적나라하게 전하며 ‘오크녀’들의 가슴에 못을 밖는 것을 잊지 않는다. 즉 그에 따르면 “용모가 뛰어난 여자는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못생긴 여자는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계속 기다려야만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한자리에서 3년,4년씩 앉아 기다리는 여자도 있었다는게 헤로도토스의 설명이다. 
&amp;nbsp;이같은 헤로도토스의 설명은 액면 그대로 100% 믿기는 좀 자신이 없지만, 일정부분 고대사회의 실상이 전승의 형태를 통해 전해진 게 아닐까 싶긴 하다. 
&amp;nbsp;여하튼 이같은 헤로도토스의 매혹적인 ‘구라빨’은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뜨끔한 감을 주기도 하는데. 잊을만 하면 ‘사이비 종교 교주나 종교지도자가 신의 명령을 핑계로 신도를 성폭행했다’는 기사를 접하는 데다, 무엇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외모지상주의는 결코 고대 바빌로니아에 뒤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사는 ‘말빨 좋은’분이 약간 초를 쳐서 “못생긴 여자, 돈없는 남자”에게 가혹한 오늘날의 외모지상주의 세태를 후세에게 전한다면 과연 헤로도토스의 ‘바빌로니아사’기술과 얼마나 다를지 자신할 수 없지 않을까? 

&amp;lt;참고한 책&amp;gt; 
헤로도토스, 역사,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2 
 </description>
<pubDate>Tue, 10 Nov 2009 01:43:00 +0900</pubDate>
<category>블로그</category>
<guid>http://blog.hankyung.com/raj99/319650</gu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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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고구려 침공전 수나라 전몰자 유해를 먼저 수습한 당나라</title>
<link>http://blog.hankyung.com/raj99/319429</link>
<description>&amp;nbsp; 
631년 7월, 당나라는 고구려 침공에 앞서 고구려·수나라 전쟁 때 죽은 수나라 군사들의 유골을 수습하고 요서 지역에 고구려가 만든 경관(京觀)을 파괴했다. 이 경관은 고구려 침공 때 죽은 수나라 군사의 시체를 모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은 것으로, 고구려에겐 일종의 ‘전승기념탑’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 일종의 ‘해골탑’은 중국에겐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인 동시에 고구려인들에겐 외침을 극복한 일종의 자긍심을 대표하는 존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amp;nbsp;이런 요서 지역 고구려 경관을 파괴하는 당나라의 조치는 명백히 고구려에 대한 도발이요 위협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amp;lt;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미군유해에 경례하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amp;gt;
&amp;nbsp;결국 차곡차곡 고구려 침공을 준비해온 당나라는 645년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을 감행한다.결과론적으로 당 태종의 645년 고구려 침공은 실패로 끝나지만,하마터면 고구려의 역사가 645년에 끝날뻔 했을 정도로 적잖은 위기였던게 사실이다. 
&amp;nbsp;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군대(15만명)가 소집돼 일전을 치른 안시성 교외 대회전에서의 가슴아픈 참패도 경험, 한동안 고구려 전역이 공황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구당서 등 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항복한 고구려군 대소 장교가 3500명에, 함께 항복한 말갈인 3300명을 모두 파묻어 죽였고, 이 전투에서 당군은 고구려 명광갑(明光甲)갑옷 1만개와 소와 말 각각 5만필을 노획했다고 나온다.) 특히 고구려 정예 중장기병이 몰살된 이 안시성 교회 대회전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거의 당태종에 대한 찬양위주로 각색된 중국측 일방적 자료밖에 남은 것이 없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amp;lt;고구려 삼실총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 중장기병의 모습&amp;gt;
&amp;nbsp;결국 안시성의 영웅적 항전과 추운 겨울이 다가온데 따른 고구려의 전통적 지연전술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당나라에 뼈아픈 굴욕을 다시한번 안겨주게 되지만, 고구려 역시 이 645년 당나라의 침공을 계기로 국력이 크게 위축되고 결국 668년 망국의 한으로 이어지게 된다. 
&amp;nbsp;얼마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증파 여부를 결정하기 앞서 아프간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에 경례하는 사진이 전세계에 타전됐다. 또 미국이 멀게는 1·2차 대전,한국전, 베트남전에서 부터 최근 아프간, 이라크 등에서 사망한 미군의 유해를 끊임없이 찾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최근에는 북한을 방문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한국전 당시 전사한 마오저뚱 전 중국주석의 장남인 마오안잉의 묘소를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amp;nbsp;보통은 수십년전 사망한 이름 없는 전사자의 유해를 찾는 미국의 노력을 두고 “국가가 국민에 대한 예우를 다한다”며 높은 평가를 내리곤 한다. 국가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에 대해 예우를 하는 것을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과거 패권국가 당나라가 고구려 침공에 앞서 전몰장병들의 유골을 수습한 예에서 보듯, 패권국가들의 이같은 행보는 무엇인가 찜찜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을 가슴 한켠에 생기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이나 중국 같은 패권국가들이 어찌 보면 과도할 정도로 전몰장병을 예우하는 데는 어떤 속마음이 있는 것일까. 
&amp;lt;참고한 책&amp;gt; 
노태돈, 삼국통일 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description>
<pubDate>Sun, 08 Nov 2009 23:58:00 +0900</pubDate>
<category>블로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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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item>
<title>제국주의와 기독교,나치,공산당 모두의 ‘얼굴마담’,파우스트</title>
<link>http://blog.hankyung.com/raj99/318653</link>
<description>
괴테, 『파우스트』 

&amp;nbsp;
&amp;nbsp;파우스트. 파우스트 민담은 초기 루터교에선 “악마와의 결탁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이어 대문호 괴테가 비극 ‘파우스트’를 쓴 뒤에는&amp;nbsp; 한갖 시장거리에서나 거론되는 잡스런 얘기가 아니라 독일 최고의 작가가 쓴 고급스런 얘기로 탈바꿈 하게 된다. 19세기에 접어들면 파우스트는 독일 민족 고유의 전통을 띤 신화적 인물로 ‘급’이 올라가게 되고, 독일 통일 이후에는 ‘활동하는 지식인’이자 ‘식민지 개척에 앞장서는’ 모델로 재조명 된다. 진보세력들도 파우스트를 “자기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 독일인의 이미지로 재창조해냈고, 20세기에 접어들어선 니체의 초인사상과 결합된다. 곧이어 나치독일은 파우스트를 인종정책의 도구로 활용하기에 이른다. 파우스트는 2차 대전후 동독에선 “사회주의적 민중해방의 선도자”로 떠받들게 된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모두 저마다 보고 싶은 점들을 파우스트에 투사해 저마다의 파우스트 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amp;nbsp;이는 해설서만 1000권이 넘는다는 괴테 ‘파우스트’자체의 난해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자의적으로 파우스트를 해석하면서 나왔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amp;nbsp;원래 파우스트 전설의 주인공은 요한네스 파우스투스라는 역사적 인물로서 1460-1470년경 하이델베르크 근처 헬름슈타트 인근에서 태어나 1536-1539년 사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학사(1484)학위와 석사(1487)학위를 받은 뒤 방랑생활을 하다 신학과 의학을 연구하다 이후 크라쿠프로 도주해 마술에 몰두하면서 유대계 신비학자들과 교제하면서 점성술 등을 연구한 예연자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amp;nbsp;그는 당대의 학자들 사이에선 ‘사기꾼’으로 불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비행시도를 하고, 마울브론에선 금을 제조하는가 하면, 에어푸르트에선 호메로스의 주인공들을 주문으로 불러내는 기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악마를 개의 모습으로 만들어 다니던 파우스투스는 뷔르템베르크의 어느 여관에 투숙했다가 “오늘밤 놀라지 말라”는 예언을 한 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즉 당대인들 사이에선 악마에게 살해된 것으로 믿어진 괴짜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amp;nbsp;하지만 이 황당한 기행을 일삼은 역사적 인간이 죽고나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점차 민담으로 형성돼 갔다. 그러면서 스토리에 살도 붙어 나갔다. 
&amp;nbsp;그러던 중 1587년 프랑크푸르트의 출판업자인 요한 슈피스가 ‘지나친 마술사 요한 파우스트 박사의 이야기’라는 이름의 민중본을 발행하고, 십여년 사이에 19쇄가 출간될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된다. 
&amp;nbsp;이어 파우스트 박사와 악마와의 계약이란 테마는 영국과 독일의 대문호에 의해 재창작되기에 이른다. 영국에선 말로우가 희곡 ‘포스터스 박사의 삶과 죽음에 관한 비극적 이야기’를 1604년 출간하고, 독일에선 괴테가 그 유명한 ‘파우스트’를 쓰면서 민담은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amp;nbsp;괴테의 파우스트에 앞서 독일내에선 파우스트 박사를 소제로 한 작품들이 잇따라 선보였다. 17-18세기 동안 독일내에선 다양한 형태로 변형된 민중본들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의 비드만은 1599년 슈피스본을 확대한 책을 내게 되고, 1725년에는 ‘기독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익명의 작가가 새로운 파우스트 요약판을 내놓게 된다. 또 17세기 동안에는 유랑극단들이 파우스트의 스토리를 공연하며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괴테 역시 어린시절 인형극을 통해 파우스트 스토리를 접하게 된다.)18세기에는 계몽주의 작가 레싱이 선이 얼마나 빨리 악으로 변하는가를 주제로 미완성작 ‘파우스트 박사’를 남기기도 했다. 
&amp;nbsp;하지만 파우스트에 오늘날과 같은 클래스의 힘을 불어넣은 사람은 누가 뭐라해도 괴테다. 괴테가 없었다면 파우스트의 민담은 아마 ‘전설의 고향’ 수준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괴테가 평생에 걸쳐 집필한 비극 ‘파우스트’는 공간적으로는 천상에서부터 지옥을 거쳐 지상에 이르는 전 우주를 포괄하고,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이르는 3000년의 세월을 배경으로 하는 스캐일 큰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괴테 이전의 작품들이 주인공이 신의 저주를 받은 죄인으로 지옥에 끌려가는 것으로 그린 반면, 괴테는 파우스트의 영혼이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 이끌려 천상으로 인도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괴테는 전통적 작품들을 단호히 거부하고 선을 그은 것이다. 
&amp;nbsp;묘하게도 괴테 이후 파우스트는 마침 부상하고 있던 독일 민족주의와 어울리면서 예상치 못한 ‘대표’역할을 연이어 떠맞게 된다. 
&amp;nbsp;나폴레옹의 독일 점령으로 민족적 정체성에 위협을 느낀 낭만주의자들은 파우스트를 독일 민족 고유의 전통을 띤 신화적 인물로 격상시켰다. 파우스트는 순식간에 기행을 일삼는 무엇인가 이상한 인물에서 전형적인 독일인으로 동일시되고 이상화된 것이다. 
&amp;nbsp;가장 위대한 독일 작가가 썼다는 이유로 파우스트는 작품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 이상에도 불구, 국수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 변화되게 됐다. 특히 비극 제2부에 나오는 식민지 개척사업,눈먼 환상가로서 자기 기만에 빠진 파우스트의 환상적 독백 등에 민족주의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amp;nbsp;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독일인들은 파우스트에게서 △부단한 노력 △팽창의 동력 △행동에 대한 찬양 △주저없는 식민지 사업 등의 요소들을 뽑아냈다. 파우스트는 때로는 행동주의적 영웅적 남성의 표본이 됐고, 때로는 제국주의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amp;nbsp;특히 19세기 전반에 이상적 독일인과 동일화되기 시작한 파우스트는 1840년 이후 활동하는 유능한 인간으로서 현실성을 지향하는 인물의 대표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태초에 존재했던 것은 말씀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파우스트의 대사는 경험과 실천을 중시하는 목소리로 해석되며 힘을 얻어갔다.“모든 이론은 잿빛이고 생명력 빛나는 나무는 초록색”이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졌다. 
&amp;nbsp;다른 한편에선 과거 지향적 보수적 낭만주의자들의 파우스트 우상화 작업과 별개로 진보성향 청년 독일파 작가들이 파우스트를 젊은 독일과 동일화 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파우스트가 학자적 삶에서 세속적 삶으로 이행하고, 사변적 관념에서 감각적 영역으로 이행하는 것을 놓고 하이네는 독일인들이 발전시켜야 할 자기 해방과정의 모델로 삼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진보파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독백중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이란 표현에 주목, 당시 그들의 새로운 자유국가에 대한 희망을 그리는데 사용했다. 
&amp;nbsp;1871년 독일제국이 성립되면서 파우스트는 새로운 민족적 자의식과 새로운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활동적이고 유능한 인간상으로 평가된다. 이제 ‘잘나가는’ 독일제국의 신민들은 파우스트의 비행에 침묵하고, 파우스트 이야기에서 비극적인 것을 배제하며, 내적모순을 감추는 식의 완전무결한 해석에 열중한다. 
&amp;nbsp;제국주의자들은 파우스트의 식민지 개척 노력을 극구 찬양하고, 식민지 개처가로서 파우스트에 스스로를 일치시켰다. 이제 파우스트는 ‘거인적 노력’과 ‘영웅적 위대함’의 상징이 된 것이다. 
&amp;nbsp;20세기초 파우스트는 초인개념을 이루는 니체사상과 결합된다. 1차 대전 패배후 상실감에 젖었던 슈펭글러는 ‘파우스트적 인간’을 ‘독일적인 것’과 동일시 했고, 퀴네만은 1930년 파우스트를 ‘지도자’로 칭하기에 이른다 
&amp;nbsp;나치 시대가 되면서 파우스트는 “피와 토지 이데올로기”의 소제로 활용됐다.나치 제3제국 시대에 히틀러와 파우스트가 동일시되면서 파우스트는 나치의 인종정책 선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amp;nbsp;역설적이게도 파우스트는 나치에 반대하는 세력에게도 주목받았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토마스 만은 1947년 소설 ‘파우스트 박사’에서 “절대와 무한을 추구하면서 인간성의 척도와 이성을 파괴하는 독일 지식인의 전형”으로 파우스트상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amp;nbsp;2차 대전후엔 동독에서 파우스트가 “사회주의 토지개혁의 상징”으로 이념화되기도 했다. 2차 대전후 동독에서 파우스트는 모범적 영웅으로 도식화된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긍정적이고 문제성 없는 모범적이고 무해한 고전적 인간상으로 주목받은 것이다. 1962년 동독 공산당 지도자 울브리히트는 파우스트를 일종의 ‘민중서’라고 평가하기에 이른다. 즉 울브리히트는 파우스트의 “자유로운 땅에서의 자유로운 백성”이라는 결론 부분을 “괴테는 노년의 파우스트로 하여금 해방된 민중의 창조적 공동 노력만이 최대의 행복을 낳는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자기편한데로 해석한 것이다. 
&amp;nbsp;요즘 드라마 ‘선덕여왕’은 역사적 실체와는 무관하게 보는 사람데로 갖가지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며 재탄생되고 있다. 얼마전 10월 26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안중근 의사가 또다시 재부각되면서 이들 역사적 인물들이 현실의 문제의 상징으로 새 생명을 얻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파우스트를 만들고 있는 것인지, 또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만의 파우스트에 대한 시각은 과연 어느정도 수준에 해당하는 것일지 잠시 궁금해졌다.&amp;nbsp; 

&amp;lt;참고한 책&amp;gt; 
이인웅 편, 파우스트 그는 누구인가?, 문학동네 2006 
안경환, 법과 문학사이, 까치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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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Thu, 05 Nov 2009 01:10:00 +0900</pubDate>
<category>블로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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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상하이 ‘최후의 날’ 드러난 광속같은 시류영합- 편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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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amp;nbsp; 
편승 

&amp;nbsp;1949년 중국 공산화의 마지막 과정은 대단히 드라마틱하다.어느 한 순간 팽팽하던 세력 균형이 무너지면서 급속하게 공산당 쪽으로 힘이 쏠리는 것을 살필 수 있는 것. 한순간에 반도로 불리던 공산군에게, 빵빵한 군수지원을 받던 국부군(국민당군)이 대거 항복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전장에서 싸우던 군인,후방에 숨죽이던 민간인 할 것 없이 너도 나도 대세에 순응하고 시류에 편승하는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이같은 세력 변동의 최후 정점이 된 장소가 바로 중국의 경제 수도 상하이다. 

&amp;nbsp;1948년말경이 되면 국민당과 공산당간 힘의 우열관계는 공산당 쪽으로 급격히 기울게 되고, 국민당측 사기는 급속도로 위축되게 된다. 이에 따라 국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고, 이들은 대부분 공산당 지지로 돌아서게 된다. 
&amp;nbsp;결국 1949년 1월 21일 장제스(장개석 이라는 표기가 훨씬 자연스럽긴 하다.)는 중화민국 국가원수 자리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어 장제스의 후임 리쭝런이 공산당측과 휴전 협상에 나서고 열흘뒤 중국 공산당 군대가 베이징에 입성한다. 
&amp;nbsp;2월이 되면 국민당 세력은 중국 남부 광둥 지역으로 위축되기에 이르고 4월 20일에는 공산당 군대가 양쯔강을 도하해 남하작전을 펼치게 된다.도하 작전 3일만에 난징이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고 리쭝런은 광둥지역으로 도망가기에 이른다.6월이 되면 다시 국민당내 실권을 장악한 장제스가 대만으로 국민당 정부를 옮기게 된다. 
&amp;nbsp;장제스가 대만으로 쫓겨가기 전 국민당이 마지막까지 사수하고자 했던 곳은 바로 상하이였다.그리고 상하이는 국공내전 말기 대세변화에 빠르게 순응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무대이기도 했다. 
&amp;nbsp;1949년 4월말경이 되면 공산당 군대는 난징과 쑤저우,항저우 지역을 차지하고 상하이를 압박하기 시작한다.하지만 국민당 3군 사령관 당응포는 “상하이를 6개월에서 1년간만 지켜내면 전세는 수세에서 공세로 반전될 것”이라는 장제스의 희망섞인 주문과 함께 상하이 사수를 명받는다. 
&amp;nbsp;당응포의 휘하에는 15만명에서 20만명 가량의 군대와 민간인이 있었고 형식적으로 육·해·공군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상하이에는 5000여개 콘크리트 벙커와 각종 철제 방어막, 물이 가득찬 도랑 등 각종 바리케이트들이 시내 곳곳에 산제해 있었다. 이와 함께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에는 촘촘한 지뢰밭이 설치됐다. 국민당으로선 잘만 하면 버텨낼 수 있을 듯도 싶었다. 
&amp;nbsp;하지만 상하이 방어태세를 살피던 공산당군의 공격이 상하이 남쪽과 동남쪽,서남쪽,서쪽 순서로 전개됐다.이같은 공산당의 전략은 철길을 끊고 쑤저우 물길을 막아 상하이를 그 배후지로부터 단절시키는 의미를 띠고 있었다. 
&amp;nbsp;중국 공산당은 5월이 되자 상하이시로 진격을 시작했다.하지만 3일 내내 내린 비로 상하이 인근이 진흙밭이 되면서 제대로 진군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진흙탕 평원은 바퀴 달린 차량들이 지나갈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각종 중장비와 무기,탄약들은 모두 손으로 옮겨져야 했다. 
&amp;nbsp;5월 12일 상하이 남부지역을 비롯한 주요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공격이 감행됐다.13일에는 군사적 주요 철도역이었던 칭산웨이까지 공산군이 진격했고 14일 공산군은 국민당 해군 지휘관을 사로잡고 황푸강 우안을 확보하게 된다. 
&amp;nbsp;이와 함께 공산군 주력이 양쯔강 방면에서 공격할 태세를 취하게 된다.17일 공산군은 상하이 동북부 카오치아오에 진군하게 되고 이에 국민당 사령관 당응포는 카오치아오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기로 결정한다. 당응포는 카오치아오에 육군과 해군력을 총동원했지만 결국 공산군의 진격을 이틀 이상 막지 못하게 된다. 결국 국민당 함정들은 도시 탈출을 모색하게 되고 국민당의 마지막 거점이던 우성지역은 국민당의 덩케르크가 되고 만다. 
&amp;nbsp;바로 그시간 공산군을 피해 상하이로 도망쳤던 민간인들은 아직 해외 치외법권 지대였던 국제 조계지와 프랑스 조계지로 몰려들게 된다.이와 함께 상하이를 빠져 나가는 인구도 급증하고, 상하이에 거주하던 서방 외국인들도 탈출대열에 동참한다. 불과 몇주 사이에 상하이에서 거주하는 영국인수는 4000명에서 2000명으로 반토막이 된다. 
&amp;nbsp;5월 14일 부터는 상하이시 외곽에서 총소리가 들리게 되고 18일에는 국민당군대가 우성 마저 모두 비우고 탈출하기에 이른다.상하이 시장 첸리양도 이때 상하이를 버리고 떠나게 된다. 
&amp;nbsp;이때쯤 되면 해상을 통한 탈출마저 불가능하게 된다.19일 쑤저우만에선 &quot;단 한척의 배도,단 한척의 정크선도,단 한척의 삼판도&quot;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amp;nbsp;20일에는 미국 영사가 미국인들에게 해군 함정이 떠난 뒤엔 어떤 보호도 기대하지 말라고 미국인들에게 통보하기에 이른다.마지막으로 상하이를 탈출하길 원한 미국인들은 미국 구축함이 보낸 바지선을 통해 탈출하게 된다. 
&amp;nbsp;곧 상하이와 외부를 연결하는 수단은 항공수단밖엔 남지 않게 됐다. 하지만 항공 연락망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5월 21일 상하이 공항에 대한 폭격이 시작됐고 항공기 이착륙이 불가능해졌다. 
&amp;nbsp;결국 5월 24일 상하이에 남겨진 일부 국민당군들은 실상과는 정반대인 ‘승전’퍼레이드를 마지막으로 벌이기로 결정하고 상하이시에는 마지막으로 국민당기가 펄럭이게 된다.(행사를 왜 했을까 싶긴하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국민당군들은 그들의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상하이 시민들의 일상 옷으로 갈아입은채 마치 시민들이었던 것인양 시민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amp;nbsp;이어 공산군 진주를 기다리는 상하이 경찰들은 팔에 붉은 완장을 착용했고,상점들은 재빨리 반공산당 구호들을 걷어 치웠다.상하이시에서 숨어서 활동하던 공산당원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활동하게 됐다.가장 놀라운 사실은 상하이 시장 첸리양의 뒤를 이어 임시 시장이 된 차오추강이 그동안 숨겨왔던 그의 비밀공산당원증을 공개한 것이었다. 
&amp;nbsp;결국 공산군이 진주한 뒤 ‘반란세력의 혁명움직임’은 ‘해방운동’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고 1949년 5월 24일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상하이가 ‘해방’된 날로 명명됐다. 

&amp;nbsp;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얼마나 관심이 있는 사안인지는 체감이 잘 안되지만 세종시(행정중심복합도시) 문제로 정가가 시끄럽다. 세종시 논란을 바라보면서 행복도시의 등장과 취소 논란 모두 시류와 여론의 눈치에 따른 대세 편승에 따른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몇년전 표를 의식해 대대적인 찬성표를 던졌던 여권내 정치인 상당수가 ‘국익’을 명분으로 입장이 180도 바뀌었고 여당내 실력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한마디에 또다시 여권 입장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게 됐다. 
&amp;nbsp;개인적으로는 행정중심복합도시안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세종시(행복도시)의 자생적 생존이 가능할지 의문이 드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과 별개로, 이 문제를 대하고 제기하는 위정자들의 태도가 순수한 국익을 위한 발로가 아니라 지나치게 대세에 편승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몇년 뒤 대선에서 다시 충청권이 캐스팅 보트를 쥐거나, 다른 정권이 들어선다면 또다시 시류를 타고 입장이 바뀌는 것은 아닐지 싶어서다. 
&amp;lt;참고한 책&amp;gt; 
Betty Peh-T'i Wei, Shanghai- Crucible of Modern China,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로이드 이스트만,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현대중국의 전쟁과 혁명 1937-1949, 민두기 옮김, 지식산업사 1994 
배경한, 장개석 연구- 국민혁명시기의 군사적·정치적 대두과정, 일조각 1995&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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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Date>Tue, 03 Nov 2009 01:27: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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