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이라는 병은 밖에서 들어온 풍이 아니고 안에서 신장속에 저장되어 있는 남녀의 정액과 애액인 생명의 에너지, 정(精)의 부족으로 뇌신경이 출혈되거나 억색(臆塞)되면서 오는 것입니다. 치매도 중풍과 유사한 이치로 발생합니다. 인체의 정수(精)가 부족하면 양기가 집결되어 있는 뇌가 오그라듭니다. 뇌수, 척수, 골수의 신경계는 모두 동일한 정수조직입니다.

 

중풍, 치매, 암, 당뇨 등의 성인병은 그 발생 원인이 모두 정수 부족과 그로 인하여 수화가 엉키고 잘못되어 발생하는 것입니다. 현대의학에 이들의 치료법이 있지만, 사실상 모두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도가의 여동빈의 제자라고 전해지는 진선생이 쓴 의서에 의하면, 사람이 질병으로 요절하는 바, 그 원인의 반은 색욕으로 인하여 정(精)을 남발하기 때문이요, 나머지 반은 간기울결로 인함이라고 합니다. 
 
정의 남발로 인하여 정수가 부족하면 인체는 목(木)인 간(肝)기운이 자양 받지 못하여 헛된 화(火)가 일어나 토(土)인 비위(脾胃)의 소화기를 극하게 되고 비위인 토는 폐금(肺金)을 공격하고, 폐는 목을 제압하지 못하게 되어 인체는 상극으로 달리게 됩니다.


인체의 정이란 밖으로 나가면 수(水)의 상태이고 안에 있으면 화(火)의 상태입니다. 정수가 부족하면 인체는 신(神)의 일부라 일컫는 신경계통이 교란되어 마비상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수행의 제일로서 ‘교감하여 정(精)을 누설하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정을 되돌리면(逆回) 원기(元氣)가 됩니다.
 
간기울결이란 요즘 소위 말하는 스트레스입니다. 적당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면 간기가 울결되어 음화가 폭발하고 화의 순환이 순조롭지 못하여 소화기를 공격하고[木克土] 폐금을 공격하며 신수를 생하지 못하고 인체는 상극으로 나가게 됩니다.
 
정수(精水)가 부족하면 신장이 허해지므로 오장이 허약해지는데, 이는 고혈압, 당뇨, 암, 치매 등 면역력 부족의 모든 성인병의 요인이 됩니다. 간기울결은 우울증, 심장병, 위장병 등의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가령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음탕한 생각이 일어나면 인체는 즉각 뇌에서 명령을 내려 기운이 분산되고, 정(精)수는 튀어나가고자 하고 몸은 분열이 됩니다. 음탕한 생각으로 음화(陰火)가 일어나면 이는 자기 몸을 해치는 적으로 변합니다. 음화(陰火)가 발동하지 않도록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면 진기(眞氣)가 길러져 몸의 기운이 통일됩니다.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안호상(1902-1999)박사가 문교부장관 재직시에 중국의 저명한 문학자이며 평론가인 림어당(1895-1976) 선생을 만나 여담으로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 나라까지 문제가 많다"고 하자 림어당 선생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東夷族 조상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소?"라고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 박사가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당시 같은 입학생인 중국 학자 서량지(徐亮之)가 한박사를 찾아와 말하기를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서량지)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겠으니 받아달라며 큰 절을 올렸다."



1930년대 장려화와 그 문하생들의 노력으로 중국 고금지명 대사전이 편찬되면서 우리 조선의 역사가 완전히 중국인의 입맛에 맞게 조작되었으며 해방후 백화사기의 편찬으로 다시한번 조선의 역사는 지나인들에 의하여 삭제 왜곡 조작이 되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위에 림어당, 서량지 같은 학자들은 그나마 양심이 있어서 자기들이 역사를 수정하였노라고 실토하고 있지 않습니까? 서량지 같은 사람은 그의 저서 중국사전사화를 통하여 모든 중국의 역사를 동이족의 것으로 인정하였던 사람입니다. 그 말이 사실 이라면 1930년대 미국에서 출세한 중국인 학자들과 해방후 홍콩 대만 등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조선역사 말살작업이 진행되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개석 총통과 대륙 백제 이야기

김현태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중국의 역사왜곡과 날조를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거니와 이러한 비판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유효하다고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주은래(周恩來) 전수상도 지적한 바 있다.

  
중국 지도층의 역사인식과 관련해서 백범 김구 선생의 일화가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중경(重慶)으로 후퇴한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함께 피난 온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만찬에 초대했었다고 한다.

 

이때 장 총통은 자기 고향이 옛 백제 땅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장 총통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지적 입장에서 이런 역사인식을 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들은 김구 주석은 충격과 함께 자괴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뒷날 술회한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가 중국 땅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김구 주석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고 한다.

장개석의 고향은 양자강(揚子江) 남쪽 절강성(浙江省)이므로 옛 백제는 양자강 이남지역까지 지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서량지나 임혜상 같은 양심있는 중국사학자들은 중국역사의 상고사는 한민족의 역사라 말한다.

그리하여 가시마 노보루같은 일인학자는 한(漢)족은 기껏해야 한(韓)을 흉내내어 이름붙인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고사는 밝혀져야 한다. 중국의 식자층은 양자강 유역이 전통적으로 동이 9족의 것임을 너무도 잘 안다.

 

장개석은 이 사실을 너무 잘알고 있어서 임정의 이시영 전 부통령에게 역사는 제대로 알고 독립운동하시는가 하고 물었던 것이다. 한데 오늘날의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어느 한구석에도 이런 기록이 없다. 오늘날의 역사교과서 뿐만 아니라 김구 주석이 듣고 배웠던 당시의 역사책에도 이런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기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하게 왜곡되었음을 반증해 주는 하나의 예증에 불과하다.
  
[지은이/옮긴이] 박민우, 시대소리 역사연구가

 

 

 

 주은래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두 나라,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 될 때까지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현대문명의 뿌리는 동양에서

컴퓨터, 휴대폰, 자동차, TV …. 이제는 단 며칠도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문명의 이기들. 그런데 서양과학의 눈부신 발전 덕분이라고 믿고있는 현대 문명의 시원이 사실은 동양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최근 빅뱅 우주론의 거장 스티븐 호킹은 “양자역학이 지금까지 해놓은 것은 동양철학의 기본 개념인 태극, 음양, 팔괘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 한마디에 동양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음을 직감하였을 것입니다.

 
 
 인류문명의 아버지, 태호 복희

 

태호 복희씨는 5,700년 전 배달국의 5대 환웅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로서, 성은 풍씨(風氏)요 이름은 방아(方牙)이며, 호는 태호(太昊)로서 ‘크게 밝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삼신(三神)이 강령하는 꿈을 꾸고 백두산에 가서 천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천하(天河, 송화강)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나타난 상(象)을 보고 하도와 팔괘를 처음 그려 역(易)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복희씨 때 상과 수로써 상징되는 하도와 팔괘가 만고불변의 진리로서 세상에 드러나자, 역학의 도맥은 문왕, 주공, 공자를 거쳐 이어졌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손룡자, 추연 등을 거쳐서 음양오행의 변화원리로 체계화되고, 노자 열자 장자에 의해 논리를 넘어 우주신비경의 궁극을 설명하는 우화형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로써 역(易)은 동양사상의 최고봉이자 문화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생활철학이 된 것입니다.

복희씨께서 태어나신 곳은 어디인가
 
현재 중국에는 많은 복희묘와 복희씨의 사당이 있다. ‘천하제일묘’라 불리는 가장 큰 규모의 하남성 회양현 복희묘, 가장 최초로 세워진 신락시 인조묘, 『환단고기』에 나온 산동성 미산현 복희묘, 그 외에도 하남성 맹진현의 용마부도사, 감숙성 천수시의 복희묘, 괘태산 복희대, 서화현 구지애가 있다. 왜 이렇게 복희묘와 사당이 여러 곳에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자료조사 중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태호 복희씨는 배달 신시에서 태어나 송화강(추정)에서 팔괘를 그으시고 산동성 어대현(현재 미산현)에 묻히셨다고 한다. 이를 볼 때, 복희씨의 이동경로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중국 동쪽 해안선을 타고 내려오게 된다.
  
 

 

 

 

 

 

 

 

 

 

 

 

 

 

 

 

 

 

 

 


 

 

 

 

 

 

 

 

 

 

그런데 중국학자들의 입장은 그와 반대로 중국대륙 서쪽 깊숙한 곳(현재 감숙성 천수시)에서 태어나 하남성 회양현에서 도읍을 정하고 그곳에서 돌아가셨다고 본다. 하남성 회양현에서 조금만 동쪽으로 가면 산동성 미산현이 있다. 즉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복희씨의 이동경로는 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주해 왔는데, 산동성까지는 뻗어 나오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명확히 엇갈리는 두 가지 이동경로,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이든지, 아니면 둘 다 지어낸 이야기?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복희씨에 대한 문헌기록은 「제왕세기」이다. 거기에 따르면, 복희씨는 ‘구이에서 태어나 성기(成紀)에서 자라고 어대현에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성기(成紀)라는 지명을 중국대륙 서쪽에서 찾다보니 현재 감숙성 천수시 주변의 ‘성기’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구이에서 태어났다는 대목은 구이족(九夷族, 동이족의 다른 말)이 아닌 구지산(仇地山)에서 태어난 것으로 끼워 맞추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복희씨를 동방 동이족이 아닌 서방 중국인의 조상이며, 동방으로 문물을 전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언제 이러한 관점이 정해졌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졌다. 현지 답사 중 알게 된 것은 강택민 주석이 천수시에 ‘희왕고리(羲王古里)’라는 글을 써준 이후 천수시를 복희씨의 고향으로 정해 버렸던 것이다.
 
중국 전역에 펼쳐진 수많은 복희묘와 복희사당은 문화혁명(1966∼1976) 때 파손되어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그런데 강택민 주석이 글을 쓴 그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묘와 사당이 새로이 복원, 보수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산동성 미산현의 복희묘는 현재 중국 복희묘 중 규모가 가장 작으며, 더욱이 사당 내부는 사당을 보수하는 인부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
 
산동성의 복희묘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몇 가지 단서만 찾아낸다면 한민족의 조상인 복희씨의 역사, 나아가 배달국의 찬란했던 역사를 복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를 손에 쥘 수 있을 듯했다.

 
이미 중국사가 되어버린 태호 복희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희망은 하북성 신락시의 ‘복희제의’라는 축제에 참석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 절실히 실감했다. 하북성 신락시는 소림사가 있는 석가장시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도시다.

 

그 신락시에 제곡고신께서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세운 최초의 복희묘인 ‘인조묘(人祖墓)’가 있다. 그곳에서 지난 5월 2일부터 5일까지 제3회 ‘복희제의’가 벌어졌다. 원래 그 축제기간 동안 신락시는 외국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행사 참가는 물론 촬영도 불가한 지역이다.

 

그런데 북경에서부터 안면을 튼 복희문화연구소 소장, 신락시 시장, 축제관계자 등의 인맥을 통해 운 좋게도(?) 신락시 행사관계자의 자격으로 입장하게 되었다.
 
이번 행사 관람인원이 약 2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 규모를 실감케 했던 큰 행사였다. 또한 그곳에 200명 가량의 복희 전문가들이 모였다. 국내에서 복희씨에 대한 취재를 하면서 복희씨에 대한 자료의 빈곤함, 강단사학계과 재야사학계의 견해차 등으로 인한 어려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복희씨 연구와 관련해서 단 한 명의 제대로 된 전문가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작은 도시 신락에서 만난 복희 관련 전문가들은 수십 개 단체, 수백의 인원이었고, 또한 그들은 매년 이러한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더욱이 축제에 참가한 20만 명의 중국인들 대부분이, 아니 거의 전부라 해도 무방할 터지만, 복희씨를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게까지 느껴졌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인 복희씨를 그 이름조차 잃어버린 사이, 이곳에선 복희씨에 대한 제사는 이미 그들의 생활 일부였고, 인류의 시원문화가 복희씨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자부심이었으며, 그 힘으로 자기네들이 세계를 통일 지배할 수 있다는 역사적 우월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천하제일묘’라 불리는 하남성 회양현의 복희묘는 행사가 열리면 100만 명의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과연 이러한 저력을 무시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상고사를 밝혀 세계무대에 우리의 주장을 펼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술 더 떠서, 중국의 수많은 학자들은 ‘태호 복희씨는 동이족’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동이족은 현재 중국 영토 안에서 한족에 흡수된 고대 소수민족의 하나에 불과했다. 우리 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참으로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문화의 태일신(泰一神), 태호 복희
 
이렇게 태호 복희씨를 추앙하고 있는 중국 땅에서 아이러니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많은 사당과 무덤에 수많은 팔괘와 육십사괘가 그려져 있지만 제대로 그려진 팔괘는 단 한 곳(하남성 천하제일묘)밖에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실소하기도 했다.
 
태호 복희씨의 사당에 가보면 웬만한 곳에는 일획개천(一劃開天)이란 글귀가 써 있고 용마상이 있으며 복희씨의 업적도가 그려져 있다(하지만 미산현에는 없다). 업적도를 한 장씩 사진으로 담으면서 지금까지 글로써만 읽어왔던,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태호 복희씨의 업적을 마음속에 새겨볼 수 있었다.
 
복희씨께서는 인류문화의 모태라고 하는 팔괘와 하도를 지어 후세에 전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문자를 만들고, 인류의 최초의 성씨를 열었으며, 결혼제도를 세우고, 가축사육법을 개발하는 등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류문화의 근간을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용봉문화원류』의 저자 왕대유는 이러한 복희씨에 대해 “태호 복희(太昊伏犧)는 인류문화(人類文化)의 태일신(泰一神)이다”라고 말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감숙성 천수시에서 복희씨의 업적도를 보며 진정 인류문화의 시조이신 태호 복희씨, 가슴속에서 그 분이 큰 태양처럼 밝아오는 것 같았다.
 
황사의 발원지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새파란 하늘 아래의 천수시 복희묘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용마를 만날 수 있었다(참고로, 용마라고 하면 중국에서도 대부분 용의 머리에 말의 몸을 가진 괴수를 생각한다.
 
그런데 용마란 본래 8척(2.4m) 이상의 아주 큰 말, 혹은 물에서 나왔으므로 비늘이 있는 말을 뜻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하도 문질러서 콧등이 반질반질해진, 비늘까지 달려있는, 실제와 가장 가까울 것이라 생각되는 용마였다.  

 

 
 

 

 

 

 

 

 

 

 

 

 

 

 

 

 

 

 

 

 

복희씨가 그린 하도에는 자연 그대로의 형상을 상수학으로 기본법칙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이제 복희왕이 밝혀놓으신 역(易)의 원리가 인간생활 문화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고, 인류 문명사의 발전에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 사례를 통해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는 만물의 척도

 

수학은 서구문명의 발전과정에서 문화적으로 중요한 힘이 되었습니다. 수학은 과학의 등대 역할을 수행하면서, 과학이 현 문명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도달하도록 끊임없이 도움을 주어왔습니다. 현대 과학은 수학 때문에 발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근대수학의 발전에 초석을 다진 인물은 B.C. 532년경에 활동한 피타고라스입니다. 에게해의 사모스섬에서 태어나 이집트에서 유학하는 동안 동양으로부터 전해진 낙서, 마방진 등의 지식을 얻게 되고, 이후 이탈리아 남부에 정착하게 됩니다.
 
탈레스는 우주의 근본을 물(Water)이라 보았고, 데모크리토스는 원자(Atom)라고 본 데 반해,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근본을 수(Number)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수, 수적 비례, 그리고 조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수는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하였으며, 사물은 수(數)들로 구성되어 있고 수(數)는 사물과 닮았으며 많은 경우 사물 자체라고도 했습니다.
 
즉 수학의 원리야말로 만물의 원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수들은 직선과 곡선, 정지와 운동 같은 사물의 대립된 성격을 설명해 주는데, 심지어 추상적인 개념들마저 고유의 수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마방진의 비밀

 

마방진은 낙서(洛書)로부터 유래하고 있습니다.
 
약 4천여년 전, 우(禹) 임금이 치수공사를 하던 중에 물 속에서 나온 거북이 등에 있는 무늬를 보고 낙서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낙서의 수를 그대로 옮기면 3차 마방진이 되는데, 가로·세로·대각선의 합계가 모두 15가 됩니다
 
그 후 사람들은 마방진의 부적같이 신비한 이미지에 매혹되었고, 인도·페르시아·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비밀스럽게 중동·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마방진은 한마디로 숫자 속에 숨겨진 우주의 질서를 의미합니다. 내부의 숫자들이 제멋대로 존재하지 않듯, 백사장의 모래알이라든지 이른 새벽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혹은 숲속의 이름 모를 잡초라 할지라도 마방진의 숫자처럼 제 위치에서 전체 조건 값에 참여하면서 질서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학자들도 수 천년 동안 숫자의 합이 일정한 마방진에 관심을 가졌으면서도 명쾌한 답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신비한 성질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실체가 무엇인지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서양의 수학이 동양의 상수원리에 일관된 뿌리를 두고 발전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부분 수학의 기본개념이 역학의 상수원리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팔괘의 행렬은 선형방정식의 해법이고, 그 순열조합은 확률론과 게임이론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복잡한 수식을 떠나 수학은 인류문명사를 통해 예술·철학·종교·사회·과학에 개입하면서, 문화의 다른 부분들과 연결되어 살아있는 귀중한 사고 덩어리를 형성한 것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현대 서구 문명의 형성자 노릇을 아낌없이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팔괘에서 시작된 이진법의 원리

 

20세기 최대의 발명품은 과연 무엇일까요? 비행기, 핵폭탄, 텔레비전, 장기이식,  유전자  복제 등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벅찬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현대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컴퓨터의 발명’이야말로 빠뜨릴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컴퓨터는 이진법의 계산원리에 의해 작동됩니다.
 
그 이진법에 관한 생각은 주역의 64괘 표기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서양에서 이진법은 17세기초에 고안되어 나왔는데, 이원론에 심취해 있던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주역 이론에 이진법이 함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체계를 정립시켰습니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프랑스 전도사 부베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주역을 배우고 괘상(卦象)을 스스로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한문으로 쓰여진 주역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동양을 다녀온 신부들의 보고서를 입수하여 주역을 공부하였습니다.
 
마침내 1697년 ‘파리 과학 학술원’에서 자신이 구상한 개념을 정리하여 「이진법 정수론 주해」 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주목할 것은 그 역사적인 논문의 부제가 ‘0과 1의 기호를 사용, 고대 동양 복희의 괘상에 나타난 이진법 산술이 갖는 의미와 그 효용성에 관한 고찰’ 이라는 것입니다.
 
그 무렵 1701년 부베가 라이프니츠에게 ‘복희 64괘 차서도’와 ‘복희 64괘 방위도’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이 도표를 받고 팔괘의 배열이 인류역사상 수학의 ‘이진법’ 원리를 제일 먼저 나타낸 것이라는 발견에 대해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1709년에 복희팔괘와 함께 이진수를 나타낸 분석표를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면서, “주역은 모든 과학의 열쇠이다.” 라는 부베 신부의 신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복희팔괘는 세 개의 효(爻)를 이용하여 ‘건태리진손감간곤’라는 여덟 개의 괘상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양(1)을 1, 음(0)을 0으로 생각하고 고쳐 쓰게 되는데, 팔괘를 이진수로 나타내면 111, 110, 101, 100, 011, 010, 001, 000과 같습니다.
 
이후 부호논리학의 대가가 되면서 “나의 불가사의한 이진법의 새로운 발견은 5천여 년 전 고대 동양의 복희왕이 발견한 철학서이며 문학서인 주역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주역을 보면 공자가 한평생 공부하고 나서, 모든 변화가 귀결되는 곳 즉, 선천세상이 마무리되고 후천세상이 처음 열리는 곳을, 팔괘의 방위로 “성언호간成言乎艮”이라고 하였습니다. 간방에서 말씀을 이룬다, 완성된 진리가 나오는 곳이 동북 간방이란 말입니다. 나무로 말하면 간艮은 열매입니다.
 

사실 한 그루 나무에 우주의 섭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뿌리는 손巽이고, 땅 위에 뻗은 줄기는 진震입니다. 진손震巽이 일체다. 또 꽃은 태兌고, 열매는 간艮이고, 천지기운을 받아 나무가 자라니 하늘은 건乾이고, 땅은 곤坤입니다. 그리고 일월의 물과 불기운으로 모든 생명이 생성됩니다. 그게 감괘坎卦 이괘離卦입니다. 이렇듯 한 그루의 나무에 천지 조화의 이치가 그대로 다 들어있습니다.
 

 

문명의 열매를 맺는 곳, 지구촌 문화를 통일하여, 전 인류를 보편적인 새 진리로 건져내는 그 곳이 바로 간방이란 말입니다. 지구촌 동북 艮方!  인류 문화가 바로 이 간방에서 시작되고, 최종 종결도 여기서 이뤄집니다.

 

증산도 종도사님께서는 “5,700년 전에 우리나라 태호 복희씨가 처음으로 시획팔괘(始劃八卦)를 하시고, 우주의 이법인 주역을 처음 그려 내놓으셨다. 인류문화의 모태가 주역이다. 여기서 자연 섭리의 꽃이 피고 인류문화의 꽃이 피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그 열매를 맺는 것은 역천불변의 천지이치이다.

 

이미 5,700년 전부터 우리나라 땅에 상제님이 오신다는 것이 천지이치로 예약이 되었던 것이다.”(道紀 135년 5월 증산도대학교 도훈 중에서) 
 
 
선천문명의 조종으로서 태호 복희씨가 상수(象數)와 팔괘(八卦)를 비롯한 주역의 원리로 세상을 크게 밝혀 놓으셨고, 주역을 근간으로 현대문명의 굵직한 주제들인 컴퓨터, 생명공학, 통신과 방송을 아우르는 디지털 문명이 융성하게 되었음을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www.jsd.or.kr

 

 

 

유, 불, 선, 기독교가 인류의 뿌리종교 신교로부터 흘러 나왔다는 뚜렷한 증거를 찾아 보기로 합시다.

 

1) 유교의 나들이

유교의 정신이 동방 東夷族인 한국의 신교정신에서 나왔음은 흔히들 다음의 중용 30장에 나오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증언으로 자주 인용합니다. [공자께서 후천 大同세계를 궁극이상으로 하여 펼친 유교 도덕의 원시조는 요, 순과 문왕, 무왕을 본받은 것이라 하였다.]
- 仲尼는 祖述堯舜하시고 혜(?)章文武하고, 上律天時하시고 下? 水土하시니라. 중용30
-

 

또한 요(堯)와 순(舜)임금은 그 혈통이 모두 동이(東夷)족 출신입니다. 요는 황제 헌원의 5세손이라 하고(史記 卷13), 황제는 동방의 우리 백민(白民, 백의민족이라는 뜻)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요임금은 동이족인 것입니다. 맹자는 순임금이 東夷사람이라 증언하였습니다.

 

 

유교의 종장인 공자 역시 혈통을 따지면 결코 중국인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뚜렷한 증거는 예기(禮記三篇檀弓上)를 보면 [공자는 은(殷)나라 사람이다]하였는데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 황하유역)지역은 중국학자(徐亮之, 林惠祥등)들에 의해서도 여기에 살던 은족(殷族)은 곧 동이사람이라는 것이 통설화 되어 있습니다.이상에서 우리는 유교의 정신적, 혈통적 뿌리가 신교의 종주국인 동방한국에 두고 생겨나서 역수입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불교의 나들이에 대한 증거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불교의 원형]이 한국에 실존해 있었다는 충격적인 역사적 사실이 많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몇해전에 이미 고인이 된 최인(崔仁)선생은 심혈의 역작인 [한국의 재발견]에서 "한국이 불교의 본래 발상지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많은 자료를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임승국 교수의 말과 같이 그가 던진 엄청난 파문의 투석은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를 실증해 주는 많은 역사적인 실례가운데 몇가지 만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도화상(阿道和尙)의 어머니 고도령(高道寧)은 그의 아들인 아도를 신라에 보내면서 "이 나라(신라)는 불법을 알지 못하나 그 경도(京都)안에 절터 7처(處)가 있으니 이는 모두 전불시(前佛時; 석가부처님 以前의 부처시대)의 절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도에서 석가모니가 탄생하기 전에 한국에 부처가 있었으며 불교의 원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과 제가전기(諸家傳記)에 모두 이르기를 "신라의 월성동용궁(月城東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으니 그 곳은 전불시(前佛時)의 절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본사(本師) 석가불은 제4존불(尊佛)이며 가섭불은 제3존야(第三尊也)라고 되어있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석가불 이전 가섭불(迦葉佛)시대에 이곳이 불국사(佛國寺)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민족의 특징은 백의(白衣)입니다. 그런데 고대에 인도인이 백의를 입고 관세음보살이 백의(白衣)를 입음으로 백의대사(白衣大士)라고 합니다.


 

화엄경에는 불교의 종주국이 바다건너의 나라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해중(海中)에 금강산(金剛山)이 있는데 옛날로부터 모든 보살들이 그 산중에 살고 있으며 현재도 법기(法起)라는 보살이 1,200명의 보살의 무리를 거느리고 금강산에서 상주하며 진리를 강설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법기는 중국 동진(東晋)시대(317 ~ 419년)사람인 담무갈(曇無竭)을 말한다. 옛날부터란 동진이전의 시대로서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372)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인 선생과 임승국, 송호수 교수의 말과 같이 중국과 인도에서 한국 불교도들이 한국을 찾아 온것은 본산지인 성지(聖地) 순례(巡禮)를 하기위해 모국을 찾아와서 수도하였다는 말입니다.

 

3) 기독교의 나들이

 

기독교의 역사는 서구문명의 발상지인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성립된 것입니다. 그리고 수메르인들의 뿌리는 바로 한민족이 세운 최초의 고대국가인 환국(桓國)의 12 제후국중에서 [수밀리]라는 한 국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중근동(中近東)의 유프라테스강.티그리스강 유역에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개척한 족속은 동방(東方)으로 부터 이주해온 슈메르족이었으며, '슈메르'는 '수밀리'라는 단어가 음가(音價)만을 달리 했을뿐 같은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이것은 곧 기독교의 근원이 우리 한민족의 정신세계인 환국(桓國)의 신교(神敎)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기독교가 한민족으로부터 비롯된 구체적인 증거를 하나하나 찾아 보겠습니다.

 

크렘머와 다글라스氏(美)
슈메르인은 東方으로부터 왔다
.


 

C.H 고든박사(英)
슈메르인들이 중근동(中近東)에 들어오기 前에 무슨 고대문자적(古代文字的)기호를 가지고 온듯하다.


 

上野景福(日本)
슈메르인들이 사용한 설형문자는 약 5000년전 태호복희씨(동이족)가 사용한 8괘 부호등과 비슷하다.

大英百科辭典
슈메르語와 한국어는 동일한 [교착어]로서 그 語根을 같이 한다
.


 

삼성기(三聖記)<국내자료 : 환단고기>
고기(古記)에 이르되 桓因氏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넓이가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이니 통괄하여 桓國이라 하였으며 그 환국에는 分國이 12나라였다. 그 12국 가운데 우르(虞婁 : Ur)國과 슈메르(須密爾 : Sumer)國이 끼어있다.

 

기독교 진리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모세五經의 뿌리를 살펴봄으로서 과연 기독교가 어디로부터 연유(緣由)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모세의 5경인 구약의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에 쓰여진 제사음식.性행위.종족번식.사회규율 등의 율법은 그 제정 유래 및 각 法條의 형식과 내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함무라비法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함무라비法의 기원은 바로 한민족과 인류최초의 법전인 수메르법전에 둘 수 있습니다. 다음의 구체적인 예를 봅시다.

 

뮐러(Muller)
유대인의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이 우루 땅에서 함무라비 왕의 고향인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오면서 함무라비 법전을 가져 왔을 것이다.


 

크레이(Clay)와 루즈(Lutz)
바빌로니아의 제1왕조의 제6대왕인 함무라비(BC 1704 ~ 1662년)왕이 공포한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 왕의 창작이 아니라 그 이전에 존재했던 슈메르 법전의 수정 보수판이다.


 

中田薰(일본 : 前동경大교수)
모세 5경의 母法은 함무라비法이고 함무라비法의 母法은 슈메르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동방 한민족의 한 지류(支流)인 수밀리(=수메르)족이 유프라테스.티그리스강 유역으로 흘러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키고, 이 문명이 곧 기독교 문명을 태동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은 이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태어난 슈메르인의 후손으로서 성장 후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던 것입니다. 유대교를 창설한 이스라엘 민족의 후손인 모세는 자기 민족의 수호신인 여호아를 중심으로 한 자기 민족의 정신적 단합을 도모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유대교의 사회 환경속에서 성장한 후 율법의 형식주의와 유대교인들의 타락을 보고서 그 한계점을 극복한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교인들에 의해 신흥 사이비 종교의 교조란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형성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기독교의 형성이 한민족과 인류의 뿌리종교인 한민족의 신교(神敎)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도교(道敎)의 나들이

일반적으로 중국의 道敎始祖를 황제와 노자라고 하는데 황제의 혈통은 동이족입니다. 노자의 국적도, 한(韓)씨의 성을 이(李)씨로 바꾸면서 자신이 동방 사람임을 말하였듯이 모두 동이족의 한국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제가 중국에서 폈던 도교의 가르침은 동방 청구국(靑邱國, 치우 천황 때의 우리 국호)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紫府)선사(仙師)를 만나 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음부경이라 불리우는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갔다는 사실을 보면 도교의 뿌리가 동방 한민족의 신교(神敎)의 한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신교가 점점 퇴화하면서 다른 3대 종교와 더불어 역수입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고자 하는 관심의 촛점은 이들 4대문명의 구심점으로서 그 이전에 실존한 전 인류의 아버지 문명에 대한 수수께끼입니다. 즉 중앙아시아의 어느 곳으로부터 현 인류 최초의 고대문명이 태동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역사의 여러가지 기록에 자세히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석유환국(昔有桓國) - 옛 昔,있을 有,밝을 桓,나라 國 즉, 광명의 제국(桓國)이라는 뜻.]이라 하여 이 문명은 천산(天山)산맥을 중심으로 실존한 한민족과 인류공동의 최초의 고대국가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환국문명은 천산 즉 파내유산의 아래 [동서가 2만리, 남북 5만리]인 방대한 문명의 대국으로서 파내유국으로도 불리웠습니다. 모두 <12환국>으로 나뉘어졌는데, 최고 지도자인 '안파견' 환인은 그 이름이 곧 '만인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광명의 제국(桓國)의 문명은 동,서 4대문명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인 근거는 북미의 오리건주에서 발굴된 짚신 75켤레가 동이족(東夷族)의 짚신과 흡사한데 방사선 탄소의 측정에 의하면 이는 약 9천년 전의 것이라고 합니다.

 

송호수 교수는 1982년 10월 7일에 현지 조사를 하여 미국 워싱톤 인디안 박물관(스미소니언)에는 이외도 나무절구, 소쿠리, 광주리, 베틀, 어망, 물레 등 우리 선조들이 쓰던 생활도구와 동일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고 합니다.(한민족의 뿌리사상, 26쪽)

 

 


이를 시간적으로 소급해 올라가 보면 인류문명의 주산(主山) - 천산 산맥은 그 주맥이 동북 쪽으로 거세게 뻗어흐르고 있어서 소련과 케나다의 국경인 베링해협까지 이어져 있다. 당시 1만년 전에는 베링 해협이 육교(陸橋)의 역할을 하여 이 곳을 타고 우리의 선조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민족의 이동은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이 붙어있었던 약 25,000년 전부터 이미 시작됐다고 합니다.(한국 상고사의 쟁점, 24쪽)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의 아메리칸 인디언은 백계(白系) 러시아 민족이 아니라 만주의 한민족이 빙해(氷海)를 넘어 알래스카를 거쳐 카나다로 가고 여기에 남는 것이 에스키모족이요, 더 진행한 것이 미국의 아메리칸 인디언이요, 또 더 진행한 것이 잉카(Inca)민족이라 하겠다.

 

 

지금도 잉카에는 한국고유의 풍속인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 새긴 목인형(木人形)이 여기저기 남아 있음을 본다. 알래스카의 박물관에는 불상(佛像)을 비롯하여 향로, 곡옥(曲玉), 촛대, 청자기등 무수한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즉, 동양민족이 흘러간 발자취를 쉽게 인정할 수가 있다. 카나다의 에스키모족이 기르고 있는 개(犬)는 소위 한국에서 간 개(犬)인 것이다. (민족문화의 연구, 89쪽)


 

환국의 12제국 중에서 수밀이국이 있었다. 그들이 서방에 문명을 세웠으니 현재의 수메르 문명이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중 가장 그 기원이 오래된 곳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이곳에서 인류 최초로 수메르 문명이 꽃을 피웠고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설형문자들을 발견하고 판독해 가면서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났다.

 
수메르인들의 기록과 연대는 아브라함 시대 보다 수세기 앞서는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인간 세상에는 이미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이들의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전까지 올라가며 이로써 성서고고학이 독점하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성서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수메르의 중요한 종교 도시인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다고 전하는데 본래 우르 사람이었던 그가 수메르 문명아래서 60여년을 살다가 가나안땅으로 가서 살적에 어느 나라의 말을 사용했고 그가 썼던 문자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자명해진다. 


 


 

수메르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을 판독해 나가는 과정에서 창조이야기, 홍수 이야기 등 수많은 내용들이 수메르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이 밝혀졌다.
 
수메르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문명이며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보다도 무려 1천년 전의 문명이라는데에 고고학자들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였었다. 수메르인들이 설형문자를 사용하고 직조기술의 사용으로 옷을 물들여 입고 다닐 당시 히브리인은 문자도 없었으며 동물가죽을 벗겨입고 다녔었다.
 
성서학자들은 인류최초의 문명 발상지가 팔레스타인 지역이라고 여겼고, 에덴동산도 그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오던 터에 수메르유적(지금의 이라크에 위치함)의 발견은 그야말로 전세계 크리스트교의 본질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길가메시 서사시는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거의 같다 

 

 

 

인류의 시원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들은 과연 어디서 왔는가? 이것이 수메르 문제의 화두이다. 그들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남긴 문자이다. 어느 두 언어가 같은 계통이라면 먼저 언어의 특징이 같아야 하고, 문법 구조가 같아야 하고, 유사한 언어 특히 수사가 같아야 한다.

 

 우리가 인도와 유럽의 언어가 같다고 하는 것은 영어, 독어, 프랑스어, 인도 샨스크리트어가 모두 이 세 가지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물론 수메르어와의 비교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 세가지 점에서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언어는 우리 한국어다. 먼저 언어의 특징이란 수메르어가 교착언어인데 교착언어란 우리말의 주어나 목적어 다음에 '은, 는, 이, 가' 등이 붇는 언어를 의미한다. 이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공통된 현상이다.

 

그런데 중국와 인도어는 일단 교착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수메르어와는 그 특징에 있어서 같지 않다.

다음으로 문법 구조에 있어서 수메르어는 '주어+목적어+동사'이다. 이는 영어 혹은 중국어와는 다르고 우리말과는 같은 구조이다.

 

 

 

수메르어와 한국어 발음과 뜻 비교

슈메르어 발음과 과 뜻

한국어 발음과 뜻

아누(Annu) 최고신

하느님 上帝

안(An) 하늘, 天

하늘, 天

기르(Gir) 

길 (Gil) 路

라 (Ra) ...에서   

로 (Ro) 조사 (助辭)

아비 (Abi) 아버지

아비, 父, 지아비 (夫)

움마 (Uhma) 엄마

엄마 (Uhma) 母

니므 (Nim) 님, 任

님 (Nim) 사람

바드 (Bad) 밭 田 

밭 (Bat)밭, 田

나 (Na) 나, 일인칭

나 (我) 일인칭

그 (Ge) 3인칭

그 (Ge) 3인칭

이. 1일칭 

이. 지시대명사

 

영국학자 '크래머'등의 발굴에 의하여 '머리가 검은 (Black Headed People) 동아시아 인들'이 문명을 다 가지고 들어와 수메르문명 세웠다는 것이 밝혀졌다.

 

언어 이외에 수메르 유래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지구라트'이다. 수메르의 문화 속에는 Ziggurat 이라는 인조산을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동일하게 받드는 군사부 일체 제도가 있었는데 동방 한민족의 문화와 거의 유사하다.

 

 

지구라트는 벽돌로 쌓은 인조 탑이다. 물론 피라밋의 유래이며, 구약성서의 바벨탑의 전신이 다름 아닌 지구라트이다. 다행히 고고학자들은 지금 터키 그리고 몽고 지역까지 수메르의 유적을 찾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정교일치: 왕은 신의 대리자로서 최고의 사제가 되었으며, 신권 정치가 실시되었다.

제천의식: 지구라트라는 큰 탑을 가진 신전이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천문학: 인간의 운명이 천체 운행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태음력: 1년을 12달로 하는 태음력을 만들고, 다시 하루를 24시간으로 만들었다.

60진법: 한 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하는 60진법을 만들었다.

 

  그밖에 수메르와 한국은 묘장제도, 순장제도, 최고지도자의 상징을 봉황으로 삼고 있는 점 등에 있어서 앞으로 두고두고 그 유사성이 연구의 대상으로 남겨져 있다.

 

겨레 최고의 보물, 천부인(天符印)

 

 

고리가 다섯 개인 동경. 동경은 제사장인 단군이 의식을 집전하기 위해 쓰던 것이다. 직경19센티미터.

 

 

고리가 네 개인 동경의 세부. 정교한 빗살문양은 0.000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으며 현대과학으로도 복원이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직경 21센티미터.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백동경. 직경 20센티미터. 아직 세계 고고학계에 한 번도 보고된 적이 없는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유물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동검 가운데서 가장 큰 동검. 길이 85센티미터. 흠 없이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었다.

 세형 동검과 청동 방울들. 청동거울과 동검, 청동 방울 이 세 가지가 곧 단군 이야기에 나오는 천부인이다.

 

 

 

 

 

 

다뉴세문경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가 북한으로 반출된 것에 대한 문화일보 2003년 4월 28일자 기사.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者) 환웅(桓雄)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니,가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개를 주어, 내려가서 이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 선(善) 악(惡)등 무릇 인간 360여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무리를 교화시켰다."

 

한민족(韓民族)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었을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단군신화(檀君神話)〉의 전반부 내용이다.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받아 왔다는 '천부인(天符印)' 세가지에 주목해 보자. 천부인은 분명 세상을 다스리는데 용이한 신물(神物)임에 틀림없는데, 우리는 이 세가지 보물이라 천부인의 존재에 대해 그다지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었다.

 

어쩌면 우리'한민족의 기원과 미래'에 대한 비밀이 바로 이 천부인 세가지에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신화니 역사니" 하는 논쟁에만 정열을 낭비하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천부인'이 왜 중요한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나 건국이나 기원에 관련된 신화가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물증과 서로 연결되어지면 그것은 이미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인정된다.

 


종   목   국보   141호
명   칭   다뉴세문경
  (多紐細紋鏡)
분   류   선사유물
수   량   1개
지정일   1971.12.21
소재지   서울 동작구 상도5동 1-1 숭실대학교박물관
시   대   청동시대
소유자   숭실대학교
관리자   숭실대학교

 

구체적인 물증이라 함은 물론 고고학적인 발굴과 여러 실증적인 기물발견 등을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트로이전쟁'인데 '신화'가 '사실'로 변한 결정적인 계기가 고고학 발굴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네 단군신화도 천부인이라는 신화적 기물이 고고학적인 중요한 표지적 유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

 

천부경을 발견 해독하여 우리에게 전한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는 「난랑비 서문」에서 유, 불, 선 3교는 인류시원의 이 신교로부터 갈라져 나가 제2의 고등종교로 발전한 것이며, 유, 불, 선의 사상이 포괄된 모체종교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적어 전했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神史
국유현묘지도 왈풍유 설교지원 비상신사

우리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풍류교를 만든 근원은 신시역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 차여입즉효어가

우리 풍류교에 접목되어 각각 다른 종파로 분리되어간 유교, 도교, 불교의 삼교의 핵심이 다 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처무위지사

집으로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공자) 유교의 취지요,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매사에 무위로 대하고 말없은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의 도교이며,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악한 일들을 하지 말고
오로지 착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석가모니의 불교로 변해갔다

 

이처럼 최치원 선생이 밝힌 바와 같이 유불선의 모체종교가 우리나라에 있었고, 이 모체종교를 신교, 풍류도, 신선도 등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신교를 통해 심신을 수련한 엘리트가 있었고, 각 나라마다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배달국시대의 제세핵랑군 3000명이 그 뿌리라 할 수 있고, 고조선 시대의 삼랑, 부여의 국자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이 있었습니다.

 

과거 우리선조들은 ‘산지조종(山之祖宗)은 곤륜산(崑崙山)이요, 수지조종(水之祖宗)은 황하수(黃河水)라’고 하는 노래를 곧잘 불렀다. 지구의 축(軸)이  바로 히말라야에 있는 곤륜산이라는 것이다.


지구상의 산줄기가 모두 곤륜산에서 비롯되어 다 뻗어 내려갔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봐도 동,서양 산이 다 곤륜산을 모태로 해서 갈려 나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산맥이 구부러지고 틀어진 것이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것이 아니다. 지리를 모르면, 산천(山川)이 제멋대로 구부러지고 틀어지고 길쭉하고 모가 난 것으로 보인다. 모르니까 그렇게 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리(地理)를 알고 보면 글자 쓰는 것과 같다. 하늘 천(天)자를 쓸 때, 먼저 한 획을 건너긋고 그밑에다 또 한 획을 건너긋고, 양쪽으로 삐쳐서 쓰듯, 또 날 일(日)자를 옆으로 잡아당기면 가로 왈(曰)자가 되고, 가로 왈(曰)자를 길이로 끌면 날 일(日)자가 되는데, 지리 역시 그렇게 명확한 것이다.


일정한 법칙에 따라 글자를 쓰듯, 지리도 그렇게 규칙적으로 되어 있다. 지리를 알고 보면 산(山) 가지 하나 내려간 것을 봐도 ‘아, 요 밑에는 뭐가 나온다, 그 다음에는 무슨 방향이 나온다’ 그게 환하게, 조금도 어긋남 없이 글자 쓰듯이 나타난다. 지리를 통투(通透)하고 보면 그렇다. 들판이 생기려면 들판이 형성되어 나온 주산(主山) 마디가 있다.


산이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틀어졌지만 ― 한 마디가 한 10미터 되는 것도 있고 100미터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