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지구상에서 역사를 가장 많이 기록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 장구한데다 스케일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중국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으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CEO들은 중국사에 등장하는 지도자의 리더십과 용인술을 배우려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중국에선 천재적인 기질을 가진 리더가 중국을 오랫동안 평정하거나, 좋은 대물림을 해주거나, 후세에 좋은 평가를 받는 사례가 드물다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 전술보다 전략이 더 효과적이고, 뛰어난 재주를 가진 리더보다 사람을 잘 쓰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편이 결과가 더 좋았다.
당 태종과 진 시황을 비교해보자.
당 태종은 품행이 좋은 황제가 결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여러 사람의 지혜와 재능을 모아야만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따라서 남북의 경계를 허물어 남조 출신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기용했다.
진 시황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중국사 최초의 통일 왕조를 이루는 위업을 달성했으나 투항한 6국 대신이나 장수들을 기용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인재들 중 겨우 7분의 1만 기용되었고, 나머지 인재는 버린 셈이었다. 이 때문에 진나라는 원망을 샀다. 진나라의 멸망은 진나라에 반대한 사람들이 절대다수인 하층민이었고, 중간층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어떨까?
제2차 세계대전 중 활약했던 미국의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장군의 사례를 비교해봄직하다. 맥아더는 미국 육군사관학교 시절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특출난 전략가로서 ‘신’의 경지에 오른 장군으로 칭송받았다. 반면 아이젠하워는 평범했다. 300명의 졸업생 가운데 250등 정도였고 대단한 전략도 없었단다.
그런데 미국은 두 사람 중 유럽 전투에서 연합군 지휘권을 아이젠하워에게 맡겼다. 왜일까? 천재형 전략가는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지만 평범한 장수는 모든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의 CEO는 물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제마저도 성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겸손’과 일을 ‘공경’하는 자세라는 것이 중국사에서 배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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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중국사 강의
(쉬줘윈 지음, 정경일 옮김, 2008, 김영사)
1. 기업과 리더십
<리더는 어디에 있는가?>
과거에 우리가 말했던 리더란 늘 ‘제왕 아니면 장수와 재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리더는 ‘기업의 리더’를 말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약 반세기 동안 우리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의 형세가 점점 개인적인 방향으로 바뀌었음을 볼 수 있었다. 개인의 역량이 관청 또는 공공 기관의 역량을 뛰어넘으면서 과거에 제왕과 장상들이 행했던 일이 서서히 일반 개인이 설립한 단체의 리더가 해야 할 일로 변하고 있다.
<기업이 하나의 촌락이라면>
‘촌락’은 ‘집단’의 일종으로, 가정이나 가족보다는 큰 조직이지만 현대식 국가와는 다르며, 명확한 경계가 있다. 촌락의 구조를 기업에 비유하는 데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리더라면 좋은 기업 문화를 기를 책임을 가진다. 리더는 문화를 만드는 사람이지 통치자가 아니다. 이는 기업 리더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다.
후계자는 자신의 경쟁자가 아니라 대체자다. 그에게는 그 나름의 성격과 특징을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 제2의 자기 자신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또 너무 일찍 후계자를 선정해서도 안 된다. 왕왕 자기 안목이 틀릴 수도 있고, 낙점을 받은 후계자가 원하는 만큼 발전하지 못할 수 도 있으며,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일도 하나의 예술이다.
후계자의 조건이 좋지 못하거나 능력이 모자랄 수도 있지만 타인의 장점으로 자신의 단점을 메울 수 있다면 뛰어난 리더가 될 수 있다. 한 고조 유방은 기껏해야 10만 명 정도의 병사를 거느릴 수 있는 장수였지만 동시에 장수를 통솔할 수 있는 넓은 도량과 기백을 갖춘 리더였기 때문에 천하를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역사와 리더십
<유가와 법가>
순자를 말하려는 이유는, 유가(儒家)가 중국 문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유가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와 맹자 두 사람의 사상 및 그들이 중시했던 모든 주제들이 기본적으로 집단을 위한 것도 아니고 또 집단의 성격을 띠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개인의 문제 아니면 개인과 다른 개인의 문제만을 이야기했을 뿐이며, 개인과 집단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논의하지 않았다. 순자에 이르면 논의가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순자》 〔의방편〕의 육술(六術)
효성왕과 임무군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이번에는 장수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순자가 대답했다.
“장군이라면 지혜에 있어서는 의심스런 생각을 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행동에서는 잘 못이 없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일을 처리할 때는 후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일은 후회하지 않도록 하면 그뿐이지, 반드시 성공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장군은 제도와 명령이 엄하고 위엄이 있어야 하며, 상벌에 반드시 신의가 있도록 해야 하고, 군영과 군용품의 저장은 빈틈없고 견고해야 하며, 부대의 이동이나 전진과 후퇴는 안전하면서도 신중해야 하고 신속해야 하며, 적군을 정탐하고 변화를 살필 때는 몰래 깊이 들어가 살피게 하고 그 결과를 종합적으로 참작해야 하며, 적과 맞붙어 싸울 때는 반드시 자신이 명확하게 세운 전략을 따라야 하고 자신이 의심스럽게 여기는 전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이상이 장군의 여섯 가지 기술입니다.”
장수의 계책이 욕심보다 뛰어나다면 잘될 수 있지만, 욕심이 계책보다 앞서면 안 좋은 결과를 맞게 된다. 전쟁을 수비하듯 하고, 행군을 전쟁하듯 하고, 전공이 있을 때는 요행을 얻은 듯이 해야 한다. 계략을 공경히 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이며, 일을 공경히 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이며, 장교들을 공경히 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이며, 적군을 공경히 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이상은 장수가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즉 ‘오무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유명해진 두 사람의 미국 장군이 있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가 바로 그들이다. 맥아더는 천재형에 속하는 장군으로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 시절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또 특출난 전략가로서 병사들로부터 ‘신’의 경지에 오른 장군으로 감탄을 한 몸에 받았다.
반면 아이젠하워는 평범했다. 300명의 졸업생 가운데 250등 정도로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고, 대단한 전략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 중 유럽 전투에서 연합군을 지휘할 사람으로 누가 적합할까? 국적이 다른 군대의 장교들을 이끌면서 강력한 적을 상대하고, 아주 견고한 방어선과 상륙하기 아주 어려운 해안선 등과 같은 난제를 앞에 두고 미국은 맥아더가 아닌 아이젠하워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왜일까? 천재형 전략가는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며 일을 ‘공경’하지 않는 경향이 강한 반면, 아이젠하워 같은 평범한 장수는 모든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두었다.
3. 성공과 실패
<성공한 왕조>
주나라는 종족 구조를 이용하여 왕실과 각지의 리더들을 긴밀히 연계시키는 관계망을 형성했다. 주나라 시대에는 중국사 최초로 동성끼리의 결혼을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주 왕실은 이런 방법으로 다른 방국들의 리더들을 사위, 조카, 형부, 매부, 외삼촌, 이모 등과 같은 주 왕실의 친속으로 만들었다.
이렇듯 주나라는 하나의 연맹체로서 상층부를 단단하고 긴밀하게 응집시켰다. 지난날 적이었던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포용하여 친속으로 만들고 동시에 이들을 통치에 동참시켜 통치 계층의 하나로 변모시킴으로써 결국은 인척이나 친구로 바꾼 것이다.
한나라는 중국사에서 아주 중요한 왕조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한인(漢人)’으로 자처하고 중국인의 87퍼센트가 한어를 사용하는 종족군에 속한다. 당시 상부 계층은 명령을 순조롭게 하층으로 전달할 수 없고 아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나라는 하는 수 없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고 그리하여 점차 인재 추천 제도라 할 수 있는 ‘찰거(察擧)’ 제도가 발전했다. ‘찰거’는 고대에 ‘선거(選擧)’라고도 불렸다.
추천된 사람은 지방 정부에서 문관이나 비서 또는 해당 부서의 이런저런 자리를 맡았다. 어느 정도 시험 기간을 거쳐 괜찮다고 판단되면 낭(郎)에 임명되었다.
한나라는 항상 조정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회의 때는 대소 관리들 수백 명이 대전에 앉고 그 아래로는 수천 명이 서서 관련 안건에 대해 발언할 수 있었다.
송나라 때 시험의 발전은 거의 과거 제도의 세부 항목에 집중되었다. 답안지의 이름을 가리고 친분이 있는 시험관을 회피하는 규정이 마련되어 거의 모든 불공평한 요소가 제거되었다. 오늘날 각종 시험의 원조는 송나라의 과거제에서 발전해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실패의 교훈>
중국사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나라의 결함은 중간층과 하층의 관계가 멀었다는 점에 있다. 진나라의 멸망은 진나라에 반대한 사람들이 모두 하층 사람이었고, 중간층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혁명에 가담하여 진 시황을 토벌한 사람들 중에는 6국의 후예들도 일부 있었으나, 이들은 변방으로 쫓겨난 후 농민과 같은 최하층민이 되어 있었다. 6국의 후예인 항우와 농민 출신인 유방을 비롯하여 이들과 함께 군대를 이끌었던 인물들의 관직은 기껏해야 오늘날 정부의 과장 정도 직책이었다.
◎ 중국사 최고의 리더들
◇ 진 시황과 당 태종
당 태종과 진 시황을 비교할 때, 사실 당 태종은 품행이 좋은 황제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정책 결정 → 집행 → 감사’의 분업과정과 그 흐름을 아주 분명하게 나누었다. 그는 자기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여러 사람의 지혜와 재능을 모아야만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음으로 진 시황과 당 태종이 사람을 기용하는 ‘용인(用人)’의 자세를 비교해보자. 진 시황이 6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투항한 6국 대신이나 장수들을 기용하지 않았다.
진 시황 시대에는 천하 인재들 중 겨우 7분의 1만 기용되었고, 나머지 인재는 버려졌다. 이 때문에 진나라는 상당한 원망을 샀고, 그 결과 진승(陳勝)과 오광(吳光)이 반기를 들자 일시에 천하가 들끓었던 것이다.
당 태종은 달랐다. 수나라의 문제나 양제부터 이미 남조의 인재를 기용하기 시작했고 당 태종 때 오면 남북의 경계도 사라져 남조 출신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기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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