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이재창의 정치세계
원문 : http://blog.hankyung.com/leejc123/318372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가 최근 출입 기자들과 점심을 함께하면서 이색 제안을 했다.자신이 ‘쨍하고’하면 기자들은 ‘해뜨자’를 복창하자는 것이다.쨍하고 해뜨자가 건배구호인 셈이다.

 

 ‘쨍하고 해뜰날’은 부친인 정주용 전 현대그룹 회장의 18번이었다.정 대표는 “조금은 구식이지만 그대로 아버님 18번 이라서 이렇게 하고 있다”고 했다.지난해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송대관씨를 만난 게 이같은 건배구호를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송대관씨는 가수협회 2기 회장이었는데 그 만남이후 쨍하고 해뜨자를 건배구호로 사용하게 됐다는 것이다.정 대표는 “물론 높은 사람 있을 때는 하지 않고 편한 사람들 있을 때만 한다”고 했다.

 

 정 대표는 술자리에서 5부 폭탄주를 즐긴다.요즘 폭탄주의 대명사는 소주와 맥주를 탄 소맥폭탄이다.한 인사는 “정 대표는 5부 폭탄주는 무한정 마실 정도”라고 전했다.밖에 알려진 것보다는 술이 꽤 쎈이라는 얘기다.

 

 정 대표와는 달리 이회창 총재는 과거 텐텐주를 즐겼다.술이 그리 센편은 아니었지만 술을 마시면 소주나 양주잔을 가득 채운뒤 맥주에 풍덩 빠뜨리는 식으로 당연히 술이 독할 수 밖에 없다.원칙주의자 답게 술도 마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이 총재도 요즘은 5부로 돌아섰다고 한다.마셔도 3잔 넘게는 마사지 않는다고 한다.세월이 많이 흐른 때문이 아닐까 싶다.그도 그럴것이 이 총재는 벌써 70대다.이를 감안하면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가끔 소폭을 마신다.한나라당 관계자들이나 시도지사와의 만찬때 소폭을 돌리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한번은 서너잔씩 돌린 적도 있다고 한다.특히 현안에 대한 이견조정이 필요할때 분위기를 유도하기 위해 소폭이 등장했다고 한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지난해말 쓰러지기전까지 폭탄주를 즐겼다고 한다.김 전 총재는 잘 나갈때는 늘 발렌타인 17년을 차에 싣고 다닐 정도로 좋아했다.물론 막판에는 스카치 블루 등 국산 양주도 마시긴 했지만 말이다.

 

 일각에서는 과도한 폭탄주가 연말에 쓰러지게 된 한 원인이 됐다는 얘기도 들린다.김 전 총재는 요즘 걸을 정도로 몸이 회복된 상태다.골프광인 김 전 총재의 라운딩을 향한 열정은 아직도 대단하다고 한다.재활에 열심인 이유이기도 하다.

 

 폭탄주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다.얼마전 재보선(경남 양산)에서 승리해 뱃지를 달은 박 전 대표는 폭탄주에 대한 자신의 브랜드를 강조한다.자신이 폭탄주의 원조라는 것이다.자신이 검사시절 만들었다는데 별 이견이 없다.

 

 저녁 밥 자리서 소폭이 대세를 이루면서 양주에 맥주를 섞는 양폭은 입지가 크게 위축됐다고 한다.양폭은 정치권과 관가에선 거의 사라지다시피했다.양주판매가 급감하는 게 이를 방증한다.술자리도 시류를 타고 있는 것이다.

 

출처 : 김동욱 기자의 역사책 읽기
원문 : http://blog.hankyung.com/raj99/318653

괴테, 『파우스트』

 

 파우스트. 파우스트 민담은 초기 루터교에선 “악마와의 결탁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이어 대문호 괴테가 비극 ‘파우스트’를 쓴 뒤에는  한갖 시장거리에서나 거론되는 잡스런 얘기가 아니라 독일 최고의 작가가 쓴 고급스런 얘기로 탈바꿈 하게 된다. 19세기에 접어들면 파우스트는 독일 민족 고유의 전통을 띤 신화적 인물로 ‘급’이 올라가게 되고, 독일 통일 이후에는 ‘활동하는 지식인’이자 ‘식민지 개척에 앞장서는’ 모델로 재조명 된다. 진보세력들도 파우스트를 “자기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 독일인의 이미지로 재창조해냈고, 20세기에 접어들어선 니체의 초인사상과 결합된다. 곧이어 나치독일은 파우스트를 인종정책의 도구로 활용하기에 이른다. 파우스트는 2차 대전후 동독에선 “사회주의적 민중해방의 선도자”로 떠받들게 된다.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모두 저마다 보고 싶은 점들을 파우스트에 투사해 저마다의 파우스트 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해설서만 1000권이 넘는다는 괴테 ‘파우스트’자체의 난해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자의적으로 파우스트를 해석하면서 나왔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원래 파우스트 전설의 주인공은 요한네스 파우스투스라는 역사적 인물로서 1460-1470년경 하이델베르크 근처 헬름슈타트 인근에서 태어나 1536-1539년 사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학사(1484)학위와 석사(1487)학위를 받은 뒤 방랑생활을 하다 신학과 의학을 연구하다 이후 크라쿠프로 도주해 마술에 몰두하면서 유대계 신비학자들과 교제하면서 점성술 등을 연구한 예연자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당대의 학자들 사이에선 ‘사기꾼’으로 불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비행시도를 하고, 마울브론에선 금을 제조하는가 하면, 에어푸르트에선 호메로스의 주인공들을 주문으로 불러내는 기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악마를 개의 모습으로 만들어 다니던 파우스투스는 뷔르템베르크의 어느 여관에 투숙했다가 “오늘밤 놀라지 말라”는 예언을 한 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즉 당대인들 사이에선 악마에게 살해된 것으로 믿어진 괴짜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황당한 기행을 일삼은 역사적 인간이 죽고나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점차 민담으로 형성돼 갔다. 그러면서 스토리에 살도 붙어 나갔다.

 그러던 중 1587년 프랑크푸르트의 출판업자인 요한 슈피스가 ‘지나친 마술사 요한 파우스트 박사의 이야기’라는 이름의 민중본을 발행하고, 십여년 사이에 19쇄가 출간될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된다.

 이어 파우스트 박사와 악마와의 계약이란 테마는 영국과 독일의 대문호에 의해 재창작되기에 이른다. 영국에선 말로우가 희곡 ‘포스터스 박사의 삶과 죽음에 관한 비극적 이야기’를 1604년 출간하고, 독일에선 괴테가 그 유명한 ‘파우스트’를 쓰면서 민담은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앞서 독일내에선 파우스트 박사를 소제로 한 작품들이 잇따라 선보였다. 17-18세기 동안 독일내에선 다양한 형태로 변형된 민중본들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의 비드만은 1599년 슈피스본을 확대한 책을 내게 되고, 1725년에는 ‘기독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익명의 작가가 새로운 파우스트 요약판을 내놓게 된다. 또 17세기 동안에는 유랑극단들이 파우스트의 스토리를 공연하며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괴테 역시 어린시절 인형극을 통해 파우스트 스토리를 접하게 된다.)18세기에는 계몽주의 작가 레싱이 선이 얼마나 빨리 악으로 변하는가를 주제로 미완성작 ‘파우스트 박사’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파우스트에 오늘날과 같은 클래스의 힘을 불어넣은 사람은 누가 뭐라해도 괴테다. 괴테가 없었다면 파우스트의 민담은 아마 ‘전설의 고향’ 수준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괴테가 평생에 걸쳐 집필한 비극 ‘파우스트’는 공간적으로는 천상에서부터 지옥을 거쳐 지상에 이르는 전 우주를 포괄하고,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이르는 3000년의 세월을 배경으로 하는 스캐일 큰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괴테 이전의 작품들이 주인공이 신의 저주를 받은 죄인으로 지옥에 끌려가는 것으로 그린 반면, 괴테는 파우스트의 영혼이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 이끌려 천상으로 인도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괴테는 전통적 작품들을 단호히 거부하고 선을 그은 것이다.

 묘하게도 괴테 이후 파우스트는 마침 부상하고 있던 독일 민족주의와 어울리면서 예상치 못한 ‘대표’역할을 연이어 떠맞게 된다.

 나폴레옹의 독일 점령으로 민족적 정체성에 위협을 느낀 낭만주의자들은 파우스트를 독일 민족 고유의 전통을 띤 신화적 인물로 격상시켰다. 파우스트는 순식간에 기행을 일삼는 무엇인가 이상한 인물에서 전형적인 독일인으로 동일시되고 이상화된 것이다.

 가장 위대한 독일 작가가 썼다는 이유로 파우스트는 작품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 이상에도 불구, 국수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 변화되게 됐다. 특히 비극 제2부에 나오는 식민지 개척사업,눈먼 환상가로서 자기 기만에 빠진 파우스트의 환상적 독백 등에 민족주의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독일인들은 파우스트에게서 △부단한 노력 △팽창의 동력 △행동에 대한 찬양 △주저없는 식민지 사업 등의 요소들을 뽑아냈다. 파우스트는 때로는 행동주의적 영웅적 남성의 표본이 됐고, 때로는 제국주의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19세기 전반에 이상적 독일인과 동일화되기 시작한 파우스트는 1840년 이후 활동하는 유능한 인간으로서 현실성을 지향하는 인물의 대표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태초에 존재했던 것은 말씀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파우스트의 대사는 경험과 실천을 중시하는 목소리로 해석되며 힘을 얻어갔다.“모든 이론은 잿빛이고 생명력 빛나는 나무는 초록색”이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졌다.

 다른 한편에선 과거 지향적 보수적 낭만주의자들의 파우스트 우상화 작업과 별개로 진보성향 청년 독일파 작가들이 파우스트를 젊은 독일과 동일화 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파우스트가 학자적 삶에서 세속적 삶으로 이행하고, 사변적 관념에서 감각적 영역으로 이행하는 것을 놓고 하이네는 독일인들이 발전시켜야 할 자기 해방과정의 모델로 삼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진보파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독백중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이란 표현에 주목, 당시 그들의 새로운 자유국가에 대한 희망을 그리는데 사용했다.

 1871년 독일제국이 성립되면서 파우스트는 새로운 민족적 자의식과 새로운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활동적이고 유능한 인간상으로 평가된다. 이제 ‘잘나가는’ 독일제국의 신민들은 파우스트의 비행에 침묵하고, 파우스트 이야기에서 비극적인 것을 배제하며, 내적모순을 감추는 식의 완전무결한 해석에 열중한다.

 제국주의자들은 파우스트의 식민지 개척 노력을 극구 찬양하고, 식민지 개처가로서 파우스트에 스스로를 일치시켰다. 이제 파우스트는 ‘거인적 노력’과 ‘영웅적 위대함’의 상징이 된 것이다.

 20세기초 파우스트는 초인개념을 이루는 니체사상과 결합된다. 1차 대전 패배후 상실감에 젖었던 슈펭글러는 ‘파우스트적 인간’을 ‘독일적인 것’과 동일시 했고, 퀴네만은 1930년 파우스트를 ‘지도자’로 칭하기에 이른다

 나치 시대가 되면서 파우스트는 “피와 토지 이데올로기”의 소제로 활용됐다.나치 제3제국 시대에 히틀러와 파우스트가 동일시되면서 파우스트는 나치의 인종정책 선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파우스트는 나치에 반대하는 세력에게도 주목받았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토마스 만은 1947년 소설 ‘파우스트 박사’에서 “절대와 무한을 추구하면서 인간성의 척도와 이성을 파괴하는 독일 지식인의 전형”으로 파우스트상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2차 대전후엔 동독에서 파우스트가 “사회주의 토지개혁의 상징”으로 이념화되기도 했다. 2차 대전후 동독에서 파우스트는 모범적 영웅으로 도식화된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긍정적이고 문제성 없는 모범적이고 무해한 고전적 인간상으로 주목받은 것이다. 1962년 동독 공산당 지도자 울브리히트는 파우스트를 일종의 ‘민중서’라고 평가하기에 이른다. 즉 울브리히트는 파우스트의 “자유로운 땅에서의 자유로운 백성”이라는 결론 부분을 “괴테는 노년의 파우스트로 하여금 해방된 민중의 창조적 공동 노력만이 최대의 행복을 낳는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자기편한데로 해석한 것이다.

 요즘 드라마 ‘선덕여왕’은 역사적 실체와는 무관하게 보는 사람데로 갖가지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며 재탄생되고 있다. 얼마전 10월 26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안중근 의사가 또다시 재부각되면서 이들 역사적 인물들이 현실의 문제의 상징으로 새 생명을 얻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파우스트를 만들고 있는 것인지, 또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만의 파우스트에 대한 시각은 과연 어느정도 수준에 해당하는 것일지 잠시 궁금해졌다. 


<참고한 책>

이인웅 편, 파우스트 그는 누구인가?, 문학동네 2006

안경환, 법과 문학사이, 까치 1995

출처 : 광파리의 글로벌 IT 이야기
원문 : http://blog.hankyung.com/kim215/306493

추석에 고향인 정남진 장흥에 다녀왔습니다. 정남진은 남도답사일번지 강진과 녹차밭으로 유명한 보성 중간에 있는 전남 장흥을 일컫는 말입니다. 광화문에서 똑바로 남으로 내려가면 최남단에 있는 곳입니다. 추석날 아침 장흥읍내 억불산 기슭에 있는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를 둘러봤습니다.

우드랜드는 읍내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습니다. 작년 추석 때도 들렀는데 그때는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이제 공사가 끝나 추석 명절을 우드랜드 펜션에서 보낸 가정도 있었습니다. 남도 여행을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사진 몇 장 올립니다. 클릭하면 좀더 큰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산책로. 톱밥이 깔린 톱밥산책로도 있습니다.

 

표고버섯 모양의 쉼터. 표고버섯은 장흥의 특산물입니다. 우리나라 버섯의 절반 이상이 이곳 장흥에서 나옵니다. 버섯 모양의 분수대도 있습니다.

수라간입니다. 식탁과 의자도 모두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숙소. 펜션형도 있고 한옥집 흙집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나무와 흙만 사용해 지었다는 점입니다. 예약하면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야외에서는 누드사진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정남진 장흥에 사는 사진작가들이 지난 여름 물축제 때 편백숲 우드랜드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꼭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 목재문화체험관입니다. 목재로 만들어진 2층 건물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나무 냄새가 기분을 상쾌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장흥읍내 토요시장에서 바라본 억불산 사진 올립니다. 우드랜드는 억불산 기슭에 있습니다. (이것은 작년 추석 때 찍은 사진입니다.)

장흥군청에서 운영하는 우드랜드 홈페이지 링크

광파리가 작년 추석에 쓴 정남진에 관한 글 링크

우드랜드에서 서쪽으로 가면 다산초당 백련사 영랑생가가 나오고, 북쪽으로 가면 장흥댐과 보림사, 동남쪽으로 가면 수문해수욕장과 보성 녹차밭, 남쪽으로 가면 천관산과 이청준의 고향 회진 선학동이 나옵니다. 모두 차로 20~30분 거리입니다. 정남진 장흥.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생각해볼 만한 곳입니다. <광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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