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주일도 훨씬 지난 일이 됐지만,지난 싱가포르 출장 중에 이재웅 다음 창업자가 다음을 떠났다는 보도를 접했다.이미 작년 이맘때 국내 일에서 손을 떼면서 예견된 일이긴 하지만 국내 최초로 이메일 서비스를 시작,인터넷산업의 장을 열었던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창업자 이재웅씨가 다음을 떠난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 비슷한 시기 NHN을 떠난 김범수 사장의 사례와는 겉모습은 비슷해보여도 사뭇 다른 사례인 듯 보이기에 그가 다음을 떠난 이유를 나름대로 한번 추정해봤다.정황적 근거와 그와 만나 나눈 대화에서 느꼈던 조짐,그리고 최근 다음의 상황 및 산업의 움직임,개인적인 경험 등과 밀접하게 관련이 돼 있기에 흥미로울 것 같다.

(참고:작년에 썼던 이재웅 사장 관련 글

 http://blog.hankyung.com/wonkis/49581 

 http://blog.hankyung.com/wonkis/50113

 

인터넷담당 기자 생활을 하면서 이재웅 창업자를 그리 자주 만나진 못했다.(만나기 어려운 사람에 속한다) 그래도 기사 관련해서 전화를 하면 비교적 잘 받는 편이라 전화 통화는 많이 했던 것 같다.

 

 만남 중에 기억나는 것은 2006년 2월 제주도에서 봤을 때였다.그때 제주도 바닷가에 있는 호프집에서 당시 이재웅 사장 옆자리에 앉아서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이미 술이 많이 취해있었던 이재웅 사장은 좀 말이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대화의 주제나 방향은 명확히 정하고,주도하고 있었다.

대화 내용의 대부분은 한탄과 회한이었다.마치 기업을 해서 후회하는 사람처럼 그는 힘들어했고,안타까워했고,사람들이 왜 이렇게 자신을 공격하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당연히 그러면서 내 기사도 지적했었다)

 

대략 난감한 순간도 있었지만 2시간 가량의 대화 말미에 그런 느낌이 들었다.“이 분의 마음이 다음을 떠났구나.”

 

흔히들 이재웅 사장의 지분이 2001년 이후 지속적으로 줄어들어왔다는 것을 근거로 들면서 그가 오랫동안 다음을 떠날 준비를 해 왔다고 한다.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는 생각지 않는다.그가 다음을 떠나기로 한 것은 그래도 비교적 최근인 2005년을 전후로 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온라인우표제의 실패가 있은 후 다음은 별로 잘 풀리지 않았다.네이버와의 경쟁에서 밀려나는가 하면 오프라인의 사업을 끌어와 새로 시작한 것들이 잘 안되기도 하고...이래저래 2004년 이후 다음의 역사는 수난사였다.작년 티스토리의 성공과 올해 아고라로 주목받기까지 다음은 별로 신통한 게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라이코스 인수건이었던 것 같다.이 사건은 워낙 유명하고 루머도 많은 일인지라,이것만 갖고 써도 원고지로 300-400장은 나올 만한 얘기거리가 풍성하지만 요약하자면 귀가 얇은 이재웅 사장이 재미교포에게 넘어가서 터무니없는 가격에 인수를 했다는 거였다.물론 인수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필요한 투자일 수도 있었는데,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미국 법인 사장으로 내세웠던 사람이 갑자기 잠적을 했고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이재웅 사장이 미국에 건너가 고군분투했다는 것은 소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꽤 사실과 근접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후 이재웅 사장은 한국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그 뒤로 강남대로에서 살이 쭉 빠진 이재웅 사장을 봤다는 둥 설만 무성했다.(물론 그 뒤로도 그는 민감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전화를 해서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그가 자동차보험,여행,쇼핑몰,오픈마켓 등 본업이 아닌 분야의 일에 손을 자꾸 댄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미디어제국 다음을 꿈꿨던 그이지만 그는 언제부터인가 미디어 본연이 아닌 일이 자꾸 손을 댔다.그가 항공사업에 관심이 많다는 얘기도 그러면서 나왔고,실제로 그는 간접적으로 항공 사업을 시작했고 상당히 공을 들이기도 했다.
증권가에서 특히 애널리스트들은 그가 엉뚱한 일을 자꾸 한다고 비판했지만 그는 나름대로는 다음 이후의 사업을 준비해왔던 것 같다.

 

인터넷산업 자체가 네이버 위주로 완전히 재편되면서 그가 흥미를 잃었을 수도 있다.산업이 활력을 읽고 혁신이 어려워지면서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픈 마음이 들었을 가능성도 높다.

 

결국 그는 점차 다음의 운명을 석종훈 대표를 위시한 다음 2세대들에게 넘겨주는 작업을 하게 된다.올해 최종적으로 다음을 떠났지만 그 작업은 2005년을 전후로 한 시점에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물론 아직 그의 지분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지만 그가 다음에 복귀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그의 복귀를 시장에서 별로,아니 대단히 바라지 않는다는 점도 그의 퇴진에 변수가 됐을지 궁금하다.그는 상당히 센티멘탈한 측면이 있는 사람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채 떠났다는 점이다.다음은 그가 이룩한 업적 못지 않게 여전히 그가 남긴 상처로 가득하다.금융분야나 미국 투자 등 잘못한 투자들로 인해 다음이 오랜 세월동안 겪어야 했던 기회비용은 만만치 않지만,그가 훌쩍 떠남으로 해서 남은 다음 2세대들은 이 상처를 치유하고 다음 도약을 준비해야 하는 힘겨운 과제를 떠안았다.

 

이제 남은 건 18.34%인 이재웅(외 특수관계인) 지분의 향방이다.그가 이 지분을 어떻게든 정리할 것은 자명해 보이지만,문제는 언제,어떻게,누구에게냐다.대한민국 최초의 포털을 만들고 인터넷산업의 서막을 열었음에도,중반이후 실책과 판단 미스를 반복했던 이재웅 창업자가 다음에 마지막 선물을 안겨줄 지 궁금하다.

이런 우스개소리가 있었다.다음의 가장 큰 리스크는 'CEO리스크'라고..
과거 다음 창업자인 이재웅 전 사장이 대표로 있을때 업계에서,특히 증권가에서 많이 하던 말이었다.어떤 결정을 내릴지 종잡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네이버와 경쟁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자꾸 악수를 두곤 했던 이재웅 전 사장의 스타일을 꼬집은 말이었다.라이코스 인수를 비롯해서 여행업,금융업 진출 등 투자자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결정을 이재웅 전 사장은 많이 했었다.그리고 투자자들의 우려대로 그 투자는 거의 예외없이 실패로 끝났다.

서론이 좀 길어졌지만 과거 다음은 CEO리스크가 최대 리스크라고 할 만큼 그 외에는 별다른 리스크가 없었다.그 리스크가 워낙 크기도 했었지만 2위 업체가 갖는 위치때문이기도 했다.정책적인 리스크는 1위업체인 네이버가 대부분 짊어지고 가고 소비자들의 변화에 따른 리스크도 1위 업체가 지는 부담이 훨씬 컸다.2위인 다음으로서는 환경이 변화되면 나쁠 것이 없기 때문이다.서비스 리스크도 크지 않았다.다음이 티스토리같은 것을 부담없이 할 수 있었던 것도,실패해도 별로 티가 안나기 때문이다.(이를테면 만약 네이버가 블로그 시즌2를 선보였는데,실패한다고 하면 큰 뉴스꺼리가 될 뿐 아니라 주가에 바로 직격탄이 될 것이다) 대신 조금만 잘 되면 아주 잘 한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쉽다.

 그런 다음이 강력한 리스크에 직면했다.이메일 보안 문제는 그 자체로는 다음의 수익성이나 장기 성장성에 크게 영향을 주는 사안은 아니지만 이런 일을 처리하는 다음의 자세나 대처 능력은 이 회사의 운영 방식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다음은 이번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사장까지 나서서 피해 규모에 대해 언급하면서 말을 바꾼 점이나,소비자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빠른 수습 못지 않게 솔직하게 인정할 부분을 인정하고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점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때마침 경제지들도 다음에 뉴스 공급을 중단키로 하면서 다음이 처한 상황은 어느때보다 긴박해 보인다.'중앙일보 뉴스 빠져도 다음에 아무 문제 없다'고 했던 석종훈 사장이지만 일간지들이 이렇듯 대거 뉴스를 빼는 것에는 뭐라고 답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지금껏 별다른 리스크없이 편안하게(?) 2인자의 위치를 누려왔던 다음이지만 이번 껀은 사안이 주는 무게감이 틀린 것 같다.다음이 택한 투자 사업의 문제가 아니라 다음과 소비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직접적인 문제이기 떄문이다.특히나 다음이 어느 포털보다 미디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음에게는 큰 시련이자 자신의 위기 관리 능력을 시험해보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이 이 위기에 현명하게 대처한다면(아직까지는 좀 실망스러운 수준이지만) 오히려 안으로 조직을 한번 추스리는 효과를 누릴 수 있겠지만 말바꾸기와 네이버 따라하기식 변화에 그친다면 2인자의 자리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기업사도 새옹지마고 위기뒤에 기회가,기회뒤에 위기가 오는 법.다음의 다음 의사 결정이 궁금하다.

 연세대학교 전산학과에서 석사학위까지 받은 이재웅 사장은 1993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유학을 간다.범상치 않은 이력을 지닌 그는 두 가지 점에서 그 당시-그리고 지금도-인터넷 기업의 대표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지녔다.우선 연세대학교 출신으로 ‘비교적’ 인맥이 적은 편이다.지금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과 카이스트 출신들이 인터넷 기업의 주요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이해진 NHN창업자와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았던 동네 친구이고 새롬기술 오상수 대표를 비롯한 인터넷산업 초창기 멤버와 친분이 좀 있다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홀로 동떨어진 편이다.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는 것도 그의 특징 중 중요한 부분이다.대기업을 거치거나 바로 창업을 시작한 경우와 달리 그는 인문학의 기반이 탄탄한 유럽에서 공부를 했고 거기서 언어학자 촘스키를 알게 됐다.이재웅 사장의 미디어에 대한 생각이나 인터넷에 대한 통찰력은 이 시기에 상당 부분 형성된 것 같다.

◆프랑스 유학과 그의 꿈
 이재웅 사장은 프랑스에서 노암 촘스키의 다큐멘터리 ‘Manufacturing Consent:Noam Chomsky and Media’를 접하게 된다.그는 종종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일화로 노암 촘스키의 다큐멘터리를 소개하기도 했다.

 “촘스키의 실천하는 삶 뿐 아니라 영화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었다.‘합의를 조작한다’는 제목이 암시하듯 동티모르에서 거대 미디어가 사회적 합의를 조작해 나가는 모습을 고발한 이 영화를 보면서 정치적 논리와 자본의 속성에 휘말릴 여지가 많은 기존 미디어의 문제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재웅 사장의 말이다.

 이재웅 사장이 파리에서 공부할 때 일화들은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다만 전후 사정을 종합해 볼 때 그가 훗날 귀국해서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넷 산업에 대한 수많은 아이디어를 얻게 된 것이 그로서는 가장 큰 소득이었던 것 같다.이재웅 사장에 따르면 그는 노암 촘스키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기존 미디어-정치적 논리와 자본의 속성에 휘말릴 여지가 많은-의 대안으로 인터넷을 떠올렸다고 한다.인터넷에 대한 그의 젊은 날의 꿈을 짐작케 할 수 있는 부분이다.이때 그가 갖게 된 미디어로서 인터넷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는 이후 다음의 사업 목적과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이메일에서 카페로 이어지는 참신함,그리고 혁신성
 기억을 떠올려 보면 나 역시 그랬고 내가 아는 사람들,그리고 한국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다음의 한메일을 통해서 인터넷이라는 것을 처음 맛보게 된 것 같다.
 이재웅 사장이 26세였던 1995년 한국에 귀국해 설립한 다음커뮤니케이션은 초창기 인터넷 갤러리처럼 운영됐다.자본금 5000만원에 이재웅 사장을 포함해 달랑 3명의 직원이 전부였다.그러던 것이 97년 한메일 서비스를 시작하면서부터 일반인들에게 인터넷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을 이메일 열풍에 휩싸이게 만들며 단숨에 토종 인터넷 대표기업으로 부상한 다음커뮤니케이션은 99년 혁신적인 카페 서비스를 시작한다.인터넷이 단순한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놀 수 있는 커뮤니티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카페 서비스의 위력은 엄청났다.지금도 카페에서만큼은 1위 자리를 확실히하고 있는 다음은 이메일을 통해 회원을 확보했고 이메일 사용자들이 고스란히 카페로 옮겨가면서 수백만명이 넘는 충실한 단골 고객을 확보하게 됐다.

 주목할 만한 점은 카페를 계기로 과거 PC통신 중심이던 일반인들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인터넷으로 급속히 이전되기 시작했다.각종 동창회나 모임이 카페에서 형성되면서 나이든 사람들까지 인터넷의 세계로 이끌었고 이해관계 집단들의 모임도 카페에서 만들어지면 온라인에서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도 맡게 됐다. 

 당초 카페라는 이름은 이재웅 대표가 주창했다고 한다.이재웅 사장의 아이디어는 온라인 상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여 토론을 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오프라인의 카페와 같은 것을 만들어보자는 거였다.그는 처음에 이 서비스 이름을 노천카페라고 명명했다가 그냥 카페라는 명칭으로 서비스하기 시작됐다고 한다.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 유럽인들의 자유로운 카페 문화를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이재웅 사장이 이를 발전시켜 온라인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다음의 혁신성은 카페에서 절정에 달한다.카페 서비스로 탄력을 받은 다음은 결국 이듬해 야후코리아를 제치고 국내 인터넷포털 1위에 등극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