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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기행]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공선옥 | 창작과비평사 | 200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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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다. 우리 삶의 궤적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핏방울 같은 것이 이야기다.

그래도 국문학도라고 도서관 서고를 들락거리며 처음으로 보게 된 현대 소설이라는 것이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이었다. 벌써 근 십여년 전이 되어가는 그 때, 학교 앞은 온통 개나리 진달래로 울긋불긋하였다. 쏟아지는 햇살도 주춤할 정도로 교문 앞에는 많은 학생들이 머리에 띠를 매고 나와있었다. 정체모를 커다란 장갑차가 나타나 학생들을 향해 매케한 최류탄을 쏘아대기 전까지는 나는 무슨 일이 나를 둘러싼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가를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학생들은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끊임없이 외쳐댔다. 학생들이 던지는 돌의 수만큼 저편에서 최류탄이, 기다란 몽둥이가 날라들었다. 사람이 차에 치어 죽어나갔다. 학생들은 손에 손을 잡고 인간띠를 만들기도 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노래를 불렀다. 수많은 전경들이 학교 앞을 막아서도 학교를 가야 하는 날들이, 하숙집 대문을 열고 나서면 한길에서 밤샘을 한 전경들을 마주쳐야 하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내가 다니는 길목에서 사람이 죽어나가야 했던, 그때에 만났던 작가가 공지영이었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을 읽으며 내가 광주에 대해 무엇을 알았겠는가만은, 내가 간접으로 경험했던 막연하지만 알 수 없는 폭력과 권력의, 우리의 삶 속에 깊숙히 들어박힌 '힘'의 공포와 아픔을 볼 수 있었다. 글을 쓰는 작가나, 글을 읽는 나같은 독자가 모두 같은 삶의 경험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후로도 자신의 삶에 솔직했던, 공선옥의 글을 내리 읽어갔다. <피어라 수선화> <시절들> <내 생의 알리바이>. 야속하게도 공선옥씨는 책을 자주 내놓지 않았다. 나는 더 그녀의 삶을, 그녀의 이야기를 알고 싶은데, 그녀의 오지리도, 아이들과 폐교를 고쳐 만들어 살아가고 있는 시골마을 생활도, 다 알고 싶은데 많은 글을 내주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공선옥이 산문집을 내놨다. 신간 소식이 들리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갔다. 벌써 사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책 앞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주일간 학교 서점을 드나들며 찾았다, 고.(2000. 9.3)

가장인 여성으로서의 글쓰기, 지난 광주 이야기, 웃한배미에 사는 시골살이의 맛.... 그동안의 공선옥의 삶이 모두 들어있다. 슬프고 차가웠던, 그래서 안쓰럽고 애처로웠던 이야기들을 모두 따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아이를 키워내고 글을 쓰는 그 강인함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야기란, 작가란, 웃음방울, 핏방울, 땀방울을 모두 엮어내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는 공선옥. 책장 마지막에 그녀는 '작가는 바보다'라며 그녀만의 바보같은 고집스런 글쓰기 철학마저 담아놓았다.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공선옥이 공선옥을 말해주는,
최고이자 최초의 따순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스크랩>

 

하루키다.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무언가 읽을 만한, 특히나 그 중에서도 마음 놓고 읽을 만한 것을 고르기 시작했을 때, 눈에 들어온 낯익은 이름.

대학 일학년. 고시원 크기의 작은 하숙집 방 안에서 첫 가을을 맞을 때, 내가 처음으로 환호했던 상실의 시대. 그 이후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소설과 환상, 꿈에 미쳐지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고 싶었던 대학 일학년의 조바심은 어디로 가고 없다. 다만, 조금 익숙한 것을 찾고 싶은 욕심이 남았을 뿐.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역시 하루키는 편하게 글을 풀어낸다. 아, 저게 정말 천직이다, 싶을 만큼, 아주 잘도.

흔들리는 지하철. 두툼한(정말 내 필통은 쓰지도 않는 형형색색의 펜으로 미어터진다) 필통에서 연필을 한 자루 꺼내어 들고 책장에 낙서를 하며 책을 읽다, 눈에 띄는 짧은 글을 하나 발견했다. 이하는 그 글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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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에 관한 얘기는 이제 듣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피플>에 실린 ET에게 보낸 아이들의 편지가 너무 재미있어서 소개하려 한다. 스필버그는 그 편지들을 읽고 '마음의 등불이 켜지는 기분'이었다고 하는데, 여러분 마음의 등불은 어떤 상태인지?



 내 친구가 1월에 생일파티를 열어. 그 아이는 너의 열광적인 팬인데 와줄 수 없겠니? 출장 요금이 얼마야?

            -캘리포티아의 산호세에서 , 리니 리버(12세)



 이번 여름 캠프에 갔을 때 마블 초콜릿 한 봉지를 테이블 위에 두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없어져 버렸어! 네가 먹었니?

          -매사추세츠의 가드너에서, 피터 스톤(10세)



 나는 네 살이야. 영화에서 너를 봤어요. 너를 매우 좋아해.
낮에 우리 집에 놀러와. 밤에는 안 돼. 그리고 그 옷은 입고 오지 마.

          -캘리포니아의 어번에서, 저스틴 크레이그



 안녕!ET,난 네 팬이야. 난 네 흉내만 내며 살아. 그래서 내 친구들은 모두

 나를 변태라고 생각해.

                      -매사추세츠의 튜크스베리에서, 빌리 사스턴(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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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등불은 뒤로 하고서, 나는 과연 내가 ET에게 어떤 편지를 보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맞은 편에 앉은 짧은 청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라면 요즘 유행한다는 어그부츠를 사달라고 할지도 몰라, 내 옆자리에서 졸고 있는 술 한 잔을 걸친 아저씨는 ET에게 하늘나는 자전거를 태워 집 앞까지 데려다 달라고 할지도 모르고.... 아니다, 요즘 부모 같으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빨리 영어를 배웠냐고 물을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정작 나는 무얼 말해볼까,에 생각이 미치니 뚝, 하고 머리가 멈춰버렸다. 나는 어떤 편지를 써보낼 수 있을까. 내 자전거도 하늘 위로 띄워달라고나 해볼까, 아님 나랑 손가락을 한번 맞대어 보자고 해볼까. 그것도 아니면? 나랑 인터뷰를 하자고 졸라볼까.(혹시 ET인터뷰를 해냈다고 하면 연예정보신문이든, 뭐든, 누군가 나를 채용하진 않을까?). 큼큼. 돌고 도는 2호선 지하철이 왕십리, 왕십리역입니다를 외칠 때까지 나는 그렇게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생각했다. 주로, 뭔가를 '부탁'해볼까 하는 마음에.


불꺼진 창문. 저기가 내 집이려니 하면서 현관 앞에서 열쇠를 돌리는데, 문득 정말 부탁하고 싶은 게 생각났다.

"ET 나랑 살자"

나랑 놀고, 나랑 공부하고, 나랑 날아다니자. 혹은 나랑 같이 소주를 마시든지.

이제 2004년이 한 달여 남짓 남았다. 끄트머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아직 나는 그 어던 선택이나 결정, 혹은 결말의 끄트머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

새로 구입한 내년 다이어리의 첫장에 '희망은 절망에서 비롯된다'라는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말을 크게 적어넣었다.

무엇이 되든, 어떤 삶을 살든, 끝까지다. 끝까지.



-추워지는 행당-

나는 머리가 비상하지 못하다.보던 책도 덮으면 내용을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다. 외국에 나갔다 일년만에 귀국하면서 엄마의 휴대폰 번호가 가물가물해 집에 전화하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 배운 것이라고는 열심히 읽는 것 하나였는데 그 조차도 양이 많지 않아 늘 헛헛했다.

 

대학다니던 시절 같은과 친구에게서 배운 노하우가 메모였다. 책을 보며 이름과 저자, 감동깊었던 글을 적기 시작했는데 노트가됐다.

 

기자가 된 이후로는 짬없다는 핑계로 책을 멀리했다. 늘 가방속에는 시집이나 소실책 한두권이 어지럽게 굴러다니고 있었지만 한 달에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해 늘 방에는 다 읽지 못한 책들이 쌓여갔다.

 

읽지 못하는 병을 없애려 게시판을 열었다. 오랫동안 비워놓기가 무색해 기자가 되겠다며 백수로 지내던 시절, 메모했던 것들을 몇개 가져와 본다.

 

별 떨어지는 동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