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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스크랩>

 

하루키다.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무언가 읽을 만한, 특히나 그 중에서도 마음 놓고 읽을 만한 것을 고르기 시작했을 때, 눈에 들어온 낯익은 이름.

대학 일학년. 고시원 크기의 작은 하숙집 방 안에서 첫 가을을 맞을 때, 내가 처음으로 환호했던 상실의 시대. 그 이후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소설과 환상, 꿈에 미쳐지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고 싶었던 대학 일학년의 조바심은 어디로 가고 없다. 다만, 조금 익숙한 것을 찾고 싶은 욕심이 남았을 뿐.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역시 하루키는 편하게 글을 풀어낸다. 아, 저게 정말 천직이다, 싶을 만큼, 아주 잘도.

흔들리는 지하철. 두툼한(정말 내 필통은 쓰지도 않는 형형색색의 펜으로 미어터진다) 필통에서 연필을 한 자루 꺼내어 들고 책장에 낙서를 하며 책을 읽다, 눈에 띄는 짧은 글을 하나 발견했다. 이하는 그 글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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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에 관한 얘기는 이제 듣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피플>에 실린 ET에게 보낸 아이들의 편지가 너무 재미있어서 소개하려 한다. 스필버그는 그 편지들을 읽고 '마음의 등불이 켜지는 기분'이었다고 하는데, 여러분 마음의 등불은 어떤 상태인지?



 내 친구가 1월에 생일파티를 열어. 그 아이는 너의 열광적인 팬인데 와줄 수 없겠니? 출장 요금이 얼마야?

            -캘리포티아의 산호세에서 , 리니 리버(12세)



 이번 여름 캠프에 갔을 때 마블 초콜릿 한 봉지를 테이블 위에 두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없어져 버렸어! 네가 먹었니?

          -매사추세츠의 가드너에서, 피터 스톤(10세)



 나는 네 살이야. 영화에서 너를 봤어요. 너를 매우 좋아해.
낮에 우리 집에 놀러와. 밤에는 안 돼. 그리고 그 옷은 입고 오지 마.

          -캘리포니아의 어번에서, 저스틴 크레이그



 안녕!ET,난 네 팬이야. 난 네 흉내만 내며 살아. 그래서 내 친구들은 모두

 나를 변태라고 생각해.

                      -매사추세츠의 튜크스베리에서, 빌리 사스턴(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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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등불은 뒤로 하고서, 나는 과연 내가 ET에게 어떤 편지를 보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맞은 편에 앉은 짧은 청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라면 요즘 유행한다는 어그부츠를 사달라고 할지도 몰라, 내 옆자리에서 졸고 있는 술 한 잔을 걸친 아저씨는 ET에게 하늘나는 자전거를 태워 집 앞까지 데려다 달라고 할지도 모르고.... 아니다, 요즘 부모 같으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빨리 영어를 배웠냐고 물을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정작 나는 무얼 말해볼까,에 생각이 미치니 뚝, 하고 머리가 멈춰버렸다. 나는 어떤 편지를 써보낼 수 있을까. 내 자전거도 하늘 위로 띄워달라고나 해볼까, 아님 나랑 손가락을 한번 맞대어 보자고 해볼까. 그것도 아니면? 나랑 인터뷰를 하자고 졸라볼까.(혹시 ET인터뷰를 해냈다고 하면 연예정보신문이든, 뭐든, 누군가 나를 채용하진 않을까?). 큼큼. 돌고 도는 2호선 지하철이 왕십리, 왕십리역입니다를 외칠 때까지 나는 그렇게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생각했다. 주로, 뭔가를 '부탁'해볼까 하는 마음에.


불꺼진 창문. 저기가 내 집이려니 하면서 현관 앞에서 열쇠를 돌리는데, 문득 정말 부탁하고 싶은 게 생각났다.

"ET 나랑 살자"

나랑 놀고, 나랑 공부하고, 나랑 날아다니자. 혹은 나랑 같이 소주를 마시든지.

이제 2004년이 한 달여 남짓 남았다. 끄트머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아직 나는 그 어던 선택이나 결정, 혹은 결말의 끄트머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

새로 구입한 내년 다이어리의 첫장에 '희망은 절망에서 비롯된다'라는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말을 크게 적어넣었다.

무엇이 되든, 어떤 삶을 살든, 끝까지다. 끝까지.



-추워지는 행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