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부로 발령이 난 다음날 좋아하는 선배가 책 한권을 권했다. 정치부에 왔으니 ‘삼국지’나 ‘한국근현대사’ 같은 책을 추천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선배가 권한 건 마케팅 지침서의 고전으로 불리는 '포지셔닝'이라는 책이었다. 1972년 광고회사 간부였던 앨 리스와 잭 트라우트가 쓴 책이다.초짜 정치부 기자에게 마케팅 서적을 권한 선배의 설명은 이랬다.
“정치도 마케팅이다.정치인들을 만나면 자신을 어떻게 포지셔닝할 지 조언 해라. 그러면 그는 취재원이 아닌 친구가 되어 있을 거다.”
정신 없이 총선을 치루느나 정치인들과 아직 마케팅에 대해 논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각당 후보들의 유세전을 지켜보며 정치인들이 고객(유권자) 세그멘테이션(세분화)이나 타겟 마케팅과 같은 전형적 마케팅 기법을 사용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작정 ‘찍어달라’며 전화를 돌려대던 과거와는 분명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정치는 어느덧 기업을 벤치마킹하고 있었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 캠프에서 홍보를 담당했던 한나라당 미디어홍보단(단장 정병국 의원)이 펴낸 ‘대통령 후보를 사선에 올려라’라는 책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대선 당시 기자는 정치부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욕쟁이 할머니’ CF를 보며 막연히 ‘한나라당의 홍보전략이 조금 세련되어 졌구나’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었다.
하지만 책에서 발견한 한나라당의 전략 변화는 그 이상이었다. 두번의 대선 패배를 통해 뼈저리게 체득한 교훈인 듯 했다. 가장 놀라운건 이명박 후보를 상품으로 규정한 대목이다. 홍보단은 이 상품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소비자(유권자)에게 팔아먹을 지 고민했고 철저한 전략을 세워 실행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홍보단의 활동은 기업의 마케팅활동과 큰 차이가 없었다. 기업에서 사용하는 온갖 발전된 형태의 마케팅 기법을 모두 사용했다.
첫번째로 실행에 옮긴 건 내부 커뮤니케이션. 기업들은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앞서 내부 커뮤니케이션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선진적인 회사일수록 더욱 그렇다. 회사가 추구하는 분명한 가치를 확립해 전세계의 임직원들이 공유토록 한다.
예를 들어 미국 코닝사의 직원들은 ‘우리의 몸안에는 파란 피가 흐른다’고 한다. 코닝의 로고가 파란색인 때문이다. 도요타도 전세계 임직원들에게 도요타 특유의 생산방식이자 경영철학인 ‘도요타웨이’를 체화시키기 위해 엄청난 돈을 투자한다. 한나라당 미디어홍보단도 캠프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국민성공시대’라는 캠프의 핵심가치를 체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했다.
두번째는 의사결정의 속도를 높이는 일. 모두가 ‘잘난’ 정치권에서 광고 카피 하나, 매체 전략 하나에 그 많은 중진들이 ‘감놔라 배놔라’ 하면 될 일도 안될 터. CEO 출신인 이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병국 단장에게 모든 결정을 위임했고, 정 단장은 또 실무진들에게 충분한 재량권을 줬다. 치밀하고 효과적인 홍보전이 가능했던 이유다.
그리곤 본격적인 마케팅에 돌입했다. 첫번째 과제는 선택과 집중. 미디어홍보단은 일부 당직자들이 주장한 ‘행복’과 같은 컨셉트는 추상적이고 너무 광범위하다는 이유로 과감히 버렸다. 그리고 이 대통령의 이미지에도 맞고 경제에 대한 시대적 관심에도 부합하는 ‘성공’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해 소비자들에게 반복적으로 노출시켰다. 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는 마케팅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전문가들로 구성된 홍보단은 잘 알고 있었다.
이후에도 미디어홍보단은 최신 마케팅 트렌드를 충실히 따랐다. 스토리에 열광하는 젊은 소비자들의 성향을 간파해 ‘대학 입시 준비 중 만난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야기’ 같은 스토리를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욕쟁이 할머니 CF에 대한 논란(할머니가 충청도 사람인데 전라도 사투리를 쓰게 했다는 따위의)은 끊임 없이 유권자들에 입에 오르내려 '노이즈 마케팅'으로서 큰 효과를 발휘했다.
‘Fun 마케팅’도 활용했다. ‘대통령 후보를 희화화한다’는 일부 당직자들의 볼멘 소리에도 불구하고 TV 연예프로그램인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우스꽝스러운 이 대통령의 모습을 UCC로 제작해 인터넷에 올렸다. 이명박이라고 하면 ‘불도저’나 ‘차가운 CEO’의 이미지를 떠올리던 젊은 유권자들에게 친밀하게 다가설 수 있었던 이유다.
이 밖에도 미디어홍보단은 기업의 혁신 사례를 방불케하는 발상의 전환, 순발력있는 위기관리 등 기업 마케팅팀에서 배워갈만한 수많은 성공사례를 남겼다.이런 과정을 통해 이명박 브랜드는 그들이 기획했던 대로 '메가 브랜드'로 성장해 압도적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치권,특히 보수적 성향인 한나라당의 이런 변화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어쩌면 CEO 출신인 이명박 후보였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다. 한나라당은 공격적 마케팅을 통해 소비자들이 물건을 사게 하는 데 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재구매는 다르다. LG그룹의 구본무 회장이 자주 강조하는 ‘고객가치’를 창출하지 않으면 고객들은 언제라도 기업과 제품에 등을 돌리게 되어 있다.
고객가치창출이란 고객이 제품을 사는데 사용한 돈 보다 그 제품을 통해 얻은 가치가 더 크다고 느끼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해 충성심(로열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5년후에도 소비자(유권자)들이 한나라당에 지갑(표심)을 열게 될 지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5년간 얼마나 '국민가치'를 창출하느냐에 달렸다. 그것이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보다 더 중요한 정부의 사회적 책임(GS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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